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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마이뉴스 이종호

25일 열린 한나라당 서울시장 후보 선출대회는 한 편의 쇼였다.

"안팍으로 회오리 강풍이 몰아쳐도 끝까지 이 사람을 지켜주신 대의원 동지 여러분"에서, "이번 선거는 노무현 정권을 심판하는 선거임을 명심해야 합니다"에서, "나라의 운명이 여러분 손에 달려있습니다. 여러분"까지.

당장이라도 조국을 위해 머리띠를 묶고 뛰쳐나갈 것 같던 분위기는 후보들이 자리로 들어가고, 투표가 끝나고, 개표가 시작되자 일순 돌변했다. 앞 장면이 현 정부를 성토하며, 내가 되지 않으면 한나라당이 망한다는 예언으로 가득 찬 비장미 넘치는 비극이었다면, 뒷 장면은 노래와 춤이 넘치는 희극이었다.

개표가 시작되자 사회자가 무대로 나섰다. 에버랜드에서 주로 레크레이션 사회를 보는 김진씨라고 했다. 그가 마이크를 잡자 장내 분위기가 순식간에 바뀌었다. 그가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한나라당 당가라도 부르나 귀를 쫑긋 세우자 흥겨운 리듬이 흘러나왔다. 너무 익숙한 멜로디였다.

"해 저문 소양강에 황혼이 지면, 외로운 갈대밭에 슬피 우는 두견새야." 소양강처녀였다. 웬 소양강 처녀? "열여덟 딸기 같은 어린 내 순정, 너 마저 몰라주면 나는 나는 어쩌나, 아 그리워서 애만 태우는 소양강 처녀…" 한나라당 마음을 담아 저 노래를 골랐나? 한나라당 마음이 열여덟 딸기 같은 어린 내 순정이란 건가? 그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대회장내에 있는 여성 대의원들이 장단을 맞추기 시작했다. 노래는 흥을 탔다.

"동백꽃 피고 지는 계절이 오면, 돌아와 주신다고 맹세하고 떠나셨죠. 이렇게 기다리다 멍든 가슴에, 떠나고 안 오시면 나는 나는 어쩌나. 아. 그리워서 애만 태우는 소양강 처녀."

노래는 들을수록 묘했다. 선거의 계절이 오면, 돌아와 주신다고 맹세하셨단 건가? 열여덟 딸기 같은 한나라당 가슴이 이렇게 기다리다 멍들었단 건가? 노래는 신이 났다. 노래를 따라 부르다 보니 문득 궁금했다. 소양이 돼야 기다림이 끝이 나지? 소양이 부족해서 소양강 처녀 아냐? 혹시?

무대 한쪽에선 박근혜 대표, 이재오 원내 대표와 의원들이 근엄하게 앉아 있었다. 그들도 노래에 따라 박수를 쳤다. 살짝 살짝 동작도 했다. 신기했다. 한나라당이 저번엔 패션쇼를 하더니, 이젠 전국노래자랑을 주도하는 건가? 소양을 기르는 시간이 끝났는지, 이 노래가 끝나자 사회자가 말했다.

"<소양강 처녀> 하니까, <남행열차> 안 하면 되게 섭섭한 거 같죠. 네. 흥도 나시고 신도 나시고. 개표가 진행되는 상황에서 앞으로도 쭉 한나라당이 승리하시길 바랍니다. 자 기차 만들고 계속해서 노세요. 자. 승리를 미리 자축하고 싶으신 분들은 일어나서 하세요. 일어나서."

사람들이 일어섰다. 신나게 박수를 치고 노래를 불렀다. 흥이 달아올랐다.

"비 내리는 호남선 남행열차에, 흔들리는 차창너머로, 빗물이 흐르고 내 눈물도 흐르고, 잃어버린 첫사랑도 흐르네."

'뭐야?' 하고 듣다보니 신기했다. 가사가 심상치 않았다. 호남 쪽은 전통적인 한나라당 비호감 지역 아닌가? 그 호남선에 비가 내리고, 잃어버린 첫사랑도 흐른다고? 대통령직이 잃어버린 첫사랑인가?

아까 한 후보가 한 말이 생각났다. 그는 대통령직을 저쪽에 두 번이나 넘겨줬다고 했다. 상상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고, 노래도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깜빡 깜빡이는 희미한 기억 속에, 그때 만난 그 사람, 말이 없던 그 사람, 자꾸만 멀어지는데. 만날 순 없어도. 잊지는 말아요. 당신을 사랑했어요."

ⓒ 오마이뉴스 이종호

아. 애절했다. 하마터면 울 뻔했다. 자꾸만 멀어진다니. 날 잊지 말아달라니. 서울시장 후보 선출 대회장은 노래방을 지나 전국노래자랑을 지나, 할머니 할아버지를 모시고 몸에 좋은 옥매트를 파는 곳으로 진화했다. 딱 그 분위기였다. 저런 분위기에 휩쓸려, 우리 엄마 친구분은 옥매트도 사고, 보약도 샀다.

춤추고 노래하다보니, 젊은이가 다가왔고, 집에 가보니 이것저것 손에 들려있으셨다고 했다. 얼떨결에 사셨다고 했다. 그거 때문에 따로 사는 아들내미한테 뵐 면목이 없다고 했다. 생활비 주는 자식들에게 염치가 없다고 했다. 자식이 주는 생활비는 그들 주머니 속으로 쏙쏙 잘도 들어갔다.

그런데 노래 가사도 묘했다. "만날 순 없어도, 잊지는 말아요. 당신을 사랑했어요"라니? 지금 서울시장을 향한 노래야? 대통령 선거를 겨냥한 노래야? 눈에 콩깍지가 씌었는지, 아니 귀에 특수 언어 보청기라도 낀 건지, 이상하게 들리기 시작했다. 환청이 들렸다. 혹시 노래 중간 중간에 최면용 보이스를 넣은 건가? 아. 첩보 영화를 너무 많이 봤다.

김진씨는 흥이 났다. "네. 박수 부탁드리겠고요. 이번 5·31 지방선거에서 한나라당이 국민 여러분의 최고의 사랑을 받는 당이 될 것이라 믿습니다. 여러분 그렇다면 박수 부탁드립니다." 그러더니 다음 노래가 이어졌다. 그런데 그 노래를 듣고 쓰러질 뻔 했다. 제목도 말 안 하고 시작한 노래는 뜻밖이었다.

"강물 같은 노래를 품고 사는 사람은, 알게 되지. 음. 알게 되지."

이런.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였다. 안치환이 노래하고, '안치환과 자유' 앨범에 실린 곡. 아. 이렇게 뒤통수를 치다니. 안치환이 누군가. 그는 그냥 아이돌 가수가 아니다. 민중가요 노래모임 <새벽>과 <노래를 찾는 사람들>출신으로 '자유' 이런 노랠 불렀다. 척 봐도 한나라당과 안 친하다. 한나라당 당원들이 모여 그 안치환 노랠 부르다니?

사회자가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를 열창하면 사람들이 따라 불렀다. 한쪽에 앉은 한나라당 박근혜, 이재오 대표들은 열심히 박수를 쳤다. 노래에 맞춰 박수를 쳤다. 포용력이 넓어진 건가? '표밭이 이념보다 아름다워'인가? 아. 이거야말로 코미디다. 코미디.

"지독한 외로움에 쩔쩔매본 사람은 알게 되지. 음. 알게 되지. 그 슬픔에 굴하지 않고 비켜서지 않으며, 어느 결에 반짝이는 꽃눈을 닫고 우렁우렁 잎들을 키우는 사랑이야말로, 짙푸른 숲이 되고, 산이 되어 메아리로 남는다는 것을…."

노래는 전혀 다른 느낌으로 다가왔다. 이걸 역설의 미학이라고 해야 하나? 사회자 김진씨가 말했다. 그가 말했다. "자 춤도 추시고요. 어깨동무도 하시고요." 사람들은 춤도 추고 어깨동무도 하고 노랠 불렀다. 어? 그때였다. 갑자기 노래가 갑자기 이상해졌다.

"누가 뭐래도 한나라당이 꽃보다 아름다워. 이 모든 외로움 이겨낸, 바로 여러분. 누가 뭐래도 한나라당이 꽃보다 아름다워. 노래의 온길 품고 사는 바로 그대, 바로 당신, 바로 우리 한나라당."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가 아니었다. 그 노래는 그 노랜데, 울려 퍼진 가사는 '한나라당이 꽃보다 아름다워'였다. 발작처럼 웃음이 나왔다. 안치환이 이 광경을 보고 무슨 표정을 지을까? 궁금했다. 또 궁금했다. 한나라당이 꽃보다 아름다워라… 과연 그런 꽃이 있나? 그 생각을 하니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쳇. 아깝다. 그런 꽃이 있고, 그 꽃이 말을 할 줄 알았다면, 재밌을 텐데. 아마 소송이라도 했을 거다. 지독한 명예훼손죄로.

ⓒ 오마이뉴스 이종호

노래는 계속 됐다. 대회장 무대 아래 넒은 광장은 나이트로 바뀌었다. 한 남자는 꽹과리를 들고 춤을 췄다. 대회장을 가득 메운 대의원 혹은 당원들은 순식간에 '주부노래교실' 참가자가 됐다. 성인 콜라방이 됐다. 다들 춤추고 노래했다.

아무도 개표에 대해 말하지 않았고, 주최 측도 개표 발표를 얼마나 기다려야 하는지 말하지 않았다. 실룩실룩 춤을 추고, 짝-짝-짝 박수를 췄다. 강금실 예비후보더러 춤추는 서울시장 어쩌고 한 그들이야말로 춤을 좋아하는 한민족이었다. 문득 혜성처럼 깨달음이 왔다. 그들이 질투한 거였구나. 나도 한춤 하는데 하고.

이젠 남자가 나와 마이크를 잡았다. 양복 재킷 왼쪽 포켓에 꽃을 꽂은 남자는, 노래를 했다. "사랑은 아무나 하나… 눈이라도 마주쳐야지…" 그의 뒤로 여성들이 무대 위에 주르륵 늘어서서 노래를 했다. 박수를 쳤다. 가볍게 흔들었다. 그들은 똑같은 푸른색 스카프를 목에 둘렀다. 검정 재킷에 군청색 바지를 똑같이 입었다.

그들은 '차세대 여성 봉사자들'이라고 했다. 한나라당은 차떼기 대신 '차세대'를 하기로 한 듯했다. 대회장은 이젠 <가요무대>였다. 월요일 밤이면 할머니 할아버지들을 텔레비전 앞으로 불러 모으는 <가요무대>였다. 그리고 환갑잔치였다. 칠순잔치였다. 에버랜드로 가는 버라이어티쇼였다.

계속 사람들은 무대에 올라 마이크를 잡았다. "찰랑찰랑…"을 부르고, 검정 양복을 입은 이들이 주르륵 늘어서서 기차놀이를 했다. 앞사람 어깨를 잡고서 행진했다. 노래를 부른 여성 당원 혹은 대의원은 외쳤다. "한나라당 파이팅!" "한나라당 만세!"

사회자가 말했다.

"좀 더하라는 거 같애. 분위기 좋은가봐. 아직 개표가… 우리 오늘 어디로 여행을 떠날까요? 대한민국에 있는 모두 시청사 도청사 이리로 여행을 떠나자구요. 한나라당이 다 이리로 가서 자리를 잡자고요. 그래야 내년에 1번으로 바뀌어요. '여행을 떠나요'에 마이크 잡으실 분? 노래를 못해 한 맺히신 분? 자. 댄스. 댄스도 춰야 합니다. 오세요. 오세요. 여행을 떠나요…."

사회자는 흥을 돋웠고, 사람들은 춤추고 노래했다. <젊은 그대>가 나오고, <사랑의 트위스트>에 맞춰 트위스트를 췄다. 발바닥을 비볐다. 노래하는 이들 뒤로 커다란 한나라당 로고가 보였다. 무대 위엔 크게 '한나라당 서울시장 후보자 선출대회'라고 써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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