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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7년 전 우리의 안방에선 우리가 만든 만화영화 '황금박쥐'가 방영되었다
TV 만화영화 '황금박쥐'를 기억하세요?

지금 40대 이상 분들은 아마 가물가물 기억이 나는 것 같으면서 입으로는 저절로 그 영화의 멜로디가 흥얼거려질 것이다.

"어디~ 어디~ 어디에서 날아 왔느냐~ 황금박쥐! 검은 구름 헤치며 나타난 정의의 사자 황금박쥐!"

지금부터 정확히 37년 전 1968년 9월. 당시 동양방송(TBC-TV)에서 우리나라 최초로 일주일마다 만화영화가 방영되었다. '황금박쥐' 20분짜리 연속물이었다.

당시의 이 만화영화는 어린이들은 물론 어른들까지 최고 인기였다. 저녁 방영시간이면 온 가족이 모여앉아 주제가를 따라 불렀고 해골 모양의 가면을 뒤집어 쓴 정의의 사자가 악당을 물리치고 하늘을 날아오르는 장면에는 온 집안이 떠나갈 듯 박수갈채를 터뜨렸다.

'황금박쥐' 우리 손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대부분 시청자들은 이 만화영화가 일본 애니메이션을 그대로 수입해서 한국어로 '더빙'하여 방영한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러나 아니다. 이 애니메이션은 순수 우리의 젊은 만화가들의 작품이었다.

당시의 우리 애니메이션 계는 거의 황무지나 다름없었다. 그나마 TV나 극장에서 인기가 있었던 신능파(넬슨 신)씨의 '까스활명수'와 신동헌씨의 '진로 소주' CF 정도였다. 그런 황무지에서 돌연 본격적인 애니메이션이 탄생했으니 과히 놀라운 일이기도 했다.

▲ '황금박쥐'의 여러 장면들이 눈에 선하다.
한일수교 직후인 1966년 5월. 고 이병철씨의 '삼성물산'에서는 발 빠르게 일본 동영(東暎)영화사의 자회사인 제일동화(第一動畵)와 계약을 맺고 일본 애니메이션 작업의 하청을 맡았다. 스토리와 시나리오는 일본에서 들여왔고 작화에서 촬영까지 일련의 작업은 한국에서 했다. 일종의 '보세' 작업이었다. 그 결과물이 바로 한일공동제작 애니메이션 '황금박쥐'다.

삼성에서는 동양TV(현 서소문 소재) 건물 10층에 사무실을 차리고 애니메이션 제1기생을 공개 채용했다. 만화나 그림에 취미있는 사람을 대상으로 50명을 모집했는데 수백 명이 응시했다.

시험문제라는 것이 당시로는 좀 황당한 문제였다.

'서 있는 말의 모습을 180도로 회전해 가면서 10장으로 나누어 스케치 해 보라'는 것이었다. 실물 없는 상상력만으로 그려야 했다. 말하자면 애니메이션의 기본원리를 그려보라는 것이었다.

다행이 운이 좋았던지 필자는 좋은 성적으로 합격했다. 그래서 우리나라 애니메이션 개척자의 한 사람이 된 것이다. 영광일 뿐이다.

모리가와 선생에게 애니메이션을 배우다

▲ 당시의 '황금박쥐' 제작 멤버들이다. 가운데 원 속이 '모리가와' 선생이다.
ⓒ 강인춘
50여명은 다시 세분해서 작화부, 배경부, 트레이싱부, 채색부, 촬영부로 나누어 배치했다. 그리고 일본 코믹 애니메이션의 선두 주자였던 모리가와 노부히데(森川信英 47) 선생이 직접 내한해서 본격적인 애니메이션 교육을 시작했다. 완전한 기초부터였다.

그 때 교육을 받았던 많은 제자들은 지금도 모리가와 선생을 잊지 못한다. 그의 열성적인 교육열과 착한 품성, 그리고 일대 일 지도로 각기의 개성을 키워주면서 자상스럽게 이끌어주어 한국 제자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은 선생님이셨다.

▲ 현 86세의 모리가와 선생의 근황이다.
ⓒ NHK화면캡처
얼마 전 '한일문화교류'란 이름으로 일본의 NHK-TV에서 한국으로 취재를 왔다. 한국에 최초로 애니메이션을 보급시켰다는 일본인 모리가와씨의 애니메이션 생애에 대한 다큐멘터리였다.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선생의 한국 제자들을 수소문해서 한 자리에서 모임을 하고 선생과의 여러 가지 일화를 듣는 자리이기도 했다. 선생은 어느 덧 86세의 고령이셨지만 그 때 제자들 이름 하나하나를 일일이 기억하면서 그리워하신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함께 모인 우리들은 한동안 가슴이 뭉클했다.

선생은 일본인이면서도 직접 가르친 한국의 제자들이 자국의 애니메이션 발전에 과연 얼마나 기여했나를 궁금해 하셨다.

▲ 만화 영화의 교육을 받고 있는 당시의 모습들.
ⓒ 제일동화
다시 처음으로 이야기는 돌아간다. 1기생 교육이 끝나고 연이어 2, 3기생을 뽑아 도합 100여명의 인원으로 본격적인 '황금박쥐'의 제작에 돌입했다. 한국 사람은 재질이 많은 민족이다. 그래서 애니메이션 실력도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여 몇 달 후부터는 일주일에 한 편 정도를 완성하는 데까지 갔다. 그것은 빠른 기술의 습득이었고 또한 결과물로는 대단한 물량이었다.

그렇게 해서 '황금박쥐'는 일본에서나 한국에서나 최고의 인기 애니메이션으로 올라섰다.

제대로 된 우리 애니메이션이 없다

▲ 일본의 명감독인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인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 지브리스튜디오
그러나 이제 40여년이 지난 오늘 우리 애니메이션 계는 과연 어떻게 되었나? 만화영화에 대한 테크닉과 작화 실력은 일본 못지않은 세계적인 실력을 갖추었으면서도 현실은 제대로 된 만화영화 한 편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다.

초창기에 김청기 감독(그도 역시 한동안 우리와 같은 멤버였다)의 '로보트 태권 V' 한 편 정도가 성공을 거두었지만 다음 해부터는 실패에 실패를 거듭했다. 한마디로 재미가 없었다. 방학을 겨냥해서 만든 날림 만화영화라 어린이들도 외면했다. 한마디로 만화영화 스토리 작가의 부족 때문이었다.

그로 인한 여파는 오늘에까지 이르렀다. 지금 전국의 대학 애니메이션과에서 배출하는 인원만 해도 일년에 수백 명씩 되지만 그들을 받아 줄 일터가 없다. 더구나 애니메이션 창작은 몇몇 사람에게 돌아갈 뿐이고 나머지는 대부분 기계적인 노동자라고 스스로 자책하고 있는 현실이다.

일본은 우리와는 달리 해를 거듭할수록 만화영화산업이 발전되고 있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이 발표하는 작품들은 우리나라에서도 많은 갈채를 받고 있다.

▲ 당시 '황금박쥐'를 제작했던 멤버들 몇 명이 한 곳에 모였다.
ⓒ 강인춘
"진정한 만화의 스토리 작가가 없습니다. 또한 오늘의 현실에선 투자자도 나서질 않습니다. 만화영화 한 편이 몇 년에 걸쳐 제작되어 나오는 까닭에 많은 돈을 투자할 사람이 없는 것은 당연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황금박쥐'의 같은 제작 멤버였던 만화 감독인 임정규씨의 안타까워하는 말투가 가슴을 아프게 한다. 그리해서 우리 어린이들이 재미있게 볼 수 있는 우리 만화영화가 없다는 현실이 답답하기만 하다.

이제 40여 년 전 인기를 누렸던 제 2의 '황금박쥐' 시대는 진정 다시 돌아오지 못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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