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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월 29일 친일인명사전 수록 예정자 1차 명단이 발표된 뒤 몇 가지 논란이 일어났다. 특히 일부 정치인의 부친이 포함되면서 정략적 의도 아니냐는 비난도 제기됐다. 이에 대해 임대식 친일인명사전 편찬위원이 기고를 보내왔다. 임 위원은 서울대 국사학과를 졸업했으며 현재 계간 <역사비평> 편집주간을 맡고 있다. <편집자주>
▲ 민족문제연구소와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는 8월 29일 오전 서울 세종문화회관 컨퍼런스홀에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1차명단' 3090명을 발표하고 있다.
ⓒ 오마이뉴스 권우성
필자는 친일인명사전 편찬위원회에 참여했다. 일제 지배에서 벗어난 지 60년, '을사늑약' 100년 만에 친일인명사전 수록 예정자 1차명단이 발표되는 걸 지켜보면서 뒤늦은 통과의례를 치르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개인적인 감상에서 잠시 벗어나 언론이나 정치권, 특히 네티즌의 반응이 궁금해 신문기사와 댓글을 검색해 봤더니 의외로 오해로 인한 비난도 적지 않았다. 이같은 오해중 한 가지만은 답해야겠다. 먼저 편찬위원회 공식 입장이 아닌 사견임을 분명히 해두고자 한다.

1차명단 발표와 관련해 가장 많이 거론되는 문제는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의 아버지 박정희는 포함됐는데 열린우리당의 신기남·김희선·이미경 의원의 아버지는 포함되지 않았다는 비난이다.

일부 언론이 "국가기관인 국사편찬위원회의 지원금과 '친정부 인터넷언론 오마이뉴스'의 모금으로 사전편찬 작업이 진행된다"는 점을 구태여 거론한 것도 같은 맥락일 것이다. 스스로 돌이켜 보면 자발적으로 성금을 낸 이들의 반응이 무척 신경쓰이긴 했지만 정부와 여당의 입장을 고려한 적은 추호도 없다.

신기남 의원의 아버지는 헌병 오장, 김희선 의원의 아버지는 만주 특무, 이미경 의원의 아버지는 헌병으로 활동했다는 주장이 제기된 바 있다. 이 주장이 사실이라면 편찬위가 정한 심의대상에 포함될 수 있다. 다만 이미경 의원의 아버지는 헌병이었다고 하지만 그 직위와 활동이 거론된 바 없어 단언할 수 없다.

신기남·김희선 부친 제외, 1차 심의대상 아니었기 때문

그럼 왜 신기남 의원과 김희선 의원의 아버지가 포함되지 않았는가? 친일인명사전 수록 예정자 1차명단 자료집에는 2차 심의대상으로 12개 항목이 적시돼 있는데 지역적으로는 중국 동북(만주), 부문으로는 헌병의 경우도 그에 포함된다. 형식 논리적으로 말하자면 그들이 1차 발표에서 제외된 것은 1차 심의대상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2차 심의대상으로 미룬 것 자체를 정치적 의도가 작용했다고 의심할 수도 있겠지만 2차 심의대상은 대부분 자료조사가 미진하거나 증거부족으로 미룬 경우임을 분명히 하고자 한다.

우리가 가장 신뢰한 자료는 일제가 남긴 문헌 기록이나 당대 자료다. 이러한 원칙은 독립유공자를 선정하는 데도 기본적으로 적용된다. 일제 기록이나 문헌자료가 그나마 신뢰도가 높은 데 비해 후대 기록이나 증언은 부정확하고 조작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박정희 집권기에 박정희가 독립동맹이나 광복군에 참여했다는 증언이나 기록이 나온 것이 단적인 예일 것이다. 또한 해방 후 기록이나 증언은 문헌자료보다 더 철저한 사료 비판이 요구되기 때문에 1차 심의에서는 증언 자료를 거의 채택하지 않았다.

예를 들어 지난 대선 과정에서 법원 서기를 지낸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 아버지 이홍규의 친일행위에 대한 증언들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법원서기는 고등관급에 해당하지 않으며 친일행위를 입증할 수 있는 당대 문헌 증거가 없었기 때문에 이홍규는 명단 포함 대상으로 거론조차 되지 않았다.

또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인 이갑성을 비롯, 독립운동가들에 의해 밀정으로 지목되는 인물들이 적지 않지만 다수 증언만 있을 뿐 문헌기록은 전혀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래서 이갑성도 논의 대상조차 되지 않았다.

헌병·특무 및 만주지역 자료 절대 부족

조선인 헌병에 관한 자료는 발굴된 것이 거의 없다. 필자가 아는 바로는 헌병 오장을 지낸 조선인으로 현재까지 거론된 자는 악명 높은 김창룡과 신기남 의원의 아버지 등에 불과하다.

그러나 심지어 그 유명한 김창룡조차 헌병 오장을 지냈다는 것과 관련, 신뢰할 만한 기록은 발견되지 않는다. 그나마 신빙할 만한 문건은 김창룡 자신의 진술에 의거한 장교 이력서철일 것이다. 그러나 이 자료는 연구자의 손이 미칠 수 없는 곳에 보관돼 있다.

신기남 의원과 이미경 의원의 아버지가 헌병이었다는 주장이 제기되면서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특별법'에 헌병이라는 용어가 특별히 추가됐지만 더 이상 진전은 기대하기 어려울지도 모른다. 결국 헌병 오장에 대해서는 관련자들의 증언과 문헌 발굴을 좀더 기다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중국 동북지역의 친일활동에 대한 자료발굴과 입수도 여전히 미진하다. 이러한 사정으로 이 지역 관련자들은 1차 발표에서 일괄적으로 제외됐다. 그래서 만주국 고위 관리를 지낸 최규하 전 대통령도 포함되지 않았다. 다만 활동 전모가 파악되는 만주군 장교들만 포함됐다. 특무에 관한 자료는 더욱 그러하다. 더구나 전문역량 결여, 자료발굴과 입력의 미진함으로 이 지역정보는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만주에서 특무란 대체로 조선에서의 고등경찰에 해당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고등경찰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포함시켰듯 특무도 그렇게 처리될 것이다. 고등경찰의 경우 몇 년치 경찰 직원록을 통해 부분적으로 그 명단을 확보했지만 만주 특무 명단을 얼마나 확인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만주국 직원록 등의 공간(公刊) 자료와 중국 당안관에 관련 자료들이 보관되어 있지만 접근이 쉽지 않다.

최근에야 일부 자료가 여러 통로를 통해 입수되고 있는 실정이다. 특무명단 등을 발굴할 가능성을 보여준 <월간조선>의 노고에 진정으로 감사할 따름이다. 하지만 중국 동북지역의 경우 명단을 입수한다고 하더라도 중국인, 조선인, 일본인 등이 혼재돼 있고 창씨개명까지 이뤄진 상황임을 감안하면 조선인을 골라낸다는 것은 어려운 작업이다. 현재로선 김희선 의원의 아버지가 특무였다고 주장하는 <월간조선>이 제시한 자료들이나 증언의 신뢰도를 따지기 어렵다.

▲ 민족문제연구소와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는 8월 29일 오전 서울 세종문화회관 컨퍼런스홀에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1차명단' 3090명을 발표했다. '박정희 바로알리기 자발적 국민모임 새로운 물결21' 회원이 회견장 밖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이 진정한 독립투사라며 항의시위를 벌이고 있다.
ⓒ 오마이뉴스 권우성
자료 없이 의혹만을 근거로 선정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정리하자면 헌병과 중국 동북지역 인물들은 자료 및 조사부족 때문에 1차 심의대상에서 일괄적으로 제외됐다. 신기남 의원과 김희선 의원의 아버지가 심의대상에조차 오르지 않은 것도 헌병 오장이나 특무에 관한 자료는 더욱 미비했기 때문이다.

인명사전 편찬작업을 하다 보면 확증을 찾기 어려운 경우에 무수하게 직면하게 된다. 가령 일제 강점기 때 밀정이 무수히 많았고 밀정으로 거론되는 자들도 적지 않다. 이들의 해악이 결코 적지 않지만 문헌상 증거가 거의 없기 때문에 안타깝게도 2차선정으로 미룰 수밖에 없었다.

지금으로서는 친일인명사전에 올릴 수 있는 밀정이 1명이라도 있을지 자신할 수 없다. 정치적 편파성을 말하는 이들에게 의혹이나 증언을 근거로 친일인명사전 대상자를 선정하는 것에 동의하는지 되묻고 싶다.

또한 신기남·김희선 의원 아버지의 경우 설령 증거가 확실했다고 하더라도 편찬위원회는 작업상 편의를 위해 1차명단에 포함시키지 않았을 것이다. 헌병오장과 특무에 대한 전체 정보가 구비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대체로 수십, 수백 명의 헌병 오장과 특무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상황에서 1~2명의 대상자만 발표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필자는 정치적 고려가 작용한 구색맞추기 선정에 결사코 반대했을 것이다. 이홍규와 이갑성은 물론 신기남·김희선·이미경 의원의 아버지도 2차선정 작업에서 심의대상에 오를 것임은 분명하다. 그리고 그 결과가 어떨지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어려운 과제 남겨진 2차선정, 친일사전 성격 좌우

편찬위는 수십만 명을 대상으로 친일의 관점에서 조사를 했다. 컴퓨터라는 문명의 이기가 있었기에 그나마 조사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동명이인이 적지 않고 창씨개명 때문에 동일인 여부를 확인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수백 만개 기록을 취합하는 과정에서 한자명, 나이, 활동영역까지 비슷하다면 동명이인을 가린다는 것은 정말 어렵다.

그렇지만 60여년이 지체된 역사적 작업을 포기할 수 없었으며 당시 살았던 2천여 만 명이 모두 공범이라는 쓴소리를 물리치지 않을 수 없었다. 여기서 편찬위원들이 선정작업을 얼마나 신중하게 진행했는지 구구절절이 설명할 수 없다. 다만 그러한 신중함에도 오류와 불찰이 있을 가능성을 두려워할 뿐이다. 일개 편찬위원에 불과하지만 책임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고 생각하면 잠을 설치게 된다.

1차 발표 시점에서 개인적으로 아쉬운 점은 지식인들이 의외로 적게 포함된 것이다. 지식인들은 지위나 직위가 아니라 그 활동으로 평가되는데, 이들이 남긴 글이나 행적을 면밀히 분석·평가하지 못해 포함되지 않은 경우가 적지 않다. 이 작업에는 고도의 전문성이 요구된다.

가령 유치환의 시가 친일적인 것인지, 친일적이라면 어느 정도인지 가리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결국 정말 어려운 작업은 2차로 미뤄졌다고 할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2차 선정 작업은 심각한 고뇌와 진통을 수반할 것이고 인명사전의 성격을 크게 규정할 것이다.

친일연구의 선구자 임종국의 아버지 임문호도 1차 대상자에 포함됐다. 임종국이 생존해 있었더라면 어떤 반응을 보였을지 자못 궁금하다. 어떤 이는 '아버지 죽이기' 라고 평가할 수도 있을 것이다. 친일의 역사는 어둡고 아픈 역사다. 그러나 그것을 언제까지나 묻어둘 수 없다.

친일인명사전 편찬은 한번쯤은 거쳐야 할 통과의례를 뒤늦게 치르는 것이다. 물론 통과의례에는 비용이 들고 진통이 따르겠지만 말이다. 개인적 희망을 말하자면 조용히 그 통과의례를 치르고 싶다. 그래서 그들의 후손이 누구누구인지를 구태여 말하기를 자제하게 된다.

끝으로 이러한 역사적 작업을 감당해온 임종국, 그리고 그 제자들인 민족문제연구소 관계자들의 고투에 특별히 경의를 표하고 싶다. 그들은 오직 사명감 하나로 철야작업을 감당해냈다. 방대한 자료를 축적한 민족문제연구소는 필요한 정보를 풍부하게 제공했다.

또한 임종국과 그 제자들의 무모한 도전을 이만큼 현실화시켜준 든든한 배경, 즉 국민의 정신적·물질적 지원을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이 두 가지 요소가 없었다면 친일인명사전 편찬의 첫발에 해당하는 1차 대상 선정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동명이인에 따른 오류 가능성의 실례

이 글을 쓰기 위해 자료를 검색하는 과정에서 접한 동명이인의 오류 가능성을 실감나게 보여주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1차 발표에 대한 '안병직'의 비판적인 언급이 <중앙일보>에 기사화됐다는 말을 들었을 때 비판적 발언을 할 만한 두 사람의 안병직(安秉直, 安秉稷)이 떠올랐다.

전자는 소위 식민지근대화론, 후자는 탈민족적 역사인식을 주창하는 학자이다. 묘하게도 두 안병직은 친일 과거 청산에 비판적이거나 소극적인 두 흐름을 각각 대표하지만 그 존재와 입론은 크게 다른다.

중앙일보 인물정보에 의하면 전자는 1935년생, 전 서울대 경제학과 교수, 서울대 명예교수, 일본 후쿠이 현립대 대학원 특임교수, 한국근현대경제사 전공이다. 후자는 1955년생, 서울대 서양사학과 부교수, 독일사전공이다. 둘 중 누구인가를 가리기 위해 중앙일보를 검색했더니 후자라는 것을 쉽게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런데 '안병직'으로 검색된 기사 중 안병직(70) 서울대 명예교수의 「역사교육 민족주의 탈피해야」(연합뉴스 7월 8일자) 기사가 눈에 들어왔다.

식민지근대화론자들과 탈민족주의자들 모두 민족 중심의 역사인식과 과거사 청산 등에 비판적인 까닭에 양자가 가끔 연대하기도 하지만, 안병직(安秉直) 명예교수가 탈민족적 주장을 펴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내용도 독일사례를 중심으로 한 것이기 때문에 더욱 의심이 갔다.

그래서 KINDS로 검색했더니 관련기사는 <한겨레>(7월 9일자)에만 있었으며 기사에는 발표자가 '포스트모더니즘 역사관을 주장해온 안병직 서울대 명예교수'로 돼 있었다. 한겨레 기사는 두 사람의 안병직을 합쳐 놓은 것이라 더욱 의심이 갔다. 그런데 며칠 뒤 한겨레 기사(7월 12일자)에서 '서울대 명예교수가 아니라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라는 정정기사를 확인할 수 있었다.

결국 <연합뉴스>, <중앙일보>, <한겨레> 기자도 두 안병직을 잘 구별하지 못한 오류를 범한 셈이다. 정보 전문가들도 당대 인물을 이렇게 혼동하고 있는데 하물며 후대 사람이 과거의 동명이인을 가린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필자도 역사를 공부하면서 기자들과 마찬가지로 동명이인을 착각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이 사례를 통해 친일인명사전 수록 예정자 선정 작업이 참으로 어려운 작업임을 전하고 싶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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