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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탄생> 표지
<미국의 탄생> 표지 ⓒ 그린비
역사를 다룬 소논문이나 단행본을 읽으면서 고개를 갸웃하는 경우가 더러 있다. 왜 이런 글을 썼을까, 하는 의문이 들거나, 반대로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 때 그러하다. 정말 그럴까, 하는 의구심에 사로잡혀 고개를 흔드는 경우도 물론 없지 않다. '미국 역사교과서가 왜곡한 건국의 진실'이란 부제를 달고 있는 <미국의 탄생>은 두 번째 경우에 해당한다.

라파엘은 우리에게도 잘 알려져 있는 미국의 건국과정과 혁명기에 깃들인 여러 일화에 수술용 칼날을 들이댄다. 미국인들에게 애국심을 고취하고 선량한 시민을 육성하기 위하여 '발명된' 역사가 미국혁명과 결부된 건국역사라고 저자는 확신한다. 몇몇 영웅들의 신화적인 이야기에 기초한 집단적 정체성 부여와 애국심 함양에 담긴 폐해를 지적하는 것이다.

창작된 역사: 혁명의 전령 폴 리비어

남북전쟁 발발직전인 1860년 시인 헨리 롱펠로는 연방분열을 목전에 둔 위기상황에서 전령 폴 리비어에 대한 민담을 듣는다. 다음날 롱펠로는 1775년 4월 18일 밤 영국군이 렉싱턴으로 이동한다는 전갈을 사무엘 아담스와 존 핸콕에게 알렸던 리비어 이야기를 거의 한 세기 뒤에 기막히게 살려낸다. 고독한 신화적 영웅이 필요했던 순간의 놀라운 고안이었다.

폴 리비어는 밤새 말을 달렸고/ 그가 외치는 경보도 밤새 울려 퍼졌다./ 미들섹스의 모든 마을과 농장에/ 어둠 속의 목소리, 문 두드리는 소리가/ 오래도록 메아리쳤다!/ 과거의 밤바람을 타고/ 우리 역사와 더불어 마지막까지/ 어둠과 위험과 위급의 시간을 거쳐/ 사람들은 깨어 들으리라/ 다급한 말발굽소리를/ 폴 리비어가 전하는 심야의 전갈을. (20쪽)

미들섹스 전역에 울려 퍼진 리비어의 경보. 절체절명 위기일발의 순간에 밤새 말을 달려 모든 가정을 파국으로부터 구해낸 혁명전령 폴 리비어. 절박한 순간에 신생국 미국의 운명을 오로지 혼자 감당해야 했던 혁명영웅 리비어. 롱펠로가 130행에 이르는 장시에서 만들어낸 역사적 왜곡은 그 후로 140년이 넘도록 강고한 생명력을 자랑하고 있다.

누구도 주목하지 않았던 전령 리비어 이야기는 허구를 토대로 역사가 제작된 경우라고 저자는 강조한다. 그도 그럴 것이 미국에서 간행되는 모든 초-중등학교 역사서에서 폴 리비어 이야기는 빠짐없이 수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수많은 전령들의 이야기를 묻어버리고 개인에게 초점을 맞춘 롱펠로의 장시는 역사에서 삭제되어야 한다고 라파엘은 말한다.

날조된 연설: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어릴 때부터 우리는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는 구절을 학교나 책에서 수없이 듣고 읽어왔다. 이것은 1775년 3월 23일 버지니아 리치몬드 헨리코 교회에서 행해졌다고 기록되어 있는 패트릭 헨리의 연설 가운데 백미에 해당한다. 그런데 저자에 따르면 헨리의 연설 역시 훗날 재생산되었다는 것이다.

1805년 윌리엄 워트 변호사는 패트릭 헨리의 전기를 쓰기로 결심하고 자료를 수집한다. 자료부족에 시달리던 그는 젊은이들을 위한 감동적인 이야기에 엄정한 역사기록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워트는 1817년 <패트릭 헨리의 생애와 인물개요>를 출간하였는데, 여기에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는 연설이 수록되었다.

헨리가 연설을 한 42년 뒤, 그가 사망한지 18년이 지난 시점에 세상에 온전한 형태로 등장한 감동적인 연설의 진위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워트는 연설내용을 당시 헨리코 교회에서 들었다는 조지 터커 판사로부터 입수하였다. 그러나 터커가 제공한 연설내용은 기록이 아니라, 터커의 회상에 전적으로 의지한 것이었다. 과연 그런 회상이 믿을 만한가.

<미국의 탄생> 저자는 43년 전인 1962년 10월 22일 케네디 대통령의 '쿠바봉쇄' 연설을 기억하고 있는지 묻는다. 그는 대토지 소유주이자 인디언 영토를 탐낸 탐욕스런 버지니아 주지사이며 노예소유주였던 패트릭 헨리의 이중적 행태를 낱낱이 들춰낸다. 그리하여 우리가 암송하는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에 내재된 후대의 날조를 거침없이 지적한다.

혁명의 이면: 추방되고 살해된 아메리카 원주민

미국인들은 독립전쟁을 혁명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미국혁명은 서부팽창을 촉진한 정복전쟁이기도 했다는 것이 라파엘의 생각이다. 미국혁명을 인디언 관점에서 바라보면 상황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백인들의 전쟁이 인디언 부족들 간의 내전으로 비화되었다고 저자는 말한다. 생존을 위해 어느 한편에 가담해야 했던 인디언들의 비극은 지금도 묻혀져 있다.

독립전쟁 이전에 영국은 백인 이주민들이 서부로 이동하지 못하도록 금지하였다. 그러나 전쟁이 끝난 다음 이주민들은 엄청난 속도로 애팔래치아 산맥을 넘어 인디언 영토를 침략하였다. 그들의 침략배경에는 인디언은 땅을 제대로 이용할 줄 모르는 '야만인'이자 저열한 인종이기에 정복해야 마땅한 열등한 종족이라는 관념이 깊이 각인되어 있었다.

"백인이 인디언 땅을 정복하고 이주하는 것은 백인종의 위대함과 문명화된 인류행복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일이었다... 인디언들은 어떤 백인보다도 둔하고 어리석기 때문에 결코 야만성을 탈피할 수 없다." (300쪽)

이런 인종주의적인 비방에 기초하여 미국은 불과 10여년 만에 애팔래치아 산맥 서쪽의 방대한 땅으로 영역을 확장하여 태평양까지 이르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미국 역사교과서 기록에서 혁명전쟁이 결과한 서부팽창과 인디언 전쟁이야기나 인디언의 관점은 조금도 나타나지 않는다고 한다. 혁명을 미화하고자 하는 역사가들의 의지 때문이다.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의 현행 교과서 13종 가운데 혁명전쟁 이후 백인들의 팽창에 대항하여 인디언들이 연합하여 저항한 이야기를 다룬 교과서는 없다... 미국이 세워질 무렵 그들의 권리가 무시되고, 그들의 땅이 백인 이주민들에게 분배된 중대한 시기에 관해서는 단 한 마디도 언급되지 않는다." (297쪽)

짧은 맺음말

이밖에도 서책 <미국의 탄생>에는 다수의 허구적인 영웅 신화들이 자리한다. 메이슨 윔스가 창작하여 유명해진 정직한 조지 워싱턴의 벚나무 일화, 미국혁명의 진정한 여장부 몰리 피처 이야기, 신화가 된 포지 계곡의 겨울 이야기, 링컨이 부활시킨 제퍼슨과 독립선언문, 지나치게 평가된 혁명가 샘 애덤스 이야기 등등.

라파엘은 18쪽에 달하는 참고문헌에 입각하여 지금도 생명력을 잃지 않고 있는 독립혁명과 건국신화의 이면들을 들춰낸다. 독립혁명에 담긴 민중주의와 국민주권, 능동적인 시민상 확립이 그의 사유 기저에 자리하고 있다. 혁명의 선두에 서서 민중을 지휘하는 영웅들의 신화가 불러오는 비민주성과 허구성, 역동적인 혁명의 평면화에 반대하기 때문이다.

소수의 혁명전쟁 영웅들이 다수를 대신하고, 영웅성이 민주주의와 민중주의를 능가하며, 날조된 허구가 실제 역사를 압도하는 역사왜곡에 단호히 반기를 드는 저작이 <미국의 탄생>이다. 토론과 비판을 통해서 보다 정직하게 역사와 만나야 한다고 주장하는 라파엘은 "이야기를 통제하는 사람은 역사를 통제한다"고 뜨끔하게 일침을 놓는다.

덧붙이는 글 | <미국의 탄생>, 미국 역사 교과서가 왜곡한 건국의 진실, 레이 라파엘 지음, 남경태 옮김, 그린비, 2005.
 

<미국의 탄생>을 읽고 지난 세기 80년대 전두환 철권통치시기를 떠올렸습니다. 민중의 자유로운 담론을 ‘국가보안법’과 ‘국가원수모독죄’로 한사코 막았던 시대. 그럼에도 자유를 향한 민중의 의지가 종당에는 독재자와 하수인들의 항복을 이끌어냈던 대변혁기. 그런 1980년대 학원가 시위와 노동운동은 언제나 몇몇 신화적인 인물들과 연계되곤 하였습니다.

암울했던 시기에 민중을 달래주던 걸출한 인물들의 호쾌한 영웅담은 우리에게 청량제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달리 생각하면 역사가 몇몇 선택된 소수의 손에 좌지우지될 수 있다는 생각은 천진하기도 하고 어리석기도 한 것입니다. 역사적인 사건이 개인에게 미치는 영향이 아니라, 개인들이 사건에 영향을 미치는 공식은 생각하기 어려운 때문입니다.

하루가 멀다 하고 터져 나오는 대한민국의 치부들을 보면서 완전한 과거청산은 아니더라도 지난날의 비리와 부정에 대한 서릿발 같은 칼날이 절실하게 소용됨을 느낍니다. 200년도 더 지난 건국시기 영웅들의 과거사 왜곡을 당당하게 고발하는 라파엘의 용기에 박수치면서, 불과 8년 전 과거를 "켸켸묵은 옛날로" 규정하면서 면죄부를 달라는 어느 야당 정치인의 용감한 주장을 떠올려봅니다.


미국의 탄생 - 미국 역사 교과서가 왜곡한 건국의 진실들

레이 라파엘 지음, 남경태 옮김, 그린비(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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