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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범 묘쇼 앞에 선 박기서씨
ⓒ 박도
박기서. 그의 고향은 전북 정읍시 산외면 참시내(진계리) 마을이다. 이 마을에는 일찍이 전봉준 장군이 머물기도 했고, 마을 뒷산에는 동학농민전쟁의 김개남 장군 묘소도 있다.

그는 가난한 농사꾼의 자식으로 태어났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남들은 전주로 유학 갔지만 그는 책가방 대신 지게를 지고 산에 오르내렸다고 했다.

기자가 뒤늦게 독립운동사에 관심을 가지고 항일유적지를 답사하면서 독립운동 관련 책을 펼쳐보거나 도서관에서 자료를 찾아보면 독립전사로 앞장서거나 독립운동 성금을 보낸 이들은 의외로 가난하고 못 배운 무지렁이들이 더 많았다.

상해 임시정부에 독립자금을 보낸 이는 하와이나 멕시코의 사탕수수밭에서 일한 노동자들이 태반이었다. 기자가 연전에 백범 암살 배후를 밝히고자 성금을 모을 때도 대부분 서민들이 쌈짓돈을 보내 주셨다. 독립전선의 선봉장에 선 이도 예외가 아니었다. 포수에서 독립운동의 전설적인 영웅이 된 홍범도 장군, 소작농에서 조선혁명군총사령이 된 양세봉 장군, 신돌석 장군 등….

단군 이래 이 나라를 지켜온 이는 기층 민중들이었지 결코 지배 계급은 아니었다고 한 역사학자는 말했다.

시간 되돌려도 안두희 응징할 것

▲ 박기서씨(백범 묘쇼 앞에서)
ⓒ 박도
- 출감 후의 전과자로서의 어려움은 없었습니까?
"출감 후 취직이 잘 안 되더라고요. 박기서라는 사람은 엉뚱한 짓을 하는 사람으로 낙인이 찍혔던 모양이에요. 운전대로 먹고 살려면 오너가 되는 수밖에 없데요. 그래서 개인택시를 샀습니다. 여태 그 빚 갚는다고 허리가 휘어집니다."

- 가족 관계는?
"처와 두 딸과 아들입니다. 제가 안두희를 처단할 때가 맏딸이 대입 수능 시험을 20일 앞둔 때였습니다. 아버지가 도와 주지는 못할망정 유치장이다 교도소다 재판 받는다고 마음 고생이 많았나 봐요. 늘 그 점을 미안케 생각합니다. 지금은 출가했고 네 식구가 살고 있어요."

- 요즘 택시 요금이 올라서 손님이 없어서 어렵다고 하던데요.
"서울에는 올랐지만 제가 사는 부천에는 아직 오르지 않았습니다. 택시기사가 가장 경기에 민감하다고 하는데 어려운 때가 어제 오늘이 아니지요. 외환 위기 후 늘 어려웠어요. 우리들 어려운 것보다 젊은이들이 일감이 없는 게 더 걱정이지요."

- 택시 손님들 중에 박기서씨를 알아보는 사람이 있나요?
"하루에 50분 정도 손님을 모십니다. 개중에는 앞좌석에 이름도 있으니 알아 보는 이도 있습니다. 격려해 주시는 분도 있고, 밥이라도 한 끼 대접하고 싶다는 분도 있습니다."

- 바람직한 삶의 자세라고 한다면요.
"사람은 잘못을 저지를 수 있습니다.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면서 회개 반성하는 삶이 바른 삶의 자세라고 생각합니다."

박기서, 그는 <백범일지>를 줄줄 외웠다. 백범(白凡)은 '백정(白丁) 범부(凡夫)'의 준말로 이보다 더 자신을 낮출 수 있느냐고 하면서 백범을 알고부터는 당신이 못 배운 것을 후회하지 않고, 못 배워도 훌륭한 인물이 될 수 있다는 걸 배웠다고 했다. 그러면서 당신은 늘 백범의 진정성과 역사관, 겨레와 나라에 대한 헌신적인 백범 정신에 감격한다고 했다. 또 백범을 통해 의로운 삶이 무엇인지 알았다면서 백범은 겨레의 스승이요, 우리 나라 현대사에서 가장 뛰어난 인물이라고 했다.

- 마무리 말씀을 부탁드립니다.
"동학 혁명이 성공했더라면 나라가 달라졌을 겁니다. 백성들이 깨어 있어서 다시 민족 반역의 무리나 그 후손들이 지도자가 되거나 외세에 빌붙는 이들을 이 땅에 지도자로 발붙일 수 없게 해야 합니다. 백범 선생은 내 삶의 나침판이었습니다. 그 어른을 위하는 일이라면 남은 목숨도 기꺼이 바치겠습니다.

▲ 효창원 백범 묘소
ⓒ 박도
- 다시 그런 기회가 와도 안두희를 몽둥이로 내리치겠습니까?
"그러믄요. 마음 먹었던 것을 행동으로 옮기는 일인데, 제 행위는 확실한 신념을 가지고 실천에 옮긴 겁니다. 그를 처단하고 내 발로 자수해 교도소도 갔지만 복역 기간 내내 제 행동을 후회한 적은 한 번도 없었어요. 교도소에 있었던 그 기간이 제 생애에서 가장 기뻤습니다."

그는 자기 손에 피는 좀 묻혔지만 민족정기를 말살한 인간 쓰레기를, 젊은이들의 정신을 썩게 하고, 고약한 냄새로 세상을 더럽히는 자를 자기가 처치했다는 자부심으로 꽉 차 있었다.

기자에게 굳이 밥 한 끼를 대접하겠다고 하는 걸 한사코 뿌리쳤다. 그러면 전철역까지 당신 택시로 데려다주겠다고 하여 그마저 거절할 수 없어서 남영동 역까지 신세를 졌다. 그 때문에 택시를 타고도 요금을 내지 않고 내리는 염치없는 사람이 되고 말았다.

암살범 안두희는 어떻게 살았나?
소령 예편 후 군납공장 차려 부 쌓아

▲ 안두희의 수기 <시역의 고민>
R 중위는 이번 나의 형을 무기징역 정도 예언하면서, 복역 중 후견인이 되어 주마하며 만약 사형이 되면 '후일 저승에서 다시 만나자'는 농담 아닌 웃음을 웃는 것이었다. 나는 감격의 눈물을 금치 못했다.

밤이 깊었는데 "안 소위 자는가?"하며 R 중위가 또 왔다. 들고 온 종이조각을 내민다. "애국자 안두희를 석방하라" "안두희 만세!" "무죄석방 만세!"라고 쓴 아직도 풀이 마르지 않은 벽보였다.


안두희가 썼다는 <시역의 고민> 끝부분이다.

백범 암살 뒤 안두희는 1949년 8월 6일 육군중앙고등군법회의에서 종신형을 선고 받았다. 하지만 3개월 후인 그해 11월에 징역 15년으로 감형되었고, 마침내 1950년 6월 28일 형 집행 정지로 석방되었다.

곧이어 그해 7월 10일, 국방부 특명 4호에 의해 육군소위로 복귀하였으며, 육군 특무대 문관 및 포병교육대 교관으로 근무했다. 그리고 1951년 2월 15일자로 육군고등군법회의 명령 제56호에 의해 형 면제조치를 받았다.

암살범 안두희는 1951년 12월 25일 소령 진급과 동시에 예편했다. 그 후 1956년까지 서울 명동에서 건설회사 부사장으로, 그 뒤는 강원도 양구에서 군납 공장을 차려 강원도에서 두 번째로 소득세를 많이 내는 부자가 되었다.

그런 중, 안두희는 가족들을 몰래 미국으로 보낸 다음, 1981년 자기도 이민 가기 위해 몰래 여권 발급을 받았다. 하지만 독립유공단체들이 이를 알고서 법무부와 미대사관에 항의하여 출국 금지 조치를 당했다고 한다.

덧붙이는 글 | * 백범 김구 선생 제56주기 추모식 * 
• 일시 : 2005. 6. 26(일). 10 : 00 
• 장소 : 효창원 백범 김구 선생 묘전(우천시 백범기념관 대회의실) 

- 6·25 한국전쟁 발발 55주년 기획전 <지울 수 없는 이미지> 
<오마이뉴스> 독자 등 네티즌의 성금으로 백범 암살 배후를 밝히고자 미국국립문서기록청(NARA)에 갔다가 입수하여 온 한국전쟁 관련 사진을 중심으로 한 현대사 사진전 
• 일시 : 2005. 6. 15 - 2005. 6. 30 
• 장소 : 강남 교보문고 문화이벤트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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