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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가을, 찾아주는 친척 하나 없이 서울의 한 시립양노원에서 외롭게 생을 마감한 김모 할머니의 과거를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그 분의 쓸쓸한 죽음 뒤에는 가슴 아픈 일제의 상흔이 남아 있었습니다. 할머니의 아픔은 해방 후 57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는데도 약해지거나 지워지지 않는 문신과도 같은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광복절을 맞아 2년 전 양로원에서 쓸쓸하게 생을 마감한 김 할머니가 새삼 생각납니다.

김 할머니는 처녀공출로 수탈되었던 정신대 문제와는 달리 가까운 가족에게조차도 주목은커녕 비난의 대상일 뿐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김 할머니는 마이니치 신문사의 직원이었던 가타오카라는 한 일본인의 조선인 아내였기 때문입니다.

일제강점기, 꽃다운 스무살 김 할머니는 공출을 면제해주는 대신 자신보다 열 살 많은 일본인과의 결혼을 제의받게 되었습니다. 할머니의 미모를 흠모했던 한 일본인이 사람을 넣어 부탁을 했기 때문이지요.

할머니는 공출이 무섭기도 하고, 궁핍한 시절 가족을 먹여살리려는 마음으로 결혼을 허락하였고, 얼마간은 혜택을 받고 살았다고 합니다.

할머니 덕분에 친정은 가난에 허덕이던 다른 조선 사람들 가정과는 달리 배급도 넉넉하게 받고, 일자리도 얻었다고 합니다. 당시 기득권층이었던 일본인들의 그늘에서 어렵지 않게 생활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김 할머니의 행복은 오래지 않아 끝나고 말았습니다. 결혼 3년만에 해방을 맞은 것입니다.

해방의 물결이 방방곡곡에 물결치던 그때 김 할머니는 남편이었던 가타오까의 짐을 꾸렸답니다.

이미 조선 땅에 있는 일본인들에게는 황급히 귀국하라는 령이 내린 상태였지만 할머니의 남편인 가타오카는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귀국하기 위해 처가에 허락을 얻으러 간 것이지요. 그러나 가타오카는 이전까지 형제처럼 지내던 처가 식구들에게 뭇매를 맞고 돌아갔습니다.

눈물로 남편을 떠나보내고 당시 스물 셋의 어린 새댁이었던 김 할머니는 그후 일본인에게 정절을 판 매국노, 환냥년이라는 손가락질과 돌팔매를 받아야 했습니다.

할머니는 차라리 그때 가족들이 나를 일본으로 가게 했더라면 이런 치욕의 세월을 보내지는 않았을 것 아니냐며 그때 자신을 붙잡아 놓았던 가족들을 원망했습니다.

1970년대 중반쯤 할머니는 우연히 알게 된 한 학생에게 일본인 남편의 소식을 부탁했습니다.

할머니가 남편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이름과 1940년부터 45년까지 경성지국에 근무했던 전직 마이니치신문사의 직원이라는 것 정도일 뿐이었습니다.

할머니는 언제부터 모아두었던 것인지 귀퉁이가 다 닳아 먼지가 날 것 같은 지폐를 노란고무줄에 꽁꽁 묶어 그 학생의 손에 쥐어주십니다.

"잘 부탁해. 그냥 알아만 봐줘. 보고 싶은 생각은 없어. 그냥 살았나 죽었나, 그것만이라도…."

한 달간 일본에 머물게 된 학생은 이런 저런 인맥을 통해 사람을 찾게 되었습니다. 당시 신분이 분명했던 그분의 소식을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는 이미 5년 전 병으로 세상을 뜨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분 역시 해방 후 5년 넘게 결혼을 하지 않고 있다가 이후 재혼해서 처와 자식을 두고 있다고 했습니다.

해방 후 하루도 잊어 본 적이 없다는 일본인 남편의 죽음을 알게 된 할머니는 한동안 멍하니 하늘만 바라보셨습니다. 이젠 눈물도 말라 흘리고 싶어도 나오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김 할머니는 여든의 나이로 쓸쓸히 시립양로원에서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녀는 숨을 거둘 때까지 당신 평생의 업인 '일본인을 사랑한 죄'를 씻으려 하루도 불경을 놓치 않으셨으며, 자신을 버린 가족을 끝내 찾지 않으셨습니다.

일제강점기 꽃다운 처녀로 일본인과 결혼했던 한 조선 여인은 이처럼 외롭게 오욕스런 당신의 생을 마감했습니다.

다만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당신의 조심스런 비밀을 알고 있는 몇몇 사람들의 먼 옛날 이야기만이 이 외로운 할머니의 죽음을 기억할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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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아줌마가 앞치마를 입고 주방에서 바라 본 '오늘의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요? 한 손엔 뒤집게를 한 손엔 마우스를. 도마위에 올려진 오늘의 '사는 이야기'를 아줌마 솜씨로 조리고 튀기고 볶아서 들려주는 아줌마 시민기자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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