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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길도 모른 채, 달랑 결혼 청첩장 한 장을 들고 멀리 순천까지 다녀왔습니다. 인천에서 순천까지, 생각만 해도 끔찍한 길이었습니다. 하지만 지난 날 나의 결혼식 때 베풀어 준 그 분들의 은덕에 비한다면 그곳까지의 길은 그리 힘든 길만은 아니었습니다.

결혼식장에 도착해 보니 예식은 방금 시작한 듯 했습니다. 아마도 고속도로 사정 때문에 다들 늦은 탓이었던지 꽤나 지체된 것 같았습니다. 뒤늦게 도착한 나는 뒷자리에 살며시 않으면서 그들 결혼하는 두 사람을 위해 축복을 해 주었습니다.

하루 저녁에 만리장성이라도 쌓을 수 있는
그런 건강한 남편 되게 하소서
양파 껍질처럼 벗겨도 또 벗길 게 남아 있는
그런 신비로운 아내 되게 하소서
만인을 위한 사랑을 베풀되
한 사람을 위해 애틋한 사랑을 남겨 두는
그런 현명한 남편 되게 하소서
만인을 위한 위로를 베풀되
한 사람을 위해 아낌없는 위로를 남겨두는
그런 현숙한 아내 되게 하소서
어지럽고 혼탁한 세상 속에서
정도를 걷는
그런 남편이게 하소서
힘들고 외길 가는 세상 속에서
바른 길 걷도록 지혜를 북돋아주는
그런 아내이게 하소서
그리하여
얇고 깨끗한 색종이를 접듯
신혼의 꿈을 예쁘게 접는 1년(紙婚)을 보내
무두질한 가죽으로 튼튼한 허리띠를 만들어 주는
3년(革婚)의 사랑을 이어
늘 푸른 나무처럼 성장하여
이 사회와 교회의 기둥이 될 수 있는 5년(木婚)을 보내게 하시고
10년(朱錫婚)을 살아가는 동안
불로 연단하여 불순물을 걸러낸 주석처럼 빛나는 훈장을 만들게 하시고
15년(水晶婚)을 서로가 거리낌 없이 살아
두 사람의 목에 맑고 빛나는 동메달을 걸게 하시고
30년(眞珠婚)을 아껴주는 동안
아픈 상처에서 생명을 빚어내듯 영롱한 진주를 빚어내게 하시고
40년을 살아도
루비(ruby, 紅玉婚)처럼 붉게 타는 열정으로 더욱 진한 사랑을 불태우게 하시고
50년을 살아도
오직 정금(金婚)같이 변함 없는 믿음으로 신뢰하게 하시고
60년이 다 되어
다이아몬드(金剛婚)처럼 백년해로를 멋지게 장식하는
두 사람의 귀한 결혼생활 이루게 하시옵소서.


결혼식이 끝나 맛깔스럽게 차린 순천 토속 음식들을 먹은 후, 뉘엿뉘엿 해가 기울어진 뒤에야 다시금 집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생각해 보니 결혼식 잠깐 동안을 빼놓고는 하루 종일을 운전대만 잡았던 것 같았습니다.

어찌나 피골이 상접했던지, 내 몰골을 본 아내는 딸아이와 함께 '수고했어요, 여보. 근데 딴 사람 같은데요' 하며 농담 섞인 위로를 건넸습니다. 감사하게도 딸아이의 초롱초롱한 눈망울을 본 후에야 나의 피로는 조금씩 풀리는 듯 했습니다.

가볍게 샤워를 끝내고 밥상머리에 앉아 감사 기도를 하는데, 문뜩 그런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우리 부부도 조금 지나면 무두질한 가죽으로 튼튼한 허리띠를 만들어 준다는 결혼 3년(革婚)째를 맞게 된다는 생각이었습니다.

그 생각을 하자니, 오늘 결혼식 때 축복해 주었던 두 사람을 위한 기도가 어느새 우리 부부에게로 되돌아오는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그래도 오늘의 주인공은 그들 두 사람이었으니, 그들 두 사람이 행복한 백년해로를 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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