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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장이나 연금같은 거 받을라고 헌 일이 아닌디 지금와서 서운할 게 뭐가 있겄어.”

▲ 문채호 옹(81)
ⓒ 정상필
지난 1990년 국가로부터 공훈을 인정받아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은 문채호(81)옹.

죽음을 무릅쓰고 일본군에서 탈출한 뒤 광복군에 입대해 중국 중경의 임시정부 경비를 맡았던 그의 이력에 비하면 독립유공자로 공인된 시점이 조금은 늦은 감이 있다.

전남 곡성군 죽곡면에서 태어난 문옹은 20살이던 1943년 10월 일제 징병 제1기로 일본군에 끌려갔다. 용산에서 출발해 만주를 지나 양자강까지 기차로 사흘을 이동해 도착한 곳이 남경. 거기서 배를 이용해 무창 항구로 이동해 낮에는 자고 밤에만 130리를 걸었다. 최종 목적지는 남방의 불인이라는 곳. 일제의 대륙 침략 전초기지였던 셈이다.

“이렇게 가다간 살아서 집에 돌아갈 확률이 100분의 1도 안 될 거란 생각이 들더랑께. 징병되기 1년전에 만주에서 일제의 노역을 헌 적이 있는디 그 때 만주에 광복군이 있다는 소리를 들었제.”

문옹은 야간행군을 지속하던 어느날 호남성 부근에서 한국인 2명과 탈출을 결심했다. 일본군 대열만 벗어나면 광복군을 찾을 수 있으리란 막연한 기대 때문이었다. 용케 탈출에 성공하긴 했지만 기대만큼 광복군이 가까운 곳에 있진 않았다.

문옹 일행은 탈출 후 중국군의 도움을 받아 광복군에 합류하기까지 한달이 넘는 기간동안 걸어야만 했다. 결국 그들이 도착한 곳은 당시 임시정부가 있던 사천성의 중경. 이때가 독립을 넉달 앞둔 1945년 4월이었다.

광복군은 일본군에서 탈출한 문옹 일행을 가족처럼 따뜻하게 맞아주었다. 성대한 환영식을 베풀고 정식으로 광복군에 입대해서 문옹이 맡은 임무는 광복군 총사령부 경위대의 특수임무였다. 임시정부의 경비를 맡거나 중국군에 차출돼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다.

▲ 문옹을 비롯한 광복회 회원들이 광복회 광주지부에서 지난 20일 회의를 하는 장면.
ⓒ 정상필
해방이 되고 임시정부 요인들은 45년 11월에 귀국했다. 문옹은 요인들의 가족들을 보호하느라 이듬해 6월에야 한국에 돌아올 수 있었다. 정부에서는 할 일이 있을지 모르니 기다릴 사람은 기다려 달라고 했다. 하지만 같이 근무했던 동료들의 대부분은 고향으로 돌아가고 문옹을 포함해 두세명만이 정부의 부름을 기다리다 그나마의 관심도 사라져 문옹은 고향으로 발길을 돌렸다.

정부의 부름이 전혀 없었던 건 아니었다. 당시 특수경찰대를 조직했던 조병옥 선생이 서울에 남아있던 광복군을 찾아와 같이 일할 것을 제안한 것이다. 하지만 방문차 특수경찰대를 찾았다가 실망만 하고 말았다.

“구국운동을 했던 사람으로서 경찰업무는 흥미가 없어서 거절허긴 했는디 사실은 일본 군복과 너무 똑같은 제복을 입고 있는 것을 보고 정나미가 뚝 떨어졌부렀제.”

그때 군이나 경찰에 남았더라면 지금 조금은 다른 모습으로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문옹은 특수경찰대를 찾았을 때 보았던 일본군복이 너무 싫어 광복군이고 뭐고 그냥 농사나 짓고 사는 게 나을 거라 생각했다고 했다.

집에 돌아와 있으면서도 사실은 약간의 미련을 가지고 있었다. 문옹은 어쩌면 다시 나라에서 불러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중경에서 모시던 김구 선생과 신익희 선생 같은 분이 돌아가시면서 그런 생각도 접었다고 말했다.

문옹은 6.25 전쟁 때 구례로 피난갔다 정착해 소작을 짓거나 노동을 하면서 근근하게 6남매를 키워냈다. 자식도 이미 다 키우고 난 후에야 나라로부터 인정을 받고 연금을 받았지만 나라를 원망하거나 섭섭해한 적은 없다고 했다. 광복군에서 활동한 것은 뭔가를 바라고 한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3.1절이나 8.15때면 행사장을 꾸준히 찾는다는 문옹의 깊게 패인 주름에서 요즘의 정치인들이 말하는 애국과는 다른 나라사랑이 느껴졌다. 4.15 총선이 다가와 가뜩이나 애국심 충만한 정치인들이 넘쳐나는 시기여서 더욱 문옹의 엷은 미소가 의미심장하게 다가왔다.

덧붙이는 글 | 호남매일에도 송고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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