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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영기 행촌학술문화진흥 이사장
ⓒ 박도
이영기 변호사는 전주지검장을 끝으로 공직에서 물러나 지금은 행촌학술문화원 이사장으로 일하신다. 그분은 자신의 역경을 피눈물 나는 노력으로 헤쳐 왔다.

아버지의 명에 따라 부산중학교 재학 중에 결혼한 후, 대학 진학을 단념한 채 고향 울산에서 중학교 교사가 되었다.

6·25 전쟁으로 군에 입대하고자 통역장교 시험에 응시하러 가는 길에 부산역에서 경찰에 붙들려 천만 뜻밖에도 경찰이 되었다. 순경 재직 중 경사 승진 시험에 수석 합격하고도 경찰국장이 구두시험에서 키도 작고 용모도 볼품이 없다고 탈락시켰다.

그러자 그 경찰국장을 혼내주기 위해 고등고시에 도전했다. 현직 순경으로 가족을 부양하면서 오직 책을 보고자 유치장 간수직을 자원했다.

와신상담의 세월을 보내다가 마침내 제8회 고등고시에 중졸(현 고졸) 학력으로 도전하여 법과대학 졸업생을 물리치고 수석 합격하였다.

1957년 1월 23일 그 날은 그 분에게 생애 최고의 날이었다. 중앙청 국무원 사무국 강당(지금의 경복궁 자리)에서 제8회 고등고시 합격자 130명을 대표하여 고등고시 합격 증서를 받았고 합격자를 대표해서 답사를 하였던 감격스러운 날이었다.

그 날 합격증서 수여식이 끝나자 고시동지회에서 합격자 환영회를 열어주었다. 환영회를 끝내고 숙소(재동 고종 댁)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눈까지 부슬부슬 내리는 어둑한 밤길에 손에는 고등고시 합격증을 쥐고 기분 좋게 걸어가고 있는데 누군가 불렀다.

안국동 파출소 정문에서 보초 근무 중이던 순경이었다. 순경은 다짜고짜로 파출소 안으로 들어가자고 했다. 무슨 영문인지도 모른 채 순순히 파출소 안으로 따라 들어갔다. 그 순경은 몰골을 훑으면서 퉁명스럽게 물었다.

“당신 지금 입고 있는 그 양복이 당신 거요?”
“왜 그러시오. 내 옷이 아닙니다만.”

그 분은 다소 언짢았지만 곧이곧대로 대답했다. 그러자 순경은 더욱 의심하듯 다그쳤다.

“그럼, 누구 옷이오?”

순경은 다소 목소리를 높였다.

“빌려 입은 옷이오.”
“뭐, 빌려 입었다고…… 이 양반이 누굴 놀리나?”

그 순경은 자기의 검문이 적확했다는 회심의 미소와 함께 직업적인 눈초리로 그 분을 쏘아보았다.

“정말로 빌려 입었어요.”

순경은 그분의 말을 사실대로 믿어 주지 않는 눈치였다. 하지만 그분은 그때 경찰관 신분이었을 뿐 아니라 손에는 고시 합격증까지 갖고 있었으니 조금도 두려울 것이 없었다.

“당신, 신분증 좀 봅시다.”

주머니에 있는 신분증을 꺼내 보이면서 말했다.

“나도 경찰이오.”
“뭐요? 경찰이라고….”

순경은 깜짝 놀란 눈빛으로 신분증을 확인하고는 다소 겸연쩍은 표정 반, 믿어지지 않는 표정 반이었다. 그때 파출소 내에 있는 네댓 명의 경찰관 시선이 모두 그 분에게로 쏠렸다.

“그런데, 경남 양산 경찰서에 있는 분이 서울에는 왜 오셨으며 지금 어디로 가는 길입니까?”

순경의 말씨가 조금 전보다 훨씬 부드러워졌다. 하지만 경계의 빛은 완전히 가셔진 것 같지는 않았다. 그 분은 사실대로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실은 오늘 오후에 중앙청 강당에서 고등고시 합격증을 받고 환영회를 마친 후 재동에 있는 고종형 댁에 가는 길이요.”

울산 촌놈이라 시간도 돈도 없어서 고종형의 양복을 빌려 입었기에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자초지종을 말하고 손에 쥐고 있던 고시 합격증을 펴 보였다.

그러자 그동안 행동거지를 재미있게 바라보던 파출소 안에 경찰관들이 모두 놀란 표정으로 일어서서 일동 거수경례를 올렸다.

“같은 경찰로서 고등고시에 수석 합격한 것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그들은 경례를 끝내고는 박수까지 쳤다. 파출소 소장이 심문하던 순경이 무례했던 점을 용서하여 달라고 예의를 갖춰서 사과하고는 거듭 축하의 인사를 건넸다.

그들로부터 받은 축하 인사가 고등고시 합격증을 받은 후 동료 경찰로부터 받은 첫 번째 축하 인사인지라 이영기 변호사는 지금도 잊을 수 없는 추억거리로 간직하고 있다.

고시 합격증을 받고 양산경찰서로 돌아가자 자신을 경사 승진 시험에서 떨어뜨린 경찰국장에게서 가장 먼저 고시 합격 축하 전보가 왔다. 그 분은 경찰국장에게 오히려 은인으로 여긴다는 답을 보냈다.

그 분은 이처럼 인생 역전 드라마를 펼친 분이었다. 검찰에서 물러난 뒤 변호사 생활을 할 때는 사회봉사활동에도 적극 참여했다. 특히 사할린 동포 법률구조 활동에 적극 참여하여 현재 안산시 고잔동에 사할린 동포들이 영주 귀국하여 아담한 고향아파트에 입주하는 데 한 몫을 담당하기도 했다.

▲ "성실보다 더 큰 재산은 없다"고 하시는 이영기 변호사
ⓒ 박도
나는 그 분을 20여 년 전에는 담임교사와 학부모로, 7년 전에는 작가와 독자로 다시 만났다. 이 변호사는 올해 75세로 여태 책을 무척 좋아하신다. 어쭙잖은 내 책이 나오면 알뜰히 읽어주신다. 대충 읽는 게 아니라 오자와 탈자, 구두점까지 일일이 지적해 주신다.

어느 하루 만나기를 청하기에 찾아뵙자 “작가는 견문을 넓혀야 하고 민족혼이 있어야 한다”라고 하시면서 중국대륙 항일유적지 답사를 권했다. 나의 항일유적답사기 <민족 반역이 죄가 되지 않는 나라>는 이 변호사 덕분으로 세상에 빛을 보았다.

이 변호사는 언제나 마치 돌아가신 할아버지나 아버지처럼 나를 사랑해 주신다. 나는 또 한 분에게 큰 빚을 지고 살아가고 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2004년 2월호 농협 발간 <전원생활>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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