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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신문배달은 대부분 오토바이나 자전거를 타고 다니면서 하지만 1960년대 그 무렵에는 언감생심이었다. 배달원들은 2~3백부의 신문을 옆구리에 잔뜩 끼고 다니면서 돌렸다.

그래서 옷도 겨드랑이 부분이 가장 먼저 해졌고, 아침저녁 하도 많이 뛰고 걸어서 신발도 금세 닳았다. 배달원에게 가장 인기 있는 신발이 목을 자른 군화였다.

신문배달원은 신문을 자기 몸보다 더 아꼈다. 비가 오는 날은 신문이 젖을세라 비닐로 싸서 품안에 넣었다. 웬만한 비는 그대로 맞으면서 신문만은 감싸고 감쌌다.

서울 장안에 웬 개들은 그렇게도 많은지? 대문 안으로 신문을 넣고 돌아서면 개가 뛰어나와 바짓가랑이를 물고늘어졌다. 개는 사람을 차별했다. 개 눈에는 신문배달원이 하찮은 사람으로 비쳤나 보다. 정말 개새끼였다.

내 전임자가 동아일보 누하동 지역을 물려주면서 오거리 한약국 할머니는 신문 값을 가장 잘 주는 집으로 한번도 헛걸음치게 하는 일이 없었다고 했다.

나도 매달 수금이 시작되면 그 집을 첫 집으로 삼았는데(첫 집부터 딱지 맞으면 그 달 수금에 재수없다는 징크스 때문에), 할머니는 그때마다 약제함에 이미 신문 값을 넣어두고 기다렸다.

한 번도 두 번 걸음시키지 않았다. 신문배달원으로서 가장 고마운 독자였다.

1월 1일 새벽은 신문 배달원에게는 가장 힘들었다. 신문 분량이 평소 서너 곱이었다. 그때는 옆구리에는 도저히 낄 수 없어서 구역 들머리까지는 새끼로 묶어 등에 지고 갔다.

1961년 그 해 그믐날 밤에 눈까지 흠뻑 쏟아져 새벽 배달 길에는 하는 수 없이 신발에다 새끼줄을 칭칭 감았다. 조심조심 걷다가 누하동 고갯길에서 넘어졌다. 신문이 쏟아져 눈바람에 흩날렸다.

다행히 지나가는 사람의 도움으로 거리에 흩어진 신문을 간신히 주워 배달을 하는데 갑자기 배가 송곳에 찔린 듯이 아팠다. 통증을 꾹꾹 참아가며 200여 부를 간신히 다 돌렸을 무렵에는 도저히 더 이상 걸을 수가 없었다.

빙판 길에 그대로 드러눕고 싶었지만 쓰러진다면 얼어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엉금엉금 기다시피 오거리 한약국까지 가서 문을 두드렸다.

할머니는 내 몰골을 훑어보고선 얼른 안방 따끈따끈한 아랫목에 눕혔다. 내 신음을 듣고서 할머니는 뜨거운 물로 환약 여러 알을 먹여 주셨다. 그리고는 내 바지 혁대를 풀고는 아랫배를 주물렀다.

곧 통증은 씻은 듯이 가셨다. 좀더 누웠다가 가라는 할머니의 간곡한 만류도 뿌리치고 얼른 일어나 약국 문을 나섰다.

많은 세월이 지난 어느 날, 그 할머니의 온정이 새록새록 돋아나서 누하동 오거리 한약국을 찾았다. 분명 지난날 한약국 자리였는데 약국 간판을 보이지 않고 대신 미용실로 꾸며져 있었다.

문을 두드려 할머니를 찾았다. 낯선 미용사는 여러 해 전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할머니는 약국을 운영할 수 없어서 문을 닫았다고 했다. 할머니는 그곳을 떠나 당신 자녀들 곁으로 가서 지내다가 몇 해 전에 돌아가셨다고 전했다.

일찍이 공자가 "아침에 도를 들어 깨닫게 된다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朝聞道 夕死可矣)"고 했다. 내가 어찌 그 높은 도를 깨칠 수 있겠는가. 하지만 그리운 그 사람을 만날 수만 있다면, 나는 죽음도 기꺼이 맞으련다.

덧붙이는 글 | 박도 기자는 현재 고등학교 교사이며, 민족문학작가회 회원이다. 
작품집에는 장편 소설《사람은 누군가를 그리며 산다》와 산문집《민족 반역이 죄가 되지 않는 나라》《샘물 같은 사람》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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