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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밀양에 있는 친일파 박춘금의 무덤. ⓒ 오마이뉴스 윤성효
나라 잃은 시대에 '일본인보다 더하다'는 소리를 들었던 박춘금(1891~1973). 그는 일제시대 한국인으로는 최초로 일본 국회의원을 지낸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노동상애회' '대의당' 등을 조직해 노동운동과 독립운동을 탄압하고 일제의 침략전쟁에 적극 협력한 대표적 친일파 중 하나다.

그런 박춘금의 무덤이 경남 밀양에 있고, 1992년 일본인들이 그의 무덤 앞에 송덕비까지 세웠다. 이런 사실이 알려지면서 철거 주장이 제기되었다. 송덕비 철거를 주장하는 사람들과 함께, 박춘금의 묘소와 송덕비 관리인으로 있는 사람을 만나 보았다.

"박춘금은 깡패 출신 극렬 친일파"

박춘금은 어떤 사람인가. 그는 1891년 4월 17일, 밀양시 삼문동에서 태어났다. 그의 비석에는 서당에서 수학했다고 적혀 있다. 일본인 술집에서 심부름꾼으로 있으면서 일본말을 배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일본말을 밑천으로, 일본으로 건너가 1920년 도쿄에서 조선인 노동자 모임인 '상구회'를 만든다. 이 단체를 이듬해 사회사업단체인 '상애회(相愛會)'로 개편하고, 나고야 등에 지부를 둔다.

'상애회'는 박춘금이 만든 '친일적 폭력노동단체'라 할 수 있다. 1923년 관동대지진 때 300여 명으로 '노동봉사대'를 조직해 시체처리와 복구작업에 나선다. 간도 대지진을 계기로 지방본부가 비약적으로 만들어지면서 회원수만해도 2만 명을 헤아렸다. '상애회'를 1928년 재단법으로 개편하면서, 그는 부회장을 맡았지만 실권을 쥐게 되었다.

▲ 친일파 박춘금
'상애회'로 일제에 신임을 받은 박춘금은 조선에 와서까지 폭력을 휘두르고 공갈을 일삼는다. 1924년 4월 2일 밤 <동아일보> 사장 송진우와 사주 김성수에게 가한 폭력사건이 대표적이다. 이외에도 그가 가담한 폭력사건은 많다.

폭력배 박춘금이 일본 국회의원에 당선된 때는 1932년이었다. 1936년에는 낙선했다가 1940년 4월 총선에서 다시 당선된다. 박춘금은 일본 중의원에서 "조선인에게 참정권을 줄 의사가 없느냐", "조선에 일본군 사단을 증설할 의사가 없는가" 등을 질문하는 등 주목을 받았다.

박춘금은 철저한 '일제의 충견'이었다. 1944년 1월 17일 매일신보사 주최로 부민관(현 서울시의회 건물)에서 열린 "학병 격려 대연설회"에서 한 연설 "조선에 고한다"는 그가 얼마나 일제히 길들여져 있는가를 짐작하고도 남는다. "내선일체를 위해서는 반도인에 대한 병역의무가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학도병 4천이나 5천이 죽어 2500만 민중이 잘 된다면 이 보다 더 좋은 일이 어디 또 있겠는가. 이제야말로 1억 국민이 마음과 마음을 합하여 내지나 반도를 구분할 것 없이 이 성전을 완수해야 할 것이다. 이번 특별지원병도 이 정신을 이해하고 5천만 인이 합심하여 하나 빠지지 않고 나가야 한다."

1945년 태평양전쟁에서 일본의 패전이 가까워 올 무렵, '총군애국의 대의를 다한다'는 기치를 내건 '대의당'이 되자 박춘금은 당수가 되었다. 이광수 김동환 이재갑 주요한 조병삼 등이 참여했다. 일본 군경의 사주 아래 '조선인 사상범'들을 비롯한 반전 인사들을 박멸하기 위해 살인적 테러집단을 만든 것이다.

1945년 7월 24일 '대의당'이 부민관에서 "아시아 민족 분격대회"를 열었는데, 이때 민족문제연구소 조문기 이사장과 그의 동지들이 이곳에 폭탄을 투척해 항일의거의 마지막 장을 빛나게 하기도 했다.

재일교포 사회에서도 거의 묻혀 지내다시피 한 박춘금은 1973년 3월 31일 일본에서 죽는다. 게이오대학 병원에서 숨을 거두었다. 일부에서는 이를 두고 죽어서도 고국보다 일본을 택했고, 죽어서도 고국으로 올 수가 없었던 탓이라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고국에 묻혀 있다. 경남 밀양시 교동 900번지 천주교밀양성당 아래 산 중턱에 묘소가 있다 92년에는 송덕비까지 세워진 것이다.

92년 무덤 옆에 '일한문화협회'에서 송덕비 세워

친일파 박춘금의 무덤이 그의 고향 밀양에 있다는 사실이 널리 알려진 것은 최근이다. 그가 죽은 뒤 그의 아버지 묘소 바로 밑에 무덤을 만들어 묻었다. 하지만 일반인들 사이에는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그 묘소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알려진 때는 최근이다. 직접적인 계기가 된 것은 1992년 송덕비가 세워지면서 부터라 할 수 있다.

10여 년전 묘소를 새롭게 단장하고, 송덕비를 세운 것이다. 한문으로 쓴 '박춘금 선생 송덕비'에 밝혀 놓은 주요 내용을 보자.

"1891년 4월 17일 태어나 밀양 '상한서당'에서 수학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삼중 상애회'를 설립해 부회장을 맡았다. 1920년대 말 '상애회 이사장, 1932년, 1937년 동경 서구에 출마해 당선하고 중의원 참의를 지냈다. 그리고 1957년 재단법인 '일한문화협회' 상임고문을 지냈다."

비문은 재단법인 '일한문화협회' 회장이며 문학박사인 일본인 무라오 지로(村尾次郞)라는 사람이 쓴 것으로 되어 있다.

박춘금의 무덤 관리인 장아무개(52. 밀양 교동) 씨는 자신이 박춘금의 무덤을 관리하게 된 연유에 대해 "할아버지 때부터 두 집안이 가깝게 지낸 것으로 안다. 특별히 관리한다기 보다 성묘나 하는 정도"라고 말했다.

"친일 행적이 있다는 사실을 아느냐"는 질문에 대해 장 씨는 "취재하러 온다기에 그것 때문에 오는 줄 알았다"면서, "그렇게 나쁜 사람은 아닌 것으로 안다. 밀양의 상징인 영남루에 사자상을 기증하는 등 지역을 위해 좋은 일도 많이 한 것으로 안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송덕비는 92년 묘소를 새로 단장하고 나서 세운 것이다. 일본 사람들이 세웠지만, 그의 친딸이 우리나라에 살고 있어 한 해 한 번씩은 다녀 가기도 한다. 매년 4월이나 5월에 오는데 올해는 아직 다녀가지 않았다"라고 말했다.

박춘금은 세 번 결혼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두 번은 일본인, 한 번은 한국인과 결혼을 했다. 그의 후손 가운데는 유일하게 딸이 서울 강남구 신사동에 살고 있다. 박아무개(77) 씨로, 밀양 교동에 있는 박춘금과 그의 아버지의 묘소 소유자로 되어 있다.

▲송덕비의 앞면(왼쪽)과 뒷면. 뒷면에 '일한문화협회'라고 송덕비를 세운 단체명이 새겨져 있다. ⓒ 오마이뉴스 윤성효

박춘금 송덕비 철거 주장 제기돼

한편 밀양지역 시민.문화단체 관계자들은 친일부역자 박춘금의 송덕비를 반드시 철거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밀양고 역사교사인 최필숙 교사가 이 운동의 선두에 서 있다. 최교사는 밀양여고 재직 당시인 2000년 교지 <난초>에 박춘금의 친일행적에 대한 글을 싣기도 했다.

밀양문화원 손정태 이사는 "송덕비를 철거해야 하는데 사유지에다가 사유물이기 때문에 어떻게 할지 막막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철거하는데 동의하는 모양인데, 어떤 식으로 할지 논의를 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밀양시청 관계자는 "조만간 그 곳에 도시계획상 도로가 나기로 예정돼 있어 무덤을 옮겨야 하기 때문에 송덕비 철거문제도 자연적으로 해결될 것"이라고 말했다.

최필숙 교사는 "밀양지역의 한 청년단체에서 얼마전 논의를 하기도 했다. 단체로 가서 박살내버리자는 이야기까지 나왔다. 하지만 절차를 밟아서 정식으로 해야 하고, 송덕비를 세운 사람들 손에 의해 철거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쪽으로 의견을 모았다"라고 말했다.

하성원 씨를 비롯한 민족문제연구소 부산지역 회원들은 송덕비 철거 문제를 논의하고 있다. 이들은 최근인 4월 13일 현장을 답사하기도 했다.

민족문제연구소 방학진 사무국장은 "우선적으로 묘소와 관련이 있는 사람들을 찾아 입장을 전달한 뒤 철거하도록 할 것이다. 밀양지역 시민단체와 함께 구체적인 방안을 세워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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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부산경남 취재를 맡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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