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중서부의 도시 코벤트리를 찾아서

나치 독일의 코벤트리 성당 폭격과 알몸으로 말을 탄 고다이바 백작부인

등록 2024.05.09 09:46수정 2024.05.09 13:20
0
원고료로 응원
코벤트리 성당

코벤트리는 영국 중서부 지방에 있는 도시로 인구는 2021년 기준 34만5천여 명이며 영국에서 13번째로 큰 도시다.

나는 영국 유학시절인 지난 1991년 영국 친구와 처음으로 코벤트리를 방문한 적이 있다. 그 후로도 나는 자주 이곳을 방문한다. 코벤트리는 영국 중부지방 레스터셔에 있는 우리 집에서 약 53km 떨어져 있고 차로는 1시간 정도 걸린다.

코벤트리에 가면 내가 꼭 들리는 곳이 두 곳이 있다. 한 곳은 코벤트리 성당이고 또 한곳은 성당 건너편에 있는 박물관이다. 나는 이곳을 지난 7일 아내와 함께 다시 방문했다.

코벤트리 성당은 14세기인 1500년대에 고딕양식으로 세워진 중세 건물이었다. 그런데 2차대전 초기인 지난 1940년 11월 14일 저녁 7시, 나치 독일의 폭격기는 이 도시를 집중 포격한다. 폭격은 다음날인 15일 새벽 6시까지 무려 11시간 동안 계속 이어졌고 유럽전역에서 독일 전폭기 약 500대가 동원되어 500톤 이상의 폭탄을 집중적으로 쏟아 부었다. 그 결과 코벤트리 도시의 약 절반의 건물이 파손되었다.
 
a

왼쭉은 폭격으로 파괴된 구성당, 오른쪽은 신성당. 두 성당 사이에 서있는 필자 ⓒ 김성수

  
폭격이 일어나는 동안 꼭 필요인력을 제외한 주민들 다수는 지하벙커에 피난해 있었기에 사망자수는 554명 부상자는 천여 명을 웃도는 정도에 그쳤다. 하지만 11시간 동안이나 이어진 폭격으로 인해 11월 중순의 쌀쌀한 늦가을 날씨에도 불구하고 코벤트리 도시는 폭격이 끝난 11월 15일 새벽6시로 부터 7시간이 흐른 오후 1시까지도 도시 전체가 기온이 후덥지근 했다. 반면 하늘은 잿더미로 변한 파괴된 건물에서 날리는 흙먼지로 대낮에도 한 밤중처럼 컴컴하고 어두웠다.

그리고 이 무차별 폭격으로 인해 14세기부터 600년 이상 건재하던 코벤트리 성당이 폭탄을 맞아 파괴되었다. 2차 대전 중 영국에서 성당이 나치 독일군의 폭격을 맞아 파괴된 곳은 코벤트리가 유일했다. 히틀러는 이런 코벤트리 폭격 작전명을 '월광곡(문라이트 소나타)'으로 명명했다.

1932년 코벤트리에서 태어난 나의 한 영국 지인은 1940년 당시 폭격이 일어났을 때 8살이었다. 그는 당시 자신의 집이 폭격으로 사라졌고 동네에서 함께 놀던 친구들과 가까운 이웃들도 목숨을 잃었다고 술회했다. 그는 지금도 당시의 지독한 화약 냄새와 열기 그리고 참혹한 장면을 생생히 기억한다고 했다.


전쟁이 끝나고 지난 1954년 대학 졸업 후 런던 부근에 정착한 그는 코벤트리 폭격으로 70년이 흐른 지금까지 아직 한 번도 고향인 코벤트리를 방문한 적이 없다. 내가 그에게 "그래도 어린시절 놀던 고향이 그립지 않으세요?" 라고 물었다. 그는 "고향에 대한 아름다운 추억보다도 어린 시절 받은 트라우마(정신적인 상처)가 지금까지도 너무나 강렬하게 남아서 방문할 마음이 전혀 없다"며 담담하게 말했다.

전쟁의 상처는 정말 평생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나치 독일의 폭격으로 파괴된 곳은 물론 중세에 세워진 코벤트리 성당만이 아니었다. 16세기 또는 그 이전에 세워진 거의 모든 건물이 폭격으로 하루아침에 잿더미로 변했다.

폭격 다음날 폭격 현장을 방문한 조지 6세왕은 폐허만 남은 코벤트리 성당 앞에서 눈물을 훔쳤고 처칠 수상은 이를 악물었다.

천장이 무너지고 거의 사라진 코벤트리 성당 앞에 폭격 다음 날 모인 시민들은 폐허가 된 중세 성당을 허물지 않고 그대로 두며 과거를 잊지 말자고 다짐했다. 하지만 독일인에 대한 복수대신 전쟁이 끝나면 용서와 평화 그리고 화해의 상징으로 언젠가는 이 폐허가 된 성당 옆에 새로운 성당을 짓자고 결의했다.

그리고 2차대전이 끝나고 17년 후인 지난 1962년, 마침내 코벤트리 시민들은 폐허가 된 중세 성당 바로 옆에 전 국민모금 운동을 통해 '현대식'으로 새로운 성당을 더 아름답고 더욱 우아하게 지었다.

그래서 코벤트리에는 지금 천장과 일부 벽이 무너진 중세 성당과 '현대식' 성당이 나란히 함께 서있다. 마치 과거와 현재, 역사와 현실이 함께 한 공간에서 공존하는 것처럼.

알몸으로 말을  고다이바 백작부인
 
a

코벤트리 박물관에 있는 고다이바 부인 그림 ⓒ 김성수

  
코벤트리 성당에서 나오면 바로 앞에 박물관이 있다. 이 박물관에 들어가면 많은 전시실이 있는데 한 전시실의 이름은 "고다이바 부인 전시실(Lady Godiva Gallery)"이다. 그리고 그 전시실에 고다비아 백작 부인이 알몸으로 말을 타고 있는 그림, 조각, 동영상, 포스터 등이 있다. 이 귀족 부인은 무슨 사연으로 알몸으로 말을 타고 있는 것일까?

고다이바 백작 부인은 1066년에서 1086년에 코벤트리에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녀는 백작 부인으로 생존시 남편과 함께 코벤트리의 많은 교회, 수도원, 농민들에게 큰 도움을 주었다.

오늘날 고다이바 부인은 남편인 레오프릭 백작이 코벤트리 농민들에게 부과하는 세금을 인상하려는 계획에 반대해 알몸으로 말을 타고 코벤트리 도시를 활보한 것으로 기억되고 있다.

그 사연은 이렇다. 평소 고다이바 백작 부인은 사회복지가 전무하던 시절 코벤트리의 가난한 농민들에게 연민의 정이 많았다. 그런 농민들을 상대로 백작인 남편이 세금을 인상하려고 하였다. 남녀가 불평등하던 시절 그녀는 남편에게 제발 불쌍한 농민들에게 부과하는 세금을 인상하지 말아달라고 간절하게 요청했다. 그럴 때 마다 남편은 그녀의 간청을 단호히 거절했다. 아내의 끈질긴 간청에 실증이 난 남편은 그녀에게 "당신이 알몸으로 말을 타고 대낮에 코벤트리 시내를 활보하면 내가 세금을 올리지 않겠소"라고 천명한다.

그는 17살의 수줍은 아내가 감히 알몸으로 말을 타고 시내를 활보하지는 못할 것이라고 당연히 생각했다. 하지만 이런 백작의 판단은 오판이었다. 고다이바는 남편의 예상을 깨고 다음날 알몸으로 말을 타고 코벤트리 거리를 활보한다. 이런 고다이바의 용감한 행동에 감명을 받은 코벤트리 농민들은 모두 창문을 닫고 커튼을 치며 그녀의 알몸을 보지 않았다. 하지만 역사에는 언제나 한 사람이 문제다. 재단사였던 톰은 몰래 커튼을 열고 말을 타고 시내를 활보하던 그녀의 알몸을 훔쳐보다 눈이 멀었다고 한다. 그때부터 영어단어에 '관음증 환자(peeping-Tom)'라는 신조어가 생겼다고 한다.

하지만 역사가들은 고다이바 백작 부인이 실제로는 알몸이 아니라 하얀색의 비단속옷 차림에 말을 타고 거리를 활보 했을 것이라 추정한다. 그래도 당시에 귀족부인이 화려한 옷이나 장신구 없이 그저 하얀 속옷으로 말을 타고 거리를 활보하는 것 자체도 큰 충격적인 일이었을 것이라고 평가한다.

하여간 이일을 계기로 백작은 가난한 농민들을 위해 자신의 부끄러움을 무릅쓴 아내 고다이바의 용감한 행위에 감동받아 세금 인상 계획을 취소한다. 그리고 두 부부는 그 후 부터 코벤트리 지역의 성당, 수도원, 가난한 농민들에게 많은 도움을 줬다고 한다.

코벤트리 성당 광장에는 지금도 알몸으로 말을 타고 있는 고다이바 조각상이 있다. 코벤트리는 지금도 이렇게 과거와 현재, 그리고 역사와 현실이 함께 한 공간에서 공존하고 있다.
#영국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오마이뉴스>영국통신원, <반헌법열전 편찬위원회> 조사위원, [폭력의 역사], [김성수의 영국 이야기], [조작된 간첩들], [함석헌평전], [함석헌: 자유만큼 사랑한 평화] 저자. 퀘이커교도. <씨알의 소리> 편집위원. 한국투명성기구 사무총장, 진실화해위원회, 대통령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투명사회협약실천협의회.

AD

AD

AD

인기기사

  1. 1 종영 '수사반장 1958'... 청년층이 호평한 이유
  2. 2 '동원된' 아이들 데리고 5.18기념식 참가... 인솔 교사의 분노
  3. 3 '초보 노인'이 실버아파트에서 경험한 신세계
  4. 4 "개발도상국 대통령 기념사인가"... 윤 대통령 5·18기념사, 쏟아지는 혹평
  5. 5 "4월부터 압록강을 타고 흐르는 것... 장관이에요"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