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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이 아닌 걸 혁명이라고 우기니

[안 뻔(Fun)한 티켓북] 찻잔 속 폭풍으로 끝난 뮤지컬 <로빈훗>

15.06.05 18:11최종업데이트15.11.24 1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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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텍스트(Text)에는 맥락(Context)이 있습니다. 문화 콘텐츠도 마찬가지입니다. 100% 정치적인 예술이 존재할 수 없듯이, 100% 순수한 예술도 없습니다. 문화 공연을 때로는 인문학적으로, 때로는 사회과학적으로 읽어봅니다. 마음에 안 들면 신랄하게 태클도 걸어보고, 재미있으면 '우쭈쭈' 칭찬도 합니다. 공연을 정치·사회적으로 해석하려는 시도가 항상 성공하지는 않을 겁니다. 시도가 비록 재미(Fun)는 없더라도, 최소한 '뻔'한 리뷰는 쓰지 않으려 합니다. [편집자말]

뮤지컬 <로빈훗>의 성남아트센터 공연 홍보 포스터. 서울 공연에 비해 다소 수정이 있었지만, 여전히 한계를 보여준 작품이었다. ⓒ 엠뮤지컬아트


뮤지컬 <로빈훗>이 지난 5월 25일, 성남 공연을 마지막으로 국내 초연을 마무리했다. 하지만 우리가 기대한 '영웅' 로빈 훗은 없었다.

<로빈훗>의 흥행은 예견된 것처럼 보였다. 이미 여러 차례 다양한 문화 콘텐츠로 변주된 원작이 아닌가. 전 세계적 명성의 의적 캐릭터를 바탕에 깔고, 여기에 화려한 캐스팅과 선 굵은 메시지, 남성적이고 힘 있는 넘버까지 어우러졌다. 각 요소별로 보면 '수작'이라 칭해도 아깝지 않을 작품이었다.

그러나 뚜껑을 열기 전부터 기대를 한껏 모았던 이번 <로빈훗>의 결과물은, (흥행과는 별개로) 당초 예상보다 신통치 않았다. 홍보물 표절 논란으로 홍역을 한바탕 치르더니, 인물에게 감정 이입하기 힘들다는 지적이 일각에서 나왔다.

서울 공연(1월 23일~3월 29일) 때 문제가 제기됐던 부분을 적극적으로 수용해서, 성남 공연 때는 몇몇 인물의 캐릭터 묘사를 바꾸고 대사도 변경했다. 극 중 '잔가지'의 오류는 보다 매끄럽게 수정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뿌리'의 잘못은 끝끝내 고치지 못했다.

(본래 'Robin Hood'의 바른 표기는 '로빈 후드'이다. 여기서는 뮤지컬과 뮤지컬 속 주인공을 지칭하는 데 <로빈훗>과 '로빈 훗'을, 원작이나 영화를 일컬을 때는 <로빈 후드>라고 표기한다.)

"숲에서 시작된 혁명"이라더니... 이것은 혁명이 아니다

뮤지컬 <로빈훗>의 마지막 장면. 그 남자가 꿈꿨던 '혁명'은 실은 혁명이 아니었다. ⓒ 엠뮤지컬아트


뮤지컬 <로빈훗>은 "우리의 혁명은 숲에서 시작된다"라는 문구로 스스로의 이야기를 정의한다. 뮤지컬 <로빈훗>의 주인공은 원작의 유쾌하고 재기발랄한 로빈 후드가 아니다. <로빈훗>의 '로빈 록슬리'는, 녹색 옷을 입고 성직자와 귀족을 조롱하면서도 리처드에게 충성을 맹세했던 원작의 로빈 후드와 다른 성격의 소유자다. 오히려 리들리 스콧 감독의 영화 <로빈 후드>에서 러셀 크로우가 연기했던 '로빈 롱스트라이드'에 더 가까운 캐릭터다.

십자군 전쟁의 와중에, 리처드 왕은 음모로 인해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는다. 권력 암투에 희생된 고결한 기사 로빈 록슬리는, 가족과 연인을 모두 잃은 채 몰락하여 감옥에 갇힌다. 그는 간신히 탈출해 셔우드 숲으로 몸을 숨긴다. 그리고 셔우드 숲에서 왕의 폭정을 견디지 못해 몰려든 이들을 만난다. <로빈훗>의 홍보에 따르면, 여기가 바로 '혁명'이 시작되는 지점이다.

그러나 뮤지컬 <로빈훗>에서 전개되는 일련의 서사는 '정권 탈환을 위한 쿠데타'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다. 그저 민중이 무기를 든다고 혁명이 아니다. 굶주림에 지친 피지배계층이 지배계층을 향해 저항을 시작한다고, 그 자체로 혁명이 성립하지는 않는다. 비합리적이고 폭압적인 '구조'에 대한 문제의식이 전제되어 있어야 한다. 그 구조를 대체하는 이념·사상이 없으면, 백성의 무장봉기는 '민란'의 선에 머무른다. <로빈훗>의 로빈 록슬리와 <로빈 후드>의 로빈 롱스트라이드의 결정적 차이도 여기에 있다.

프랑스 혁명이 '혁명'인 이유는, 바스티유 감독을 습격하고 베르사유 궁전을 점령했기 때문이 아니다. '자유, 평등, 박애'로 대표되는 혁명 사상을 뿌리며, 왕정을 폐지하고 민주공화정을 건설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영국의 명예혁명이 '무혈혁명'임에도(비록 잉글랜드에 국한된 얘기지만) 혁명으로 인정받는 이유는, 권리장전을 통해 의회 민주주의를 확립시키는 데 기여했기 때문이다.

<로빈훗> 속 등장인물들에게는 이 구조적·제도적 고민이 결여되어 있다. 그저 새 왕이 나쁜 것이다. 세금을 많이 거두는 그의 폭정이 잘못된 것이다. 심지어 그는 왕위 계승을 위한 '적자'도 아니라 이전 왕의 동생이다. 그러니 본래 왕위를 이어야 할 적통 '필립' 왕세자에게 응당 왕위가 돌아가야 한다. 셔우드 숲에 숨었던 이들은 왕세자에게 왕위를 돌려주기 위해 목숨을 바쳐 싸운다.

그렇다면 필립이 대변하는 이상이, 그의 대척점에 있는 존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일까? 사리사욕을 위해 권력을 탐하는 존에 비해, 필립은 보다 백성을 위하는 따스함을 보여 준다. 그러나 '민본정치'는 혁명적 사상이 아니다. 전근대 사회에서도 민본사상은 존재했으면, 본래 성군이 배우고 따라야 할 '왕도'이다. 왕도에서 벗어난 역군을 몰아내고, 정당한 왕위 계승자가 백성을 자애롭게 대하는 정치는 가장 이상적인 '왕권국가'의 모습일 뿐이다.

이렇게 <로빈훗>의 주인공들은 혁명을 이끌고 동참하는 투사가 아니라, 영국 왕실의 충실한 '신민'이 된다.

"폭풍이 다가온다"던 그들... 찻잔 속 폭풍에 그친 이유

또 하나, 셔우드 숲으로 백성이 내몰린 이유가 온전히 왕위 찬탈을 꿈꾸는 존 왕에게 있다는 것도 납득하기 어렵다. 존 왕이 과도한 세금으로 백성을 핍박했다는 얘기인데, 이는 역사적 맥락과도 잘 맞지 않을뿐더러 논리적으로도 쉬이 납득되지 않는다.

리처드의 뒤를 이은 존 왕은 실제 역사에서도 폭군이었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존의 형인 '사자심왕 리처드'이다. 리처드 왕은 당시 3차 십자군 전쟁에서 이슬람 세력에 대항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장수였다. 그는 뛰어난 전략가이자 용맹한 전사였으며, 많은 전투에서 승리를 가져왔다. 영국의 대외 위상을 한껏 끌어 올린 그였지만, 아무리 좋게 봐도 '성군'은 아니었다.

오랜 전쟁 탓에 영국 민중의 삶은 피폐해져 있었으나, 전쟁에서 보급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던 리처드는 계속해서 자국민을 쥐어짰다. 이미 세금 문제는 리처드의 통치 시절부터 가중된 문제였다. 그런데 왜 하필 존이 왕위를 이으려고 하자 세금 문제가 폭발했는가. 세금을 향한 민중의 원망은 왜 존 왕에게만 쏠렸을까.

역사적 맥락을 거두고 극 이야기에만 집중해도 납득이 잘되지 않는 건 마찬가지다. 리처드가 죽은 후, 존이 길버트와 연합해 필립을 함정에 빠트리고 왕좌를 차지하려는 시간은 얼마 되지 않는다. 그 짧은 기간 사이에 존이 무엇을 어떻게 했길래, 리처드 때에는 얌전했던 민중의 분노가 극에 달했으며, 민중의 고통 받는 현실이 왜 전부 존의 탓인지 제대로 설명되지 않는다.

물론, 이런 문제의 책임을 온전히 <로빈훗>에만 돌릴 수는 없다. 판본마다 다소 차이가 있지만, 리처드에게 충성하고 이전 왕 헨리나 차기 왕 존과 갈등하는 양상은 <로빈 후드> 원작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원작 <로빈 후드>의 로빈 후드는 애초부터 혁명의 지도자가 아니었다. 처음부터 스스로를 혁명으로 정의하지 않았으면 모르되, 혁명이 아닌 걸 혁명이라고 우기는 모양새가 마음에 와 닿지 않는다.

누누이 강조하지만, 역사의 재해석이나 가공·재창작 등은 온전히 창작자의 권리이다. 역사 왜곡은 문제의 소지가 있지만, 극적 재미와 설득력을 위한 작업이라면 '정상 참작'의 여지가 있다. 리들리 스콧 감독은 영화 <로빈 후드>의 세계관에 마그나 카르타를 끼워 넣음으로써 역사적 사실 관계를 왜곡했지만, 최소한 로빈 롱스트라이드를 훌륭한 혁명의 투사로 재탄생시켰다.

뮤지컬 <로빈훗>은 가상 인물 '필립'을 만들고, 존을 권좌에서 몰아내면서 실제 역사와 다른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그럼에도 정작 이야기의 설득력을 제대로 끌어올리지 못했다. 예컨대 <로빈훗>을 관람한 많은 이가 '명대사'로 꼽는 부분을 보자.

"나라를 만들어 좋은 왕이 되고 싶거든 정치를 잘하는 놈에게 정치를 맡기고, 세상 이치를 잘 아는 놈들에게 법을 만들게 하고, 정직한 놈들에게 권력을 줘. 우리는 나라를 흔들고 권력을 쥐고 싶은 게 아냐. 우리가 원하는 건 사람처럼 살 수 있다는 희망이야."

제작사에서도 이 부분에 대해 적극적으로 홍보했다. '민심 뮤지컬'이라는 수식어까지 나오면서, 정치에 환멸을 느끼고 지친 대중의 마음을 위로하는 장면이라고 치장됐다. 지난 2012년 대통령 선거 직후, 뮤지컬 영화 <레 미제라블>의 성공한 것 역시 같은 맥락이다. 그러나 이 부분이야말로 결정적으로 <로빈훗>의 이념적 한계를 여실히 드러낸 부분이다.

정치는 정치하는 자들만의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것이다. 진정한 민주주의는 각 개인 모두가 정치 현실에 참여하는 주체자로 기능할 때, 각자의 의견을 공론장에서 자유롭게 개진할 수 있을 때 한걸음 가까워진다. 그런데 <로빈훗>에서는 각자의 역할을 구분한다. 정치는 '잘하는 놈'의 것, 법은 '세상 이치를 잘 아는 놈'의 것이다. 마치 평범하고 무지한 이들은 '권력을 쥐'어서는 안 된다는 듯이 얘기한다.

저 대사가 나온 장면을 살펴보면 맥락은 더 묘해진다. 셔우드 숲의 무리들이 각자의 억울함과 소망을 털어놓자, 필립 왕세자는 자신이 왕이 되면 모두 들어주겠노라고 공언한다. 로빈은 그렇게 호언하는 왕세자를 주먹으로 때려눕히며 저 대사를 내뱉는다. 왕은 이들의 말을 들어서는 안 되는가. 그동안 억눌려왔던 이들의 이야기를 실현시켜주는 게 '포퓰리즘'일까. 이들은 정치의 주체가 아니라 객체로만 존재해야 하는 걸까.

영국 왕실의 기사였던 로빈 록슬리는, 이름을 버렸을지언정 진정한 민중의 영웅이자 혁명의 리더인 로빈 훗이 되지 못했다. 그는 이처럼 현 체제와 구조를 옹호한다. 구조 자체를 뒤엎기보다는 폭정을 일삼는 왕 개인만 교체하는 데 몰두한다. 민중의식을 고양시키기는커녕 의식의 발로를 방해하는 것 같은 느낌마저 든다. "폭풍이 다가온다"고 노래하던 이들의 이야기는, 결국 로빈 훗 탓에 찻잔 속 폭풍에 그치고 만다.

잘못 세공된 보석 같은 작품, 재연 때는 제 빛 발할까

뮤지컬 <로빈훗>의 홍보용 서브 포스터. 영화 <프랑켄슈타인>의 포스터 표절 논란에 휩싸였다. 'Definition'은 '정의'를 의미하는 'Justice'의 오기로 보인다. ⓒ 엠뮤지컬아트


<로빈훗>은 분명 여러 장점을 가지고 있는 작품이다. 몇 가지 단점 탓에 가려졌지만, 요소 하나하나를 분리해서 본다면 매력 포인트가 꽤 있었다. 대표넘버 '폭풍이 다가온다'는 몇 번을 들어도 질리지 않는 웅장함을 가지고 있고, 중량감이 느껴지는 액션은 <삼총사>나 <조로>와는 또 다른 맛이 난다. 맥락과 별개로 대사나 장면을 분절했을 때, 꽤나 의미심장하게 들리는 구절도 여럿 있다. 비록 우연이었지만, '연말정산' 논란과 맞물리면서 '세금'의 문제를 거론한 점도 인상 깊다.

모든 메시지가 허공에 흩어지는 것도 아니다. 최소한 필립은 가장 낮은 곳으로 들어가, 밑바닥 삶을 체험하고 그들의 이야기에 공감했다. 많은 이가 정치적 목마름에 시달리는 현실에서, <로빈훗>은 단비가 되어줄 작품이 될 수 있었다. 민주화 시대의 푸른기와집에 계신 정부의 수장에게는 찾아보기 어려운 태도를, 전제왕권 시대의 젊은 왕세자가 보여줬음은 분명하다.

전작 <프랑켄슈타인>을 훌륭하게 이끌었던 연출이었기에 대중의 기대도 더 컸다. 그러나 구슬이 서 말이어도 꿰어야 보배건만, 제대로 꿰지 못해 결국 보배가 되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훌륭한 원석을 잘못 세공한 것만 같다.

<레 미제라블> 영화와 뮤지컬이 한국에서 흥행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들이 말하는 혁명이 현 한국 사회를 날카롭게 꿰뚫고 있었기 때문이다. 정치의 실패에 지친 이들을 위로하는 시대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뮤지컬 <로빈훗>이 <레미제라블>과 견줄 만큼, 의미와 감동이 있는 작품이 될 수 있을까. 초연에서의 아쉬움을 못내 떨쳐 버리고, 재연을 기대해 본다.

덧붙여, 작품에 폐만 끼치는 홍보물 표절은 이제 그만할 때가 됐다.

뮤지컬 로빈훗 로빈후드 혁명 민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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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5월 공채 7기로 입사하여 편집부(2014.8), 오마이스타(2015.10), 기동팀(2018.1)을 거쳐 정치부 국회팀(2018.7)에 왔습니다. 정치적으로 공연을 읽고, 문화적으로 사회를 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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