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호진 복귀? 이건희·정몽구처럼 안 될 것"

[인터뷰] '태광그룹 비리' 제보한 박윤배 서울인베스트먼트 대표

등록 2010.10.28 14:19수정 2010.10.28 1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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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광그룹 이호진 회장 일가의 비자금 조성, 불법 세습 등 비리 의혹을 제보한 박윤배 서울인베스트먼트 대표 ⓒ 김시연


국정감사가 한창이던 지난주 국회는 태광그룹 정관계 로비 의혹을 둘러싼 여야 공방으로 뜨겁게 달아올랐다. 그러나 정작 검찰 수사까지 이끈 유력한 제보자로 떠오른 박윤배(53) 서울인베스트먼트 대표는 여야 어느 편에도 서지 않는 '관전자'일 뿐이었다.

"태광그룹 비자금 수사와 관련해 내가 피하려고 노력하는 게 3가지다. 첫째 김용철 변호사처럼 보이는 것, 둘째 '먹튀'로 보이는 것, 셋째 정치에 휘말리는 것이다."

태광그룹 수사가 보름째에 접어든 지난 27일 오후 여의도 사무실에서 만난 박윤배 대표는 여전히 '서울서부지검 비공식 조사원'을 자임하며 추가 제보 확보에 여념이 없었다. 

"김용철 같은 내부 고발자? 내겐 투자 사업일 뿐"

지난 13일 서울서부지방검찰청의 태광그룹 본사 압수수색으로 시작된 이호진 회장 비자금 의혹 수사 이후 박 대표는 언론의 집중 조명을 받았다.

태광그룹에서 3년간 구조조정 자문역을 맡은 경력 때문에 삼성그룹 비자금을 고발한 김용철 변호사 같은 '내부 고발자'로 그려졌다. 반면 태광그룹에선 박 대표가 검찰 제보에 앞서 회사에 내용 증명을 보내 27억 원을 요구했다고 주장하고 있고 일부 언론에선 그를 기업 경영권 탈취를 노리는 전문적인 '기업 사냥꾼'으로 묘사하기도 했다.

하지만 박 대표는 이 두 가지 시각을 모두 거부한다. 이번 제보가 2003년 자신이 주도한 이호진 회장 교체 시도가 실패로 끝난 뒤 개인적인 감정이 작용했음을 스스로 인정하면서도 돈을 요구한 것도, 당장 돈을 바라고 한 일도 아니라고 주장한다. 오히려 "서울인베스트먼트는 불법 비리로 주주에게 손실을 끼친 기업을 정상으로 만들어 수익을 얻는 회사"라면서 태광그룹을 정상화시켜 쌓은 '관심과 신뢰'를 바탕으로 자신의 사업을 키우겠다는 '속셈'을 직접적으로 드러내기도 했다.   


"불법 비리 기업을 바꾸는 데 김용철 변호사 같은 내부 고발자가 중요한 한 축이다. '장하성 펀드'(라자드한국기업지배구조개선펀드)처럼 법적으로 문제 제기하는 것도 중요하다. 난 코치나 해설가보다 선수 역할만 해왔다. 우리나라에 기업 문제를 비판하는 코치나 평론가는 많지만 실제 기업을 바꾸는 선수가 없다.

난 기업가다. 그동안 불법 비리 기업 독재를 바꾸려고 내부 고발자와 시민단체, 정치권 등에서 노력해 왔지만 난 기업적인 방식으로 바꿔보겠다는 거다."

"검찰 수사 뒤 이호진 일가 1100억 원 번 건 코미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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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호진 태광그룹 회장의 개인 집무실이 있는 서울시 종로구 신문로 흥국생명 본사. 검찰은 지난 16일 태광그룹에 대한 비자금 조성과 정관계 로비 의혹으로 이 회장의 집무실과 장충동 집을 압수수색했다. ⓒ 유성호

"보통 기업 조사하는 데 3개월 정도 걸리는데 태광은 1년 9개월 걸렸다. 당시 외국계 펀드에서 이 일을 함께 하자고 제안했을 때 계약했다면 나도 150억 원은 벌었을 거다. 당시 그 펀드가 갖고 있던 주식 시가가 500억~600억 원 정도 됐는데 지금 시세면 700억~800억 원은 더 벌었고 보통 수수료가 20%다. 하지만 외국계 펀드와 손잡고 했으면 '먹튀' 취급을 받을 수 있었다. SK 지배 구조를 개선하고 돈 벌고 나간 소버린에게도 국내 여론이 비판적이지 않았나."

박 대표가 언론사에 돌린 '불법으로 얼룩진 태광산업'이란 제목이 붙은 50쪽 분량의 제보 자료에는 태광그룹 모기업인 태광산업(주)의 계열사와 소유 구조부터 이호진 회장의 비자금 조성, 편법 세습, 상속세 포탈 등 각종 불법 의혹들이 가계도와 함께 세세하게 담겨 있다.

그간 언론에서 크게 부각된 티브로드의 큐릭스 인수 과정도 그 가운데 하나다. 박 대표가 "실제 검찰에 건넨 자료는 1000쪽에 달해 '수사 보고서'에 가깝다는 평가도 들었다"고 자랑할 정도다.   

"내겐 이게 투자 비즈니스다. 이번에 이기고 돈은 다음에 벌자고 시작했다. 내가 가진 게 (태광산업 주식) 2주뿐이니까 역풍이 불 수 없었다. 검찰 수사 뒤 정작 주가가 올라 이호진 일가는 1000억 원 넘게 벌었지만 난 29만 원 벌었다지 않나. 코미디 아닌가."

실제 압수수색 전날인 12일 각각 119만2000원, 7만2600원이던 태광산업과 대한화섬 주가는 26일 현재 각각 133만8000원, 11만9500원으로 크게 올랐다. 덕분에 이호진 회장 등 특별관계자가 보유한 주식 가치는 1100억 원 오른 반면, 태광산업 2주만 보유한 박 대표의 평가 가치는 29만 원 오르는 데 그쳤다.

"불법 비리가 있는 기업을 상대로 이기려면 법과 지분 싸움 2가지인데, 태광산업은 이호진 일가와 관계자가 사실상 90%를 갖고 있어 지분 싸움으론 이길 수 없다. 법으로 싸울 수밖에 없는데 법은 김앤장이 얼마든지 거꾸러뜨릴 수 있고 남은 건 언론뿐이었다. 김앤장을 이길 수 있는 건 사회적 명분밖에 없었다." 

"'불법 백화점' 태광, 검찰-언론 관심 맞아떨어져"

이호진 외 특별관계자 24인이 보유한 지분은 46.72%지만 자사주 22.50%와 차명 의심 계좌 15~20%까지 포함하면 발행주식 총수의 85~90%를 넘나드는 사실상 개인 회사라는 게 박 대표 주장이다. 이런 구조적 문제 때문에 수천억 원대 비자금 조성과 3대 편법 세습, 정관계 로비 등 3대 비리가 나타났다는 것이다.

"비자금 조성은 조세 포탈로 국민 세금과 관계돼 있고 불법 세습 문제는 배임으로 주주와 관계돼 있다. 정관계 로비는 사실 주주나 국민 세금과는 무관하지만 비자금은 나쁜 데 쓰려고 만든 것이어서 출구가 있을 수밖에 없다. 언론은 이 출구에 관심이 많다. 언론사는 4~5군데와 접촉했다. 일부 언론사는 사장까지 만났지만 모두 거절당하고 <한겨레>만 남았다. 그래서 <한겨레>가 계속 한 발 앞서 보도할 수 있었다. <조선>은 검찰 쪽에 밝았다. 사건이 터지고 난 뒤 검찰에서 정보를 받았는지 물어보는 것부터 다른 언론사와 달랐다. 그래서 두 언론사가 앞서 나갈 수밖에 없었다."

박 대표는 2009년부터 1년 9개월에 걸쳐 전·현직 태광 내부 제보자들에게서 정보를 끌어모았고 이를 검찰과 언론에 단계적으로 알렸다. 이 과정에서 검찰과 언론의 관심과 속성도 잘 파악하고 있었다. 시기도 잘 맞아떨어졌다. 

"우연이지만 복이 있었다. 검찰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 수사, '스폰서 검사' 사건 등으로 국민적 신뢰를 잃고 뭔가 '정의 검찰'이 되려는 욕구가 있었는데 마침 태광그룹이 걸린 거다. 언론에서도 팰 만한 '불법 백화점' 없나 찾았는데 만만하면서도 광고도 안 하는 회사였고."

노동운동가에서 기업 구조조정 전문가로 '변신'... "기업 세습 독재 막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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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국생명해직자복직투쟁위원회 이형철 의장(뒤)과 김득의 간사가 20일 오전 서울 종로구 신문로 흥국생명 본사 앞에서 태광그룹의 편법 및 특혜 의혹과 국세청 직무유기에 대한 고발 기자회견을 열고 검찰의 철저한 수사를 촉구하며 108배를 하고 있다. ⓒ 유성호


박 대표의 화려한(?) 경력도 주목을 받고 있다. 서울인베스트먼트(www.ibseoul.com) 홈페이지에는 국가보안법상 이적단체 구성 혐의로 투옥된 경험을 포함한 1980년부터 10여 년에 걸친 노동운동 경력과 1993년 5년에 걸친 대우그룹 김우중 회장실 자문위원 활동, 이후 노사정위원회 공익위원 활동까지 노-사-정을 거쳐 기업 구조조정 전문가에 이르기까지 복잡한 인생 굴곡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이 때문에 흥국생명 해고자복직투쟁위원회 쪽에선 태광그룹 불법 비리 제보자란 '한 배'를 타고 있으면서도 박 대표가 흥국생명 구조조정 과정에서 '노조 파괴 주범'이었다며 반목하고 있다.

박 대표는 "과거 역사를 부정할 수 없어 같이 안 할 거라고 봤고 각자 좋은 역할을 하고 있다고 본다"며 자신의 경력이나 노조와 불편한 관계에 대해선 말을 아꼈다. 다른 한편 '기업가' 경험을 바탕으로 삼성, 현대차, 두산그룹 등 국내 재벌가의 기업 지배 구조 문제에 대한 강한 반감을 드러내기도 했다.

"북한이 세계 제일의 아사자 국가가 된 이유가 김정일 정치 독재라면 한국이 세계 제일의 자살자 국가가 된 건 기업 세습 독재와 관련이 깊다. 대기업이 하청회사 후려치는 걸 봐라. 군부 독재에 대한 반감보다 하청 사장이 원청사에 갖는 반감이 더 클 거다.

정치는 누구나 최고 지도자가 될 수 있지만 기업에선 오너 일가가 아니면 최고 리더가 절대 될 수 없다. 사장이 될 인재가 없어서 오너가 돼야 한다는 건 대한민국 국민에 대한 모독이다. 유능한 인재가 기업 리더가 될 가능성을 차단하는 나라는 후진국일 수밖에 없다. 기업 세습 독재를 막는 게 한국 사회를 밝게 하는 최대 관건이고 우리가 오너 충성형 불법 비리 기업을 찾는 이유다."

"이호진 사법 처리로 끝나지 않고 태광 새판 짜기로 이어질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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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윤배 서울인베스트먼트 대표 ⓒ 김시연

최근 대검 중수부의 C&그룹 수사에 밀려 태광그룹 수사에 대한 여론의 관심이 주춤한 상태지만 박 대표는 여전히 검찰 수사에 큰 기대를 걸고 있었다. 
"검찰의 엄정한 법 집행 속도가 시속 50km라면, 언론은 처음부터 시속 100km로 밟았다. 언론 과속 때문에 요즘 주춤해 보이는 거지 검찰은 엄정하게 최고 속도를 밟고 있다고 본다. 지금 검찰 수사에는 문제가 없다고 본다."

아울러 이번 검찰 수사가 이호진 회장 사법 처리에 그치지 않고 태광 지배 구조 개선에도 효과를 발휘할 것으로 보고 있었다.

"두고 봐야겠지만 이미 선을 넘었다. 구조적인 변화를 가져올 거다. 이호진 회장 구속으로 이어질 거다. 이미 루비콘강을 건넜다. 오히려 이호진 회장 사법 처리 이후의 방향이 중요하다. 이건희·정몽구 회장은 검찰 포토라인에도 섰고 사법 처리도 됐지만 결국 (삼성그룹과 현대자동차그룹 지배 구조 문제는) 유야무야되지 않았나. 두고 보면 알겠지만 (태광은) 그렇게는 안 될 거다."

그는 한 발 더 나아가 이호진 회장 사법 처리가 태광그룹의 새판 짜기로 이어질 것으로 기대했다. 

"구 권력이 물러나고 새 권력이 들어와 새살이 돋게 해야 한다. 자연인이 누구냐보다 판이 바뀌면 새로운 기회가 생길 것이다. 이호진 회장 아들이 (새 회장이) 되더라도 새판이 짜일 수 있고 이전 경영 방식대로는 못 한다. 설사 이호진 회장이 복귀하더라도 예전처럼 못할 거다. 난 이건희, 정몽구처럼 못하게 할 복안이 있다. 첫째 사회적 압력, 둘째 불법 제거, 셋째 이호진 적대 주주로 나설 것이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이호진 회장 일가 쪽에서 자신의 요구 조건을 받아들여 기업 지배 구조 개선에 나서길 기대하고 있었다. 검찰 제보에 앞서 지난 9월 20일 태광그룹에 발송한 문서에도 이런 요구 사항을 담았지만 끝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지금이라도 이호진 일가 쪽에서 협상 제의가 온다면 대환영이다. 새로운 판을 짜는 데 동의한다면 언제든 열려 있다. 새판이란 합법 경영, 투명 경영, 포탈한 세금 환원, (이호진 회장의) 2선 후퇴 등이다. 난 이호진 일가를 없애자는 게 아니다. 태광그룹을 바꾸는 게 중요하다."
#태광그룹 #이호진 #박윤배 #비자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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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사회부에서 팩트체크를 맡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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