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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어대사전
▲ 이희승편저, 국어대사전
ⓒ 송유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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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혁명에서 자신의 역할을 다한 이희승은 학원으로 돌아왔다. 자신의 자리에서 다시 연구하고 글을 쓰는 데 온 힘을 쏟았다. 정치에 참여한 교수들도 있었지만, 이희승은 현실 정치와 담을 쌓은 남산골의 선비였다. 혁명 후 정계는 크게 요동쳤다. 학교 안팎에서 더러는 과격한 주장과 행동을 하는 학생들의 활동도 있었다.

4·19 혁명 이후 이런 어수선한 정국을 틈타 우리 현대사의 지울 수 없는 비극이 벌어졌다. 1961년 5월 16일, 박정희 군부 세력이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탈취해 버렸다. 박정희 육군 소장을 중심으로 하는 장교 250여 명과 사병 3,500여 명이 동원된 군사 반란이었다. 민주당 장면 정권이 수립된 지 8개월 만이었다.

쿠데타의 광풍은 지극히 비정치적인 학자도 그냥 놔두지 않았다. 학자의 자리로 돌아와 연구와 저술에 몰두하는 이희승에게까지 생각지 못한 불똥이 튀었다. 조선어학회 사건 때와 마찬가지로 자신을 찾아온 형사들에게 또다시 영문도 모른 채 연행당했다.

"5·16 직후 어느 일요일 나는 중부경찰서에 연행되었다. 그날은 일요일이었지만 잡무가 있어 학교에 출근했는데, 형사들이 학장실로 찾아와 함께 가자는 것이었다. 조선어학회 사건 때처럼 영문도 모르고 따라나섰다. 경찰에서는 대학교수단 모임에 참가한 일이 있지 않느냐고 했다." (주석 1)

이때의 대학교수단이란 4월 혁명 당시 급조되었던 단체와는 달리, 이희승이 미국에서 귀국한 뒤에 교수들의 지위와 권익을 확보한다는 취지로 만들었던 임의단체였다. 초기에는 그도 몇 차례 모임에 참석했으나 차츰 흐지부지되어 단체는 유명무실한 상태였다. 5·16 직전에 참석해 달라는 통보가 있었지만 다른 일로 바빠서 참석하지 못했다. 다행히 경찰에 연행되고 며칠 뒤에 이런 사정이 드러나 경찰서에서 풀려났지만 일제 경찰서 유치장의 악몽이 떠오르는 건 당연했다. 이희승은 이 사건으로 심신이 많이 상했다.

정권을 장악한 군부는 자신들의 거사 명분용으로 세대교체를 내걸고, 그해에 '교육에 관한 특례법'을 제정하여 교원 정년을 낮췄다. 이 법에 따르면 이희승은 정년에 해당해 9월 30일에 서울대학교를 떠났다. 15년 동안 봉직해 온 대학의 정년 퇴임식에서 명예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61년은 그의 생애에서 희비가 갈리는 해였다. 아직 심신이 강건했으나 급조된 법에 따라 정년에 걸려 학교에서 강제로 밀려난 것은 큰 아픔이었다. 그러나 시집 <심장의 파편>과 그가 스스로 "생애 최대의 역저"라 평했던 <국어대사전> 출간은 이런 아픔을 잊게 해 주었다.

특히 <국어대사전>(민중서관)은 1950년 초부터 작업을 시작해 11년 만에 완성한 노작이었다. 당시 우리말 사전은 한글학회에서 펴낸 <한글 큰 사전>(전2권)이 전부였다. 이희승이 <국어대사전>을 펴내는 과정에 우여곡절이 적지 않았다. 6·25 전쟁으로 부득이하게 중단되기도 했고, 이희승의 자택에 불이 나는 바람에 그동안 만든 자료가 재가 되는 등 시련이 끊이지 않았다. 예산과 인력도 적잖이 투입되었다. <국어대사전>은 이렇게 어렵게 어렵게 만들어진 작품이었다. 어휘 수도 처음에 20만 개를 생각했는데, 작업하면서 7만 개가 늘어나는 등 그 노고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사전이 나오자 의외로 반응이 좋았다. 서점에 나가기가 무섭게 매진되었다. 민중서관으로서 공전의 대히트를 기록한 셈이고, 따라서 나도 재미를 보았다.

나는 70년대 들어 이 사전의 증보판을 낼 준비를 시작했다. 좋은 사전이란 관용어가 많이 들어가야 한다. 그래서 나는 항간에서 널리 쓰이는 관용어를 집중적으로 수집하고, 그동안 새로 생겨난 신조어와 시사 용어를 그러모아 82년 11월 수정증보판을 내기에 이르렀다. (주석 2)

<국어대사전>이 처음 나왔을 때 학계는 물론 문화계에서도 이 사전의 출간을 경사라고 평가했다. 넉넉한 어휘량은 물론 우리말을 풀이한 내용도 좋은 평가를 받았다.
국어학자 이숭녕은 한 신문에 다음과 같은 기고문을 실어 이 사전을 극찬했다.

해방 후에 우리가 걸어온 사전 편찬의 역사도 숨가쁜 것이었으며 그만큼 내용과 인쇄제본 기술의 발달은 헤아릴 수 없다. 이희승 편저인 이 사전은 국판, 본문만이 3,330면에 부록까지 넣으면 모두 3,460면을 넘어 판권으로선 우리나라 최대 최초의 거편이요, '인디아·페이퍼'로서 이 방대한 면수를 유지한 것이고 '로마자 외래어의 한글 표기, 찾아보기', '동식물의 학명 찾아보기', '한자정독자체' 등 부록도 우리에게 절실한 것으로 좋은 편집이라고 하겠다.

이 사전의 내용을 보더라도 어휘의 모집이 지극 친절하고 성실해서 23만의 어휘의 배열에 무리가 없으며, 미세한 어휘의 차이까지 한 단위로 다룬 점도 특기할 만하다. 주석은 그 어휘의 양에 비해서도 가능한 한 자세하게 하려 하였고, 지극히 표현의 기교를 고려한 것 기쁘게 생각한다.

장단음의 표시도 꼼꼼하게 애썼다고 보며, 고어의 배열과 해석도 정확을 기했고, 더구나 출전을 밝혔으며 다른 사전에서 산견되는 오석을 없앤 것이다. 영·독·불 등 외국어의 철자법도 깨끗이 수록되어 있어 훌륭한 내용을 갖춘 것이라 하겠다.

내용에서 일대 개척이 되며 좋은 시범으로서 의의를 가질 것이라고 믿는다.(주석 3)


주석
1> <회고록>, 227쪽.
2> 위의 책, 229쪽.
3> <동아일보>, 1962년 2월 5일 자.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딸깍발이 선비 이희승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태그:#이희승, #이희승평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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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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