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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급조치 9호라는 악법을 발동한 이도 박정희였지만, 그 긴급조치 9호 때문에 죽은 이도 박정희였다. 무엇이 그렇게 '긴급'했을까? 박정희의 혼령을 불러내어 물어보자.

"유신헌법 철폐하라."

1975년 5월 13일, 도대체 누가 외치는 소리가 그렇게도 급박하게 들렸기에 긴급조치 9호를 발동했나?

1975년 4월 9일, 사형을 선고한 지 24시간만에 사형을 집행한 인혁당 관련자 혼령들이 그렇게도 괴기했던가? 1975년 4월 12일, 서울대학생 김상진의 배에서 뿜어나오는 선혈이 그렇게도 충격적이었을까? 1975년 4월 15일, 김상진 추모식에 모인 1천여 광주일고생의 함성이 그렇게도 무서웠던가?

고등학생 향한 경찰의 가혹수사, 박정희의 상식 밖 행동
 
박정희 정권의 '대통령긴급조치'는 유신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동원한 '조폭'이나 다름없었다.
 박정희 정권의 '대통령긴급조치'는 유신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동원한 '조폭'이나 다름없었다.
ⓒ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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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48년만에 만났다. 1975년 5월 교문돌파 시위를 모의했던 우리는 그날의 일을 회고했다. 그날의 시위 미수 사건으로 16인이 퇴학 당했으나, 이 초유의 폭거에 대해 아무도 기록하지 않고 있으니 당사자들이 모여 사실의 조각들을 짜 맞출 수밖에 없었다.

디데이는 5월 2일이었다. 주범 최수일은 하루 전날, 후문의 돌쩌귀를 망치와 끌로 부수고 있었다. 깜깜한 밤중이었는데 어디에선가 낯선 사람들이 다가와 연행해갔다.

최수일은 그렇게 돌고개에 있던 서광주경찰서로 끌려가 죽도록 얻어맞았다. 화정동에 있던 중앙정보부 광주 분실에서는 '통닭구이'에 물고문을 당했다.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경찰은 도청 앞에 있던 전남 도경 대공분실로 끌고가 손톱 사이를 찔렀고, 담뱃불로 입술을 지졌으며, 생식기에 종이를 꽂았다.

3인의 학생인 최수일, 오순기, 그리고 필자 황광우에게 구속영장이 떨어진 날은 5월 8일이었다. 무엇이 그렇게 급박했을까? 교문을 돌파하고자 했던 고교생의 생각이 그렇게 무서웠을까? "우리 1천 여 광주일고생은 유신헌법을 철폐하길 희망한다"는 가정법 문장의 선언문이 그렇게도 목을 조였을까?

생활기록부를 떼어 봤다. 16인의 학생에게 퇴학 조치를 결정한 날은 5월 7일이었다. 일본제국주의로부터 해방된 이래 광주일고에서 여러 차례 시위가 전개됐으나, 단 한 번도 주모자를 퇴학시키는 전례가 없었다.

고교생에게 사회적 사형이나 다름없는 퇴학 조치를 결정한다는 것은 일본제국주의 시대로 회귀하는 것을 의미했다. 그만큼 16인의 집단 제적 조치는 반동적이었다. 그것은 박정희가 아니고선 내릴 수 없는 상식 밖의 짓이었다.

5월 7일 광주일고는 16인의 학생을 퇴학시켰고, 5월 8일 3인의 고교생을 구속시켰으며, 5월 13일 긴급조치 9호를 발동했다. 전두환이 전남대생의 시위를 진압하기 위해 1980년 5월 18일 신우식의 7공수를 광주에 투입하듯, 박정희는 당시의 긴박한 사태를 진압하기 위해 긴급조치 9호를 발동하였다. 5월 8일과 5월 13일 사이에 무슨 사태가 벌어졌는지 찾는 일은 역사가들에게 맡긴다.

민주화를 요구했던 그들의 유대

최수일과 이규는 흥사단 출신이었다. 필자 피닉스 출신이었다. 써클로 분석하자면, 흥사단 출신과 피닉스 출신, 이재직이 이끄는 유도부 부원들이 벌인 거사는 5월 2일 시위 미수 사건이었다.

시위와 써클은 바늘과 실처럼 따라다닌다. 1974년 10월 1차 시위의 주모자 지병주는 피닉스였고, 정경연은 광랑이었다. 같은 해 11월 2차 시위의 주모자 손호상은 피닉스였다. 이듬해 4월 3차 시위의 주모자 박석면은 문학써클 울림이었다.

광주일고에서 써클의 역사는 그 뿌리가 깊다. 1972년 6월, 광주일고생(48회) 600여 명은 강당에서 교육민주화를 외치며 농성을 벌였다. 광랑의 정용화, 원시림의 김기정, 피닉스의 김용구, 흥사단의 김영채 등 써클 회원들이 주동을 맡았다.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강당에 집결해 폭력 교사들을 성토하고, 교육민주화를 요구하며 농성을 벌였다.

1973년 12월 초순 어느날 3학년 교실 입구에 시국을 성토하는 격문이 붙었다. 광주일고생(49회)들은 "유신철폐"를 외치며 도청 앞으로 뛰어갔다. 길가의 시민들은 박수치며 격려했다. 시위대열과 진압경찰은 쫓고 쫓기면서 도청 앞과 광주공원을 거쳐 다시 학교로 돌아왔다. 그날 새벽에 격문을 붙인 심영돈과 강두헌은 광랑 출신이었다.

1973년 서울문리대 시위를 주도한 정찬용(44회), 1974년 민청학련 전남대생 최철(46회), 1980년 5월 도청의 최후를 지킨 정상용(44회)과 이양현(44회)이 광랑이다.

1978년 10월 광화문 시위 준비팀에서 정경연(광랑), 황광우(피닉스), 이규(흥사단)가 뛰었다. 1980년 6월 서울에서 안평수와 지병주, 필자는 광주의 진실을 알리는 유인물을 제작해 살포했다. 모두 피닉스이다. 고교 시절 맺은 써클의 인연은 학교를 떠난 후에도 혈연처럼 끈끈한 유대의 기반이 되었다.

광주일고생의 민주화운동만이 아니다. 광주고보생의 독립운동에서도 써클은 운동의 중추역할을 하였다. 1926년 11월, 광주고보생 왕재일과 장재성, 최규창과 정우채는 광주농고생 문승수와 박인생, 정동수와 정남균과 함께 비밀결사 성진회를 결성했다.

1928년 광주고보에서 동맹휴학투쟁을 맹렬하게 전개했던 것은 성진회 회원들의 활약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1929년 6월, 일본유학에서 돌아온 장재성은 광주의 학생들을 독서회로 조직하였다. 이 독서회 회원들이 1929년 11월 3일 대시위를 이끈 주역이었다.

태그:#긴급조치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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