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결혼 전, 나는 학교 앞 3층 옥탑방에서 생활했다. 얼마 전 TV드라마 <옥탑방고양이>를 보면서 남의 얘기 같지 않았다. 사실 TV에 나온 옥탑방은 내가 살던 옥탑방에 비하면 너무나 화려하고 좋은 곳이었다. 내가 살던 곳은 수압이 낮아서 아래층에서 누가 물을 쓰면 옥탑방엔 물 한 방울 나오지 않던 곳이었다.

▲ 엄청나게 지어지는 아파트는 누가 다 가져가는 걸까요?
ⓒ 이경운
내 인생의 전환점, 바로 결혼이었다. 드디어 옥탑방을 탈출하게 된 것. 그런데 직장 생활 초기라서 모아둔 돈도 없었고, 원래 집도 그리 넉넉한 편이 아니어서 아파트는 꿈도 못 꿀 형편이었다. 나는 그 살기 좋다는 평촌의 아파트촌을 조금 지나 일반 다가구 주택 2층에서 결혼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실평수 10평, 방 2개, 좁은 부엌, 기형적인 거실(사실 출입문에서 방까지 가기 위한 통로였다), 화장실로 이루어져 있었다.

옥탑방을 탈출해 방 2개 있는 집으로 이사를 했으니 나에게는 엄청난 발전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신혼살림이 들어오면서부터 생겼다. 침대 하나 장롱, 냉장고를 들여 놓으니 도무지 공간이 없는 것이었다. 옷장도 한 방에 들어가지 않아 한쪽은 다른 방에 있어야 했다. 물론 다음에 이사한 집에서도 옷장은 온전하게 한 몸이 되지 못해 다른 방에 놓여졌다.

지금 생각해 보면 장인 장모님 보시기에 귀하게 키운 딸이 남편 잘못 만나 고생 좀 하겠구나 생각하셨을 거 같다. 내가 딸 가진 부모라도 그랬을 거다. 잘 키워 놨더니 가진 것도 없는 촌놈과 결혼해 움직일 공간조차 없는 집에 들어가는데 어떤 부모 맘이 편할 수 있을까. 그래도 두 분은 작게 시작해야 커가는 즐거움을 배울 수 있다며 많은 용기를 주셨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 좁은 집에서도 회사 동료 10여명을 불러 집들이를 했다는 것이다. 사실 방이 좁아서 무릎끼리 겹쳐 앉아서 술을 마셨다. 친구들 집들이도 했는데, 그때는 더 심했다. 20여명이 왔는데, 담배 피우는 친구녀석들이 담배 피운다는 핑계로 교대로 앉아서 음식을 먹었던 기억이 난다.

좁은 집 때문에 정작 고생을 한 건 아내였다. 결혼 전 비교적 넓은 집에서 혼자 방을 썼던 아내는 자다가도 벌떡벌떡 일어나는 버릇이 생겼는데, 침대가 있던 방에 책장이며 여러 가지 살림살이가 가득 차 있어 공간이 비좁고 답답했던 게 문제였다. 6개월 정도 그렇게 고생했던 것 같다. 덕분에 매일 밤 아내를 재우며 팔베개를 해주느라 팔에 쥐가 날 판이었다.

그래도 맞벌이였던 아내와 나는 착실하게 돈을 모았다. 욕심이 많았던 탓에 둘 다 대학원을 다닌다고 학비를 좀 쓰긴 했지만, 어떻게든 조금이라도 빨리 집을 넓은 데로 옮겨야 된다는 생각에 매 학기 장학금을 타기 위해 무지 노력했다.

몇 년 후 아내와 나는 조금 더 넓은 집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그것도 20평 대의 아파트로. 사실 정상적인 상태였으면 엄두도 못 낼 형편이었는데, 우리 나라가 한창 외환위기를 겪고 있었던 때라 전세금이 많이 떨어져서 생긴 행운이었다. 아내와 나는 이사를 하고 며칠간 잠을 제대로 못 잤다. 그동안 좁은 공간에 적응이 된 탓일까, 여유 있는 거실과 침실이 도무지 적응이 안 되는 것이었다.

물론 너무 좋아 잠으로 그 행복감을 날리고 싶지 않은 탓도 있었다. 며칠간 아내와 거실에서 유영을 하듯 재미있게 놀았던 기억이 있다. 그래도 옷장은 여전히 제 짝을 다 맞추지 못했다. 지은 지 오래된 아파트라 안방이 좁았다.

그 후 2년, 전세계약기간 만료일이 가까워 오고 우리 부부는 다시 한 번 고민에 빠졌다. 모아 놓은 돈은 별로 없었고, 전세금은 하루가 다르게 오르고 있었다. 상대적으로 매매가격은 상승폭이 크지 않았지만, ‘억’자가 붙어 다니는 아파트 한 채의 가격이란 월급쟁이가 감당하기엔 너무 엄청난 금액이었다.

아내는 아직 형편이 안 되니 한 번 더 전세로 옮기자고 했다. 하지만 나는 그동안 미뤘던 2세 계획까지 생각해 대출을 받아서라도 집을 사자고 주장했고, 마침내 독단적으로 일을 저질러 버렸다. 물론 적지 않은 은행 대출까지 받아서 말이다. 사실 월급쟁이가 대출 받아서 집을 산다는 것은 엄청난 부담이었다. 매달 내야 하는 이자와 원금이 만만치 않은 탓이었다.

그런데 운을 타고 난 것일까. 집을 사던 시점은 우리 나라가 외환위기의 후폭풍에서 막 벗어나려던 시점이었고, 그 후 부동산 가격이 대책 없이 뛰기 시작했다. 아내와 나는 “휴” 한숨을 쉬며 가슴을 쓸어 내렸다. 불과 한두 달 사이에 아내와 내가 산 아파트는 도저히 두 사람 수입으로 엄두를 못 낼 만큼 올라 있었던 것이다. 가격이 올라서 좋다기 보다 잘못했으면 내 집 마련을 영영 못할 수 있었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났던 것이다.

집을 구입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아내는 임신을 했고, 씩씩한 아들녀석이 태어났다. 지금은 그 녀석이 거실과 방을 엉망으로 만들어 놓고 다니는 모습을 보며 다시 한 번 그 당시의 결정을 참 잘했다는 생각을 한다. 물론 옷장도 한 방에 다 넣을 수 있게 되었고, 집을 옮긴 후 좋아서 뜬눈으로 밤새는 일은 한동안 여지 없이 지속되었다.

까마득한 시골 출신이었던 나에게 대학 입학 후 서울에 올라와서 이해가 안 되었던 것이 있는데, ‘서울에 집 없는 사람이 많다는 것’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분당에 엄청난 규모의 아파트가 건설되고 있었고, 서울에서도 보이는 곳은 전부 대단위 아파트들이 들어서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직도 전국에는 수없이 많은 아파트들이 지어지고 있다. 그런데도 집 없는 사람들은 여전히 많다. 그리고 기자도 그랬지만, 집 하나 장만하겠다고 못 먹고 못 쓰며 있는 돈 없는 돈 모으는 서민들 또한 여전히 엄청나게 많다. 처음 서울에 오면서 가졌던 “왜”라는 의문에 대한 답을 기자는 직접 내 집을 겨우겨우 장만하며 깨달을 수 있었던 것 같다.

집을 갖고 있으므로 해서 지금 나와 나의 가족들이 누리는 행복이 나만의 것이라고 생각하면 많은 사람들에게 대단히 미안하고, 우울하다. 부디 이 행복이 우리 가족만의 것이 아니었으면 좋겠다. 작더라도 모든 사람들이 가족만의 안정적인 공간을 확보할 수 있는 사회적 환경이 마련되었으면 좋겠다

덧붙이는 글 | <내집 마련 분투기> 응모글     
저의 집 마련에는 드라마틱한 과정은 없습니다. 단지 신혼 때 아내를 좁은 방에서 고생시켰다는 것이 아직도 마음에 걸리고, 가난한 시골청년이 옥탑방에서 아파트 장만해 부자 아닌 부자가 되었다는 것이 스스로 조금은 대견스러울 따름입니다. 그리고 집값이 너무 비싸다는 점과 세입자들의 마음 고생이 너무 심하다는 점 100% 동의합니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