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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겉그림입니다. 이 책은 저도 틈틈이 보지만, 헌책방에서 보일 때마다 사서 둘레 분들에게 선물하는 책이기도 합니다.
ⓒ 최종규
<1> 강의실에서 뛰쳐나가다

1994년 10월 25일, 서울대학교 둘레에 있는 헌책방에서 <삶과 믿음의 교실, 한길사(1978)>이란 책을 만났습니다. 이 책을 지은 이오덕 선생님을 잘 알지는 못한 때지만 <우리 글 바로쓰기, 한길사>나 <일하는 아이들, 청년사>이나 <이 아이들을 어찌할 것인가, 청년사> 같은 책을 보며 참 우러를 만한 분이라고는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거기까지 뿐, 딱히 무엇을 더 느낀 건 아니었습니다.

.. 우리는 사회의 참을 알려야 하며, 어른들이 잘못하고 있는 것을 정직하게 알려 주지 않고는 아이들을 올바르게 키울 수 없다. 이미 알고 있는 악을 덮어둠으로써 거짓을 가르치지 말고, 솔직하게 악을 지적하여 그것과 대항하고 이겨나가도록, 악에서 배우는 교육을 해야 하는 것이다 .. <40쪽>

1993년 겨울과 1994년 봄, 저로서는 참으로 길고 고단한 때입니다. 고등학교를 마치고 대학교를 가야 하느냐 마느냐 하는 갈림길에 선 때이기 때문입니다. 진작 고등학교를 그만두고 공장에 들어가서 일하거나 공고에 들어가고팠던 저로서는 시험공부만 죽어라 시키는 학교가 참 싫었습니다. 몇 번이나 그만두고픈 고등학교였지만 살가운 동무들이 있어서 꾹 참았고, 고등학교 때까지만 부모님 뜻대로 학교에 있겠노라 다짐하며 지냈습니다.

그당시 처음 생긴 수학능력시험과 본고사를 함께 치렀으나 뜻하던 학교, 학과에서 떨어졌습니다. 그러다가 들어간 학교가 한국외국어대학교 네덜란드말과. 처음에는 러시아말과 역사를 공부하고 싶었지만 그 뜻이 꺾인 뒤, 남들이 잘 배우지 않는 말을 골라서 그 나라 말과 문화와 역사를 찬찬히 살피고 우리말과 문화와 역사와 견주는 '비교문학'과 번역을 할 참이었습니다.

그런데 대학은 제가 생각했던 것과 너무도 달랐습니다. 교수는 열 몇 해 동안 네덜란드말을 가르치며 자기 교재 하나 없이, 네덜란드에서 만든 교재를 복사해서 앵무새처럼 가르쳤습니다. 더욱 문제는 그런 교수 눈에서 벗어나면 학교 마칠 때까지 권총 차거나 D밖에 못 받는다는 말 때문에 그저 눈치나 보는 선배와 동기들이었습니다. 저는 참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어떻게 했을까요? 저는 교수의 강의를 듣다가 벌떡 일어나서 가방을 챙기고, 인사도 없이 뒷문으로 나가 문을 쾅 닫았습니다. 터덕터덕 계단을 내려가 2층 창턱에 앉아서 가방에 있던 '교재 아닌 책' 하나를 꺼냈습니다.


.. 막상 학력이란 것을 향상시킨다고 하는 것이 학력검사 결과의 평균점을 높이는 것으로 모두들 알고 있는 것 같아 교육의 앞날이 갈수록 암담한 느낌이다 .. <21쪽>

.. 아이들의 착함과 참됨과 무한한 가능성을 믿는 데서 비로소 교육이 시작되는 것이다. 아이들을 믿지 못하여 그들을 감시 감독하고 지시 명령만 하는 곳에서는 결코 교육이 이뤄질 수 없다 .. <머리말>


<2> 이제부터 내게 강의하는 스승은 책이다

고등학교를 마치고 대학교에 와서 가장 기뻤던 일은 학교에서 도서관다운 도서관이 있다는 일이었습니다. 사이사이 가위질 된 곳이 많았지만 <한겨레신문>을 창간호부터 볼 수 있었다는 것은 대단한 기쁨이었습니다.

역사가 꿈틀거리던 때를 담은 신문도 찾아서 보았습니다. 1980년 광주를 보도하는 신문은 웬일인지 거의 한 달치가 다 찢겨져 있었지만 그 앞뒤를 살피는 것만으로도 도움이 되었고, 일제 강점기 때 <동아일보> 축쇄판을 보는 것도 눈을 반짝 뜨게 해 준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대학교 옆에 크고 좋은 헌책방이 있다는 것도 큰 기쁨이었습니다.

강의를 뛰쳐나간 그날 나는 강의가 끝날 때까지 <삶과 믿음의 교실>이란 책을 읽었고, '아, 왜 나는 이런 분을 스승으로 만나지 못했는가?', '내가 배우는 이 학교에는 이런 분이 스승으로 없는가?' 하고 주먹으로 벽을 치면서 속으로 울었습니다. 그리고는 헌책방으로 갔습니다. 헌책방으로 가면서 다짐했습니다.

'이제부터 이 학교, 이 학과목 교수 가운데는 나한테 스승이라 할 만한 사람이 없다. 나한테 F를 줄 테면 줘라. 당신들은 나한테 F를 줄 수는 있겠지만 내 마음을 살찌우는 슬기와 감동은 주지 못하겠지. 나는 A도 싫고 B도 싫고 어떤 점수도 싫다. 내가 바라는 것은 내 가슴을 울리고, 내가 하려는 이 공부를 온몸 불태우며 할 수 있는 용기를 심어 주는 일이다. 그런 용기를 심어 줄 수 없는 당신들은 앞으로는 보고 싶지 않다'


.. 국민학교와 중학교의 교직자들에게 바라는 것은 진학을 못하는 졸업생들이 시골에서 자리잡고 살아갈 수 있도록, 소득 증대를 위한 기술 교육보다 정신 교육에 더 힘써 주어야겠다. 현대 문명과 역사의 여러 문제와 공해 문제 같은 것을 깊이 있게 가르치고, 이제는 도시 사람들이 시골을 부러워 할 때가 오고 있다는 것과 무엇보다도 물질의 편리를 위해 살아가는 것이 인간의 목표일 수 없다는 것을 교육해야겠다 .. <104쪽>


<3> 기득권을 버리도록 해 준 용기

대학교 졸업장은 기득권을 얻는 보증수표입니다. 그 가운데 일류대학 졸업장은 훨씬 더 안정된 보증수표입니다. 그렇죠? 우리 사회에는 아직도 '대학교 안 다닌 사람'이 훨씬 많고, '대학교 문턱도 못 밟아 본 사람'이 아주 많습니다. 대학교에 가는 아이들보다 대학교에 안 가거나 못 가는 아이들이 훨씬 많은데도 '대학교 입학 문제와 정책'으로는 머리를 싸매고 애쓰면서, '대학교를 안 가고 사회에 나아가 일할 아이들 문제와 정책'에는 거의 눈길도 안 둡니다. 대입 제도를 올바르게 고친다고 교육 문제가 풀릴까요? 학벌 문제가 풀릴까요?

.. 시험점수로 매겨지는 인간 등급이 수, 우, 미, 양, 가의 다섯 계층이다. 이것이 지금까지 상대적으로 항상 일정한 비율의 수효를 각 계층마다 유지하도록 하여왔으니 어처구니없다. 여기서는 서로 도와 참을 배우고 깨닫도록 하는 인간스런 마음을 가지는 것이 제도적으로 배제되어 온 셈이다. 남이 실수를 하거나 잘못하는 것이 그대로 자기가 잘하는 것이 되어 버린다.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남을 깔아뭉개고 남의 위에 올라서는 자가 성공한다. 교육을 지도하는 사람도 실제 교육을 하는 사람도 가장 능사로 쓰는 수단이 아이들끼리 경쟁을 붙이는 일이다. 학교는 학교끼리, 학급은 학급끼리, 분단은 분단끼리, 개인은 개인끼리 경쟁이 되어 서로 다투어 비인간적 삶의 습성을 익히도록 했던 것이다 .. <94쪽>


1995년 4월 5일 집에서 나왔습니다. 집이라는 그늘을 떠나 학교 앞에 있는 신문사 지국에 들어갔습니다. 신문사 지국에서 먹고 자면서 신문을 돌려 제가 쓸 돈과 책값을 벌었습니다. 군대를 다녀온 뒤 보름만 집에서 쉰 뒤 다시 집을 나와 신문사 지국으로 돌아갔고 그 뒤로는 집에는 명절에만 갔습니다.

저한테는 집도 학교도 아무런 '스승'이 되어 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부모님이 저에게 바라는 일-안정되고 이름도 있는 대학교에서 공부하고 졸업장을 딴 뒤 안정된 일터에 들어가 안정된 품삯을 받으며 알맞게 좋은 연인 만나 장가가고 집 얻고 사는 일-은 저한테는 질색이기 때문입니다.

도대체 무엇이 '안정'이고 '행복'일까요? 우리 사회가 초∙중∙고등학교와 대학교까지 경쟁을 일삼고 점수로 사람 값어치를 매길 뿐 아니라, 참으로 중요한 일에는 두 눈을 감거나 등을 돌리는데 도대체 무엇이 안정이고 행복일까요?

이오덕 선생님은 <삶과 믿음의 교실>이란 책에서 <말콤 엑스>를 읽은 느낌을 적으면서 말콤 엑스가 했던 말 가운데 "나는 물론 쇼펜하우어, 칸트, 니체 등도 모두 읽었다. … 내가 그들을 존경하지 않는 이유는 그들이 별로 중요하지 않은 문제를 따지는 데 대부분의 시간을 소비한 것으로 나에게는 보이기 때문이다"란 말이 참 좋았다며 들어 보입니다.

저도 이 말이 참 좋습니다. 그래서 다짐을 했습니다. "별로 중요하지 않은 문제를 따지는 데 대부분의 시간을 소비"해야 하는 대학교는 그만두자고, 참으로 중요한 문제를 따지고 살피는 데 모든 시간을 쓰자고, 홀가분하게 살자고, '기득권을 얻는 보증수표' 따위는 집어치우자고 다짐했습니다.

새벽에 신문 돌리고 10대 일간지를 샅샅이 살피며 아침을 연 뒤, 신문사 지국 앞 대학교 도서관과 헌책방에 가서 제 머리를 살찌우는 책을 보는 일이야말로 제 자신을 가꾸는 가장 아름답고 훌륭한 길이라고 느꼈습니다.

▲ 이오덕 선생님이 돌아가실 때까지 일하고 주무시던 방에서. 이제는 선생님 흔적과 발자취를 좇아 뜻을 이어받는 일까지 하고 있습니다. 사람 사는 인연이라는 게... 알다가도 모르면서도 즐겁습니다.
ⓒ 최종규
<4> 열 해 뒤 다시 보는 <삶과 믿음의 교실>

대학교를 그만두자던 다짐을 하게 해 준 <삶과 믿음의 교실>을 만난 지 열 해가 지났습니다. 이 책은 언제 펼쳐 보고, 어느 쪽을 펼쳐 보아도 가슴 뭉클합니다.

.. 백성들이 무질서하다면 그 무질서의 원인은 백성들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다. 질서와 평화를 원하는 백성들에게 그 질서와 평화를 유지할 수 있도록 하게 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 <223쪽>


박정희 독재정권 때라 '누구 때문'인지는 낱낱이 못 밝혀 적은 듯합니다.

.. 쉽게 말하고 솔직하게 쓰는 것은 모든 사람들이 함께 갖는 재산인 말과 글을 일부 특권층으로부터 도로 찾아 모든 사람에게 돌려주게 하는 지극히 중요한 문화적 뜻을 갖는다. 언어의 민주화로 우리는 참된 민주사회의 실현을 꾀해야 한다. 쉬운 진리를 어렵게 만드는 것은 거기 속임수가 들어 있는 것이다 .. <226쪽>

이런 대목 하나하나가 지금 제 모습을 만들어 주었습니다. 번역가를 꿈꾸던 저를 우리말을 살리고 가꾸는 일을 하도록 이끌었습니다. '번역 공부를 하는 사람은 많지 않은가? 하지만 우리말을 살리고 가꾸는 사람은 얼마나 되나? 내가 우리말을 잘 살리고 가꾸면 번역을 하는 분들에게도 도움이 되어 훨씬 아름답고 좋은 일이 되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습니다.

마지막 말인 "쉬운 진리를 어렵게 만드는 것은 거기 속임수가 들어 있는 것이다"란 말을 늘 새기면서 제 자신을 다시 돌아봅니다. 제가 하는 말이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뭘 모르거'나 '사실을 숨기려는 나쁜 뜻'이 담긴 것임을 깨닫고 뉘우치고 있습니다. 그래서 더욱 힘을 낼 수 있습니다. 속임수가 없고, 모든 앎과 슬기를 나누려는 열린 마음으로 살아간다면 '굶어죽지는 않겠지?' 하고 생각하며, '적게 벌고 적게 쓰면서 살자'는 다짐도 이때 비로소 품었습니다.

앞으로 또 열 해쯤 뒤에 <삶과 믿음의 교실>이란 책을 다시 펼치고 싶습니다. 그때에도 지금 제 마음이 다소곳하게 이어지기를, 그래서 열 해 뒤에는 지금보다 더 반갑고 즐거운 모습으로 제가 살아갈 수 있도록 애쓰고 싶습니다.

삶과 믿음의 교실 - 이오덕 교육수상집

이오덕 지음, 고인돌(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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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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