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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시장 한 상회에서 마늘을 다듬고 있는 모습 한지형 마늘이 거의 출하가 끝난 요즘 농민들의 손길이 더욱 바빠지고 있다
마늘시장 한 상회에서 마늘을 다듬고 있는 모습한지형 마늘이 거의 출하가 끝난 요즘 농민들의 손길이 더욱 바빠지고 있다 ⓒ 오마이뉴스 이승욱
예로부터 경북 의성군 일대에서 나는 '의성마늘'은 그 맛과 향기가 좋기로 정평이 나 있다. 의성지역 다른 마을 중에서도 특히 군청 소재지인 의성읍 내에서 자동차로 10분 거리에 있는 '치선리'는 마늘재배 역사와 상품의 질에서도 우수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한지형 마늘(재래종)을 생산하는 의성지역 여느 마늘 농가라면 7월 중순을 넘기는 이 시기엔 농민들의 손길이 더욱 바빠진다. 이맘때면 밭에서 캐낸 마늘을 정성 들여 다듬고, 장에 내다 팔기 좋도록 상품의 질에 따라 나누고, 포기로 말리는 시기.

어느 농가로 머리를 기웃거리더라도 통나무를 이어 만든 마늘 창고 아래에 주저앉아 수백 포기의 마늘을 손질하는 모습은 만날 수 있다. 바빠지는 손길만큼 더위를 견디고 힘든 노동에 몰두하는 농민의 몸은 피곤하기만 하다. 하지만 지금까지 농민들은 피곤한 줄 몰랐다. 힘든 노동 끝에는 수확의 기쁨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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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로 '먹고사는' 농민...올해는 농사지을 맛이 안 난다

치선리 마을 주민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하지만 올해는 마늘로 '먹고사는' 농민들은 한없이 풀이 죽어 있다. 차라리 자연재해로, 그래서 팔아먹을 마늘이 없다면 '하늘의 뜻'이라 생각하고 조용히 받아들이겠건만, '믿었던' 정부에게 속아서 억울하게 당했다는 생각이 들 때면 도통 농사지을 맛이 나지 않는다.

"이건 완전히 농민들 기분 나쁘게 우롱했는기라. 농민들 자존심 생각은 아예 생각도 안 해뿌고. 그 전에 우루과이라운드간 뭔 가도 보소. 미리 말이라도 해주면 그래도 괜찮지. 농민들은 다 뒈져도 괜찮다 이런 심보야."

마늘 농사만 30년 가까이 지었다는 김종화 (48. 치선1리) 씨가 마늘 이야기가 나오자 기다렸기나 한 듯 '열변'을 토하기 시작했다. 쉼 없이 터져 나오는 그의 말에 분노가 배여 나왔다.

"이제 중국에서 마늘 들 온다 카니깐 도시사람들은 이제 마늘 사려고 오지도 않는기라. 농사를 잘 지도(지어도) 판로가 없어. 어느 대통령이든 선거 나오면 부채 갚아준다 뭐다 이런 소리 말고, 농사꾼이 농사 지 가지고 팔 궁리를 알켜줘야제. 농산물 가격 오르면 수입하기 바뿌고, 내려가면 대책이 없는기라."

김 씨는 "더 이상 말이 필요 없어. 정부 하는 짓 보면 우리보고 자폭하라는 것뿐이야"면서 답답한 마음을 풀어냈다. 김 씨의 하소연에 옆에 마늘을 다듬던 김 씨의 아내가 거든다. "조금만 더 있어 보소. 마늘 값 떨어지고 돈도 못 챙기면 연말에는 정신 없다카이. 이 농사 지(어) 갖고 농협 빚 여기저기 갚아야 하는데…."

"정부 하는 짓 보면 우리 보고 자폭하라는 것"

마늘을 말리기 위해 마늘창고에 걸쳐놓은 햇마늘 매매를 기다리고 있지만 농민들의 마음은 불안하기만 하다
마늘을 말리기 위해 마늘창고에 걸쳐놓은 햇마늘매매를 기다리고 있지만 농민들의 마음은 불안하기만 하다 ⓒ 오마이뉴스 이승욱
답답한 마음은 군청 직원들도 마찬가지이다. 농민들과 직접 대면해야 하는 이들로서도 불편한 마음은 감출 수가 없어 보인다. 의성군청 산업과 한 관계자는 우선 "정부 비축분이 거의 방출된 상태인데다 내년이 돼야 세이프가드가 소멸돼 올해 당장 마늘가격 하락으로 이어지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하면서도 "만에 하나 다른 요인으로 인해 90년대 말의 마늘파동이 재현된다면 마늘농사를 지어서 벼농사며 과수농사를 짓는 의성 지역의 농가에는 큰 타격을 입힐 수 있을 것"이라고 우려했다.

의성지역 마늘 농가는 대략 7000호로, 그 재배면적은 1640헥타르(ha)에 이른다. 또 이곳에서 생산되는 마늘량은 매년 14500톤 규모가 달한다. 난지형 마늘(외래종)에 비해 단위 면적당 생산량이 적어 마늘 생산량은 5%대(한지형 마늘 생산지역 중 22%차지)에 그치지만 재배규모로 따진다면 전국에서 6번째로 넓은 지역으로 분류된다.

의성군청 관계자에 따르면 이 지역에서 마늘재배가 한 해 농가소득에 미치는 영향은 20∼25% 정도라고 보고 있다. 하지만 문제는 마늘농사로 벌어들인 돈을 다른 경작물에 투자해야 된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마늘농가에 미치는 실질적인 영향은 80% 이상이라고 지적한다.

현지에서 직접 취재해본 결과, 중국산 마늘에 대한 긴급관세조치가 해제된다는 소식이 알려진 이후 아직은 마늘 가격의 급격한 하락은 없는 것으로 보인다. 지난 99년 중국산 마늘 수입이 최고조에 이르던 시기 1kg당 1000원 내외로 급격히 떨어졌던 것에서 2000년 긴급관세가 부과된 이후 차츰 마늘 가격이 회복세를 이루고 있었다.

지난해의 경우 한지형 마늘(난지형에 비해 단가가 다소 높음)은 상(上)품 기준 3000원 선에서 거래가 이루어졌고, 올해에는 3500원에서 3600원까지도 거래가 되는 등 99년 마늘파동 이전의 가격세가 회복되고 있었다. 또 현지 도매상인들에 따르면 최근 마늘사태 이후에도 마늘가격은 다소 주춤거려 500원 정도의 하락세를 보였을 뿐 '큰' 폭 하락은 없었다고 한다.

하지만 문제는 예년과는 달리 거래가 빈번하게 이뤄지지 않아 농민들의 불안감이 높아지고 있다는 데 있다. 특히 가격하락을 기대하는 소비심리가 형성되면서 도소매 상인들이 매입을 주저하고 있어 마늘 값 하락은 아무도 장담할 수 없는 상태에 있다.

현지 큰 폭 하락은 없지만, "상인들이 찾질 않는다"

치선2리 마늘농민 강승구(42)씨는 4000평 정도의 땅에 마늘농사만 20년 넘게 지어왔다. 하지만 올해처럼 한창 출하기인 시기에 외지인들의 발걸음이 뜸한 것은 처음이라면서 불안감을 감추지 못했다.

강씨는 "문제는 매매가 아예 안 된다는 기라. 예년에는 장에 나갈 필요도 없었어. 마늘농사 짓고 나면 서울에서, 대구에서 트럭 몰고 와서는 싣고 가기 바빴제. 상인들이 들어오면 판매하는 건 수월했다고. 근데 올해는 찾는 사람이 없어. 그러니깐 가격이 얼마 떨어졌는지는 사실 모르는 겨."

매매가 불안하다는 마음은 중간상인들이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지난 23일 의성읍내에 있는 '의성마늘시장'에는 평일이라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사람들의 발걸음이 뜸했다. 마늘시장에서 30년째 마늘 매매를 하고 있다는 '익화상회' 장태진(53) 사장은 농민들보다 더 원성을 높였다.

장 사장은 "중간상인들은 한창 출하기에 접어들면 1년 내내 팔 수 있는 물량을 확보해 저온 저장해 놓는다"면서 "하지만 가격이 불안한 가운데 누가 선뜻 마늘 매입을 할 수 있겠냐"고 말했다.

장 사장은 "게다가 투자해서 구입해놓은 마늘도 손해를 안 보려면 지금에라도 내다 팔아야 하는데 그러면 또 자연스럽게 가격이 내려가지 않겠냐"고 말했다.

옆에 있다 마늘 얘기가 나오기가 무섭게 장 사장의 아내는 손사래를 치고는 "메스컴에서 계속해서 마늘 값 떨어진다고 하니 모르는 사람들은 아예 공짜로 가져갈 생각밖에 안한다"고 거들었다.

한지형 마늘의 최대 집산지인 의성군 마늘시장 마늘 값의 급격한 하락은 없었지만, 농민들은 '매매가 거의 없다'며 예년과는 다르다고 입을 모았다.
한지형 마늘의 최대 집산지인 의성군 마늘시장마늘 값의 급격한 하락은 없었지만, 농민들은 '매매가 거의 없다'며 예년과는 다르다고 입을 모았다. ⓒ 오마이뉴스 이승욱
상인들의 움츠린 마음도 예년과는 다르다는 것이 농민들의 전언이다. 지금까지 마늘문제가 터지면 으레 농민들만의 문제로 '치부'해버리던 상인들도 최근에는 농민들의 편에 서 있다는 것.

'의성군농업경영연합회' 회원인 김해찬 (42. 의성읍 원당2리) 씨는 "예전에만 해도 농민들이 마늘 값 문제 때문에 데모를 하면 상인들은 장사에 방해된다면서 좋지 않은 시선을 바라봤다"면서 "하지만 최근에는 상인들도 점점 농민들만큼 불안한 마음을 보이고 있는 것 같다"고 전했다.

"최저가예시제, 사실상 농민들에겐 도움 안돼"

현재까지 마늘파동이 일어날 때마다 정부는 대책을 내고 있지만 실질적인 농가에 대한 도움으로 이어지고 있지는 못하다. 특히 농민들이 바라는 농산물 가격안정화에는 기여가 되지 못하고 있다.

현재 마늘수매는 농협에서 이루어지는 농협수매와 정부에서 '최저가예시제'와 같은 제도가 마련돼 있긴 하다. 최저가예시제는 각 지역에 따라 정부가 미리 책정한 최저가격에 따라 시중가격이 이보다 떨어지면 정부가 수매를 하는 제도. 그러나 문제는 모든 물량에 대한 보장이 이뤄지지 못하고 책정된 가격 또한 생산비에도 미치지 못한다는 것.

'의성군농민회' 회원인 김광원 (44. 봉양면 분토리) 씨는 "작년의 경우에는 1kg당 1850원에서 정부의 최저가격이 정해졌지만 생산비에도 미치지 못하는 데다 생산량 전부를 매입하는 것이 아니라 지역별, 농가별로 할당량을 따로 두기 때문에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지난 22일 '전국농민회총연합회'(전농. 의장 정현찬)와 농민단체들은 서울에서 전국 각지의 마늘농민 등 3000여 명이 모인 가운데 농민대회를 가지고 즉각적인 행동에 나섰다. 그리고 다음달 2일에는 의성지역에서 벌어지는 군 단위 집회 중 최대 규모인 2만명 이상이 참가하는 대규모 농민대회를 준비중에 있다.

그러나 농민들이 단합된 목소리를 내는 데는 우려되는 점도 있다는 것이 관계자들의 이야기이다. 개별적인 원성과 분노는 높지만, 바쁜 농번기 시절에 애써 지은 농사도 포기할 수 없는 농민들의 마음도 있다는 것. 특히 점점 노령화돼 가는 농촌의 현실상 '대정부' 투쟁을 벌여나가면서 한 목소리를 내기도 어렵다는 것이 농민들의 현실이다.

농민들 중에서도 젊은 축에 속한다는 김해찬(42)씨는 "내가 40대 초반이지만 이곳에선 젊은 세대에 속한다. 40대가 10% 정도에 못 미치는데 한계도 있다. 나이 든 분들이 농사만 지을 줄 알지 데모나 이런 거 아시기나 하는가. 가격 떨어진다니 걱정만 하고 농사일 하는 것만 바쁜 형편"이라고 말했다.

"단순 의사표시 한계 왔다. 민란 일으키자는 말도 있을 정도"

ⓒ 오마이뉴스 이승욱
하지만 이후 가격의 대폭하락이 빚어지거나 내년 본격적인 중국산 마늘의 수입이 이뤄진다면 농민들도 가만히 있지만 못할 것이라는 이야기도 나왔다.

의성군농민회 김선환 회장은 "일각에서는 이미 농민들의 단순한 의사표시만으로는 농업문제에 대한 본질이 해결되지 않는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면서 "솔직한 말로 '민란'을 일으켜야 한다는 분노의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고 말했다.

김 회장은 "아직 농민들의 피해가 피부에 와 닿지 않아 조용한 구석도 있지만 농민들의 실질적인 피해가 나타나면 농민들도 가만히 있지는 않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농민들의 분노는 생산한 농산물의 가격이 떨어져 손해를 본다는 '이해타산'을 따지는 마음과는 다르다. 강렬한 햇볕을 받으며 굵은 땀방울을 흘리면서도, 일한 만큼 보람은 느낄 것이라는 단순한 삶의 이치가 무너지고 있었다. 누군가는 해야할 일을 자신들이 하고 있다는 마지막 '자존심'마저 걷어차이면서 사기가 땅에 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이는 단지 마늘농가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아들들 대학 보내기가 더욱 암담해졌다'는 치선2리 이장 김종면 (47) 씨는 더 이상 참기만 해서는 안 된다며 말문을 열었다. "농민대회 가보니깐 국회의원은 자기들은 (중국산 세이프가드 해제 약속을) 몰랐다고 하데. 그래도 할 말은 있는겨. 그래도 그거 몰랐으면 자기들 직무유기 아니여. 다들 똑같은 놈들이제"라면서 "농민들이 말 안하고 있으면 그 사람들은 '그 놈들 아직 살만하구만'할 겨. 이젠 농민들도 늙은 기나 젊은 기나 한마음이 돼야 하는 겨."

"우리들 떠나면 도시사람들은 살 것 같아?"

딴 농사를 지어볼 생각을 안 했냐는 질문에 김 씨는 농촌의 현실을 반영이라도 하듯 다음과 같이 말했다. "다른 사람들이 이렇게 이야기도 하제. 마늘농사 안되면 딴 농사 지으면 안되냐고. 평생 지어 먹은 게 마늘농산데 딴 걸 우예 짓노. 그라고 백 번 양보해서 딴 농사를 지어 보자고. 마늘이 그러면 채소는 안 그럴 거 같애. 소 먹이면 안 그럴 것 같냐고. 마늘이 안돼 가지고 배추를 심으면 배추 값은 우야는가 말이지."

마늘을 다듬는 '메마른' 농민의 손
마늘을 다듬는 '메마른' 농민의 손 ⓒ 오마이뉴스 이승욱
산업화 사회에서 고부가가치 상품에 대한 가치를 따지는 것은 엄연한 현실이다. 그러나 정작 우리는 지금까지 '고부가가치' 정의를 협소하게 생각하고는 있지 않았는지. 기울어져가는 여름 해가 '뉘엿뉘엿' 사라지면서 의성들판이 '불'타 오르고 있었다. 저녁이 다가오며 어둑해지는 농촌을 뒤로한 채 돌아오는 버스에서 한 농민의 말이 되새겨진다.

"도시사람들은 먹는 거 없으면 살 것 같아? 농민들 다 떠나고 먹을 거 수입해서 먹으면 살 수 있을 것 같냐고? 그때면 생존권은 없는 겨. 그게 미사일보다도 더 무서워. 요즘 사람들 껍데기는 국산인데 속은 다 외제라니깐. 우리 건 우리가 지켜야지 그래야 우리가 사는 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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