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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지난 8월 17일부터 현재까지 기자가 국악 원로이신 해금 연주자 일초(一超) 김종희(87) 선생님과 가야금 연주자 동은(桐隱) 이창규(87) 선생님을 취재한 르포르타주 마지막 이야기입니다. <편집자주>
80년 지기의 우정

▲ 이왕직 아악부원 4기생 졸업사진 - 왼쪽 동그라미로 표시된 학생이 김종희 선생, 오른쪽은 이창규 선생.
ⓒ 김교성 제공
선생의 동기 18명 중에는 재학 중 요절한 친구를 포함 대금의 명인 김성진, 거문고의 장사훈, 피리의 김준현 등 쟁쟁한 동기 분들이 모두 작고하셨다. 세월이 가면서 이제는 이창규 선생과 김종희 선생 두 분만 남았다. 두 분의 인연은 보통학교 때부터 이어져 어언 80년이 된다. 여든 일곱의 인생에서 80년 지기의 친구. 이 오랜 우정은 마치 현대판 백아와 종자기를 연상케 했다.

▲ 졸업사진 이후 7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다. 김종희 선생(오른쪽)과 이창규 선생(왼쪽) - 두 분 사진을 찍을 때 김종희 선생은 슬그머니 이창규 선생의 손을 잡았다.
ⓒ 심은식
두 분은 지난 2003년 서울음반을 통해 음반을 내기도 했다. '영산회상' 전곡을 연주하는 중간에 도드리 등의 변주곡을 포함한 '가진회상' 음반이 그것으로 50분이 넘는 전곡을 중간에 멈춤 없이 단 한 번의 연주로 녹음했다고 한다.

해금과 가야금만으로 이루어진 연주로 소박하면서도 고졸한 맛이 느껴졌다. 비록 전성기 시절의 연주가 아니고 녹음 상태가 최적화 되지는 않았지만 80년이 넘는 시간을 함께 한 두 노 악사의 음악적 신뢰와 삶이 녹아 있어 듣고 있으니 절로 숙연함과 감동이 느껴졌다.

▲ 김종희 이창규 두 원로가 전해주는 풍류음악 가진회상 - 국악방송 새음원시리즈 9번째 앨범으로 현재는 품절되어 구하기가 어려웠다.
ⓒ 심은식
우리는 우리의 전통에 대해 얼마나 가난한가

국악이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돌아보면 가슴 졸이는 순간이 여러 번 있었다. 조선의 몰락, 해방 후의 아악부의 해체, 6·25 등등이 그렇다.

지난번 기사에서 김종희 선생이 언급한 것처럼 조선의 몰락 후 총독부에서는 문묘제례악, 종묘제례악 등 조선 왕실의 음악에 대한 존속처분에 대한 조사를 일본 궁내성의 다나베 히사오(田邊尙雄)에게 위임했다. 그는 다행히 우리 음악의 가치를 높이 사 적극적으로 보존할 것을 요청했고 실질적 지원도 확대했다.

하지만 일제가 몰락한 후 국악을 담당하는 기관이 해체되자 음악인들은 다시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월북 작곡가인 김순남씨가 보다 못해 미군 군악대 대장을 데려다 음악을 들려주고 보급품이던 레이션 박스 교환권을 지원받은 일은 서글프기까지 하다.

이처럼 명맥이 끊길 뻔했던 우리 음악이 겨우겨우 유지된 것이 모두 타국 사람들의 도움에 많은 부분 의지했다는 것은 참으로 부끄럽고 씁쓸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여러 우여곡절 끝에 국악이라는 이름으로 우리 음악은 오늘에 이르고 있지만 이에 대한 일반인들의 인식과 애정은 그리 높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 자료를 조사하러 나온 학생에게 곡에 대한 설명을 해주는 이창규 선생.
ⓒ 심은식
지금도 일본대학에서 음악 관련 박사 과정을 다니는 야마모토 하나꼬(山本花子)라는 일본인은 방학 때면 비행기를 타고와 이창규 선생에게 가야금을 배워갈 정도로 적극적이다. 반면 국내에서는 몇몇 연구자들이 이따금 선생의 연주 녹취를 하고 있을 뿐 선생의 연주가 정식 음반으로 남아 있는 것은 아쉽게도 앞서 말한 한 장뿐이다. 이런 현실은 중요무형문화제 제1호로 지정된 김종희 선생의 경우도 별반 다르지 않다.

국악의 이런 현실에 대해 묻자 선생은 국악이라는 단어 자체에 의문을 제기하기도 했다.

"당시에는 국악이라는 말이 없었어요. 문묘제례악, 종묘제례악 등 정악이 있고 산조, 판소리 등으로 구분해서 불렀어요. 사람들이 모여도 정악을 하는 사람이 대청에 앉으면 그 외의 사람들은 그 아래에 앉고는 했어요. 폐습입니다만 당시에는 그런 일들이 있었어요."

▲ 취재를 마치고 나오는 길에 연습실 입구에 놓여있던 김종희 선생의 지팡이가 유난한 쓸쓸함으로 눈길을 끌었다.
ⓒ 심은식
폐습이라고 했지만 평생 정악 외에는 관심을 두지 않은 선생의 정악에 대한 자부심과 애착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었다. 취재 도중 두 분 선생은 우리 음악을 오히려 우리 나라 사람들이 아낄 줄 모르는 것에 안타까움을 나타냈다.

돌이켜 보면 우리는 얼마나 우리의 전통에 대해 가난한가. 선생은 우리 것이기 때문에 우리 음악을 좋아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이 좋은 음악이기 때문에 보다 많은 사람들이 듣고 이해해 주기를 바랐다. 한국에 가면 남대문 시장이나 이태원에 가보라는 말이 아니라, 꼭 한국의 전통음악을 들어보라는 말이 나오길 바라는 것은 지나친 욕심일까? 박물관이나 고궁에서 우리 음악을 자연스럽게 듣는 일은 지금도 무리한 요구일까?

취재를 마치고 나오는 길에 연습실 입구에 놓여 있던 김종희 선생의 지팡이가 유난한 쓸쓸함으로 눈길을 끌었던 것은 그런 이유들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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