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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청률이라는 마력의 수치가 높으면 모든 것이 정당화 되는 법이다. <굳세어라 금순아>도 이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드라마였다. 여기에 얼치기 페미니즘을 가미하면 그야말로 무적이 된다.

이쯤에서 칭찬 일색인 <굳세어라 금순아>의 긍정적인 면을 뒤집어 볼 필요도 있다. <장밋빛 인생>의 맹순이에게 처럼 금순이에게는 도저히 한 사람에게 일어날 수 없는 일들이 줄을 이어 생겨났다. 그러한 일들은 오히려 드라마의 상투적 설정, 편견적 상식을 재확인하거나 강화시키는 역할을 톡톡하게 했다. 또한 이 드라마는 철저하게 기성세대가 바라보는 세계관을 철저하게 투영했고, 그들이 원하는 인물형으로 21세기형 억순이, 금순이를 만들어냈다.

혼전 임신을 하고 남편이 죽자, 그 집에 살러 들어가는 현실적인 인물이 있을까 의문이다. 가부장적인, 과거 속 드라마상의 인물이 재탄생되었다. 바람직해 보이지도 않는다. 그것은 주체의 포기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점 때문인지 드라마는 처음부터 촌스런 금순이의 변신과 재혼의 설정으로 비난을 피해가는 솜씨를 보여준다.

흔히 금순이의 인기를 '캐릭터, 가족애, 밝고 건강한 표현법'에서 찾는다. 한혜진의 밝고 건강한 캐릭터를 우선으로 친다. 그러나 이러한 캐릭터는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한 인물형이다. 무엇보다 어떤 일들이 있어도 가족애를 지켜내는 밝고 건강한 며느리, 아내, 어머니라는 시선은 과연 누구의 것인지 생각하게 한다.

<굳세어라 금순아>는 가족주의, 삼각관계, 출생의 비밀, 신데렐라 콤플렉스의 변형이라는 한국 드라마의 부정적인 측면들을 밝고 건강한 한혜진의 캐릭터나 핏줄의식, 고부간의 갈등이라는 양념을 쳐 주목만을 끌었다.

상투적인, 휘성이와 성란을 둘러싼 핏줄에 대한 집착은 의문을 더하게 한다. 휘성이를 누가 키울 것인가도 그랬지만, 이혼 전력과 아이가 있던 성란이 자신의 아들을 1년 동안만 데려다 키우고 싶다고 하자 시어머니는 이혼을 요구했다. 성란은 자신의 아들도 소중하기 때문에 이혼을 감당하려 한다.

핏줄 의식의 문제점도 그렇지만 이혼이 무슨 밥 먹듯이 되는 일인가. 툭하면 핏줄로 이혼을 들먹이고, 그것을 실행하고자 한다.

과연 21세기를 살아가고 있는 한국인들은 핏줄에 물불 안 가리는 고리타분한 사람들인가? 더구나 수많은 이혼이 악당같은 못된 사람들 때문에 분명 존재하는데도, 이를 무척 덮으려 한 드라마가 <굳세어라 금순아>다. 가족애와 건강한 표현법을 찾았다는 칭찬은 허구적이다. 비현실적인 인물들, 모두들 선한 인물들만 등장한다는 점 때문이다. 철저하게 개인의 권리, 여성의 주체적인 측면보다는 가족주의로 회귀하고 매몰되었다.

이러한 가족주의의 회귀와 매몰은 애초에 예견되었다. 신장을 떼어주는 금순이를 보면 매우 바람직한 인물형을 보여준다. 과연 그럴까? 그러한 장면이 방영될 때 수많은 이 땅의 딸, 며느리가 보이지 않는, 혹은 노골적으로 보이는 압력에 시달린다. "저렇게 떼어주는 착한 애도 있는데 우리 애는…"하면서 말이다.

더구나 밝고 건강하고 착한 사람은 의사와 결혼해도 문제가 없다. 결국 신데렐라도 착하고 건강한 사람이었다. 언제나 변형된 신데렐라 드라마만 존재했다고 할 때 <굳세어라 금순아>도 이 틀에서 벗어날 수 없다. 교묘하게 합리화 될 뿐이다.

한 가지 더! 당당한 커리어 우먼 성란이 주인공이 아니라 결국에는 순종적인 어쩌면 처세를 잘 해내가는 영악한 금순이가 주인공이라는 사실이다.

시청률 확보에서는 성공할 수 있었는지 모르지만 한국 드라마의 역사에서 과연 무엇을 남겼을까? 편견적 상식에 의지해 허구적인, 드라마 상에서만 존재하는 가치관과 갈등구도라는 한국 드라마의 고질적인 한계를 드러냈을 뿐이다. 다만, 밝고 경쾌하고 활달한 억순이의 현실같은 비현실적인 명랑 결혼 생활기 쯤이다. 교훈도 있어 보인다.

"어떠한 일이 있어도 밝고 착하게 살아라! 그럼 결혼도 다시 좋은 직업의 남자와 해 고생도 쫑일 것이다."

덧붙이는 글 | gonews에 보낸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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