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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쇄원을 지키는 종손 양재영씨. '힘들어도 계속 소쇄원을 지켜달라'는 당부에 대답 대신 피곤하게 웃는다.
소쇄원을 지키는 종손 양재영씨. '힘들어도 계속 소쇄원을 지켜달라'는 당부에 대답 대신 피곤하게 웃는다. ⓒ 곽교신
"어머님께서 정말 광풍각에서 몸을 푸셨어요?"

오랫만에 만난 양재영(43)씨에게 던진 첫 질문은 남이 듣기엔 다소 엉뚱한 것이었으나 실은 서울서부터 준비한 질문이었다. 그는 조선 중종 때 현재의 담양군 남면 지곡리에 소쇄원을 일으킨 양산보의 15대 종손이다.

광주항쟁 당시 전남 도청 시민군이었던 그는 앞니 전체가 없다. 형편이 닿지 않아 치과 임플란트 치료는 엄두를 내지 못하면서도 '보상금'이라는 말의 뜻이 싫어 여지껏 돈을 타지 않았을 만큼 양산보의 대쪽 고집을 똑 닮았다.

오로지 종손의 사명감으로 사생활을 포기하고 25년째 젊음을 소쇄원에 바쳐 선조의 원림을 지키는 그의 대물림 고집도 이젠 왠지 지쳐 보인다. 그의 지친 모습은 현재 소쇄원의 지친 모습이기도 하다. 이렇게 '밥 먹고 살아가야 하는' 현실은 대쪽 고집도 잘라내는 예리한 칼날이다. 우리가 소쇄원의 풍광에 취해 마음 놓고 완상(玩賞)만 하여도 좋을 만큼 소쇄원은 건강한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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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옛날 정자에서 '가사'만 읊었을까


정말 광풍각에서 몸을 푸셨어요?

광풍각은 원림 소쇄원의 조경 정신을 가장 잘 느낄 수 있는 위치에 세워진, 소쇄원에선 핵심이 되는 건물이다. 우리에겐 소중한 문화유산인 광풍각이 자신에겐 산실(産室)이라는 양재영씨의 말을 연전에 듣고는, 문화재가 아닌 양산보 이래의 일상 생활 공간이었던 소쇄원을 생각하며 느낌이 새로웠다.

<소쇄원도>의 오곡문부터 광풍각까지의 부분도. 계류와 폭포, 두 개의 연못, 트인 담장, 매란국죽송(梅蘭菊竹松)을 기본으로 22종의 꽃나무를 심은 화단(梅臺), 악기를 타고 바둑을 두는 사람들 등 한참 들여다봐도 지루하지 않다. 영조31년(1775)에 제작된 목판은 1986년에 광풍각에서 도난되어 대신 인쇄본이 그 자리에 걸려 있다.
<소쇄원도>의 오곡문부터 광풍각까지의 부분도. 계류와 폭포, 두 개의 연못, 트인 담장, 매란국죽송(梅蘭菊竹松)을 기본으로 22종의 꽃나무를 심은 화단(梅臺), 악기를 타고 바둑을 두는 사람들 등 한참 들여다봐도 지루하지 않다. 영조31년(1775)에 제작된 목판은 1986년에 광풍각에서 도난되어 대신 인쇄본이 그 자리에 걸려 있다.
"광풍각이 산실로 쓰였다더라"고 관련 학문을 전공하는 모 교수에게 얘길했더니, "광풍각은 남성 전용 접대 공간인 사랑방에 해당하는 곳인데 어떻게 거기서 남우세스럽게 여자가 몸을 풀겠냐"며 말이 안된다며 일거에 무시하여 대화를 잇지 못했던 기억에 양씨에게 엉뚱한 확인성 첫 질문을 던지게 된 것이다.

양씨는 "여기(광풍각)가 몸풀기엔 그만이에요. 장작을 넉넉히 때면 뜨끈뜨끈허니 얼마나 좋은데..."라며 "광풍각은 우리 집(소쇄원)에 있는 방 중의 하나였다"며 내 집의 방 하나가 자신의 산실(産室)인 것이 왜 이상하냐는 투다. 하긴 조선조 중종 이래 소쇄원은 제주 양씨 문중의 사사로운 공간이었으니, 내 집의 방을 사랑방으로 썼건 산실로 썼건 참견하는 것이 이상하긴 하다.

소쇄원은 남의 집이다

소쇄원 소유 구조의 아쉬운 현실

현재 소쇄원은 제주 양씨 문중 41명의 공동 명의로 등기가 되어 있습니다. 1915년에 소쇄원을 친일파에 강탈 당했다가 1925년에 되찾은 일이 있었는데, 원림을 되찾은 그 해에 문중의 합의에 따라 문중 여러 사람 공동 명의로 해놓은 것입니다. 고의든 실수든 다시는 소쇄원이 남의 손에 넘어가는 일이 없게 하려는 양씨 문중의 굳은 의지였습니다.

이것이 오늘날에는 복잡한 연고권 주장으로 문중 의견 통일에 결정적인 방해 요소가 되면서 문화재청 및 담양군의 정책 수립에 큰 부담을 주고 있습니다.

참으로 훌륭한 선조를 모신 집안답게 제주 양씨 문중이 지혜를 모아, 공동명의 등기의 본래 참 뜻이 "절대로 남에게 팔지 말라"는 양산보 어른의 추상 같은 유언을 지키려는 국권상실기의 비장한 조치였음을 문중에서 상기하셔서, 소쇄원이 온 국민이 아끼는 보석같은 원림으로 더욱 빛나게 되기를 제주 양씨 문중 제위께 간절히 바랍니다.
1983년 국가문화재(사적)로 지정된 소쇄원은 문화재보호법의 통제를 받지만 민법상으론 사유재산, 즉 우리로선 '남의 집'이다. 개인 집에 문화유산으로서의 가치가 있다고 많은 사람들이 다녀가니 보이게 안 보이게 비용이 날 것이다. 하지만 매일 소쇄원을 쓸고 닦을 경상 유지비가 지원되는 건 아니다. 문화재청 또는 담양군에서 빗자루 값이라도 지원되는 것은 없다.

사람들이 다녀가며 수시로 발생하는 뒤치닥거리는 모두 양재영씨의 몫이다. 개인의 집인 소쇄원이 사적(史跡)으로 지정되어 공공성을 지니면서 구경오겠단 사람들을 막을 수는 없으니, 공공물이 되면서 발생하는 부담과 불편은 어떤 형식으로든 공공비용으로 지원되어야 마땅할 것이다. 어찌되었건 소쇄원은 엄연히 남의 집이다.

소쇄원은 올 3월부터 입장료(어른 1000원, 대학생 800원, 중고생 500원, 초등생 200원)를 받고 있다. 최소한의 경상비를 확보하려는 입장료 징수는 안식년제 도입과 함께 오래 전부터 논의가 있었던 일이다.

징수 자체가 불법은 아니지만 문화재청, 담양군, 양씨 문중이 의견을 통일한 후 징수하는 것이 아니어서 현실적 필요성에도 불구하고 돈을 내는 이나 받는 이나 양쪽 모두 개운하지가 않다.

이런 형편에 적지 않은 수익을 내는 소쇄원 입구 주차장을 공개 입찰로 관변 단체에 위탁 운영 시킨 담양군의 조치는 아쉬운 점이 많다. 위탁관리 계약 기간(1년)이 끝나면 주차장 운영권을 환수하여 주차료와 입장료를 통합 징수하고 수익은 소쇄원 관리에 활용하겠다니 그나마 다행이다.

'남의 집 소쇄원'을 들어가는 입장객들의 관람 자세는 각양각색이어서 양씨는 소쇄원을 성실히 관리한 대가로 흔한 표창장을 받는 대신 '폭력 전과 2범'의 딱지만 얻었다. 무례한 관람객을 제지하다가 "니가 뭔데 남 노는데 끼어드냐"는 항의에 감정을 못이기고 손이 올라가 생긴 일들이다.

사법당국에서는 울타리를 쳐서 사유 공간임을 분명히 밝혀야 상대방을 주거침입으로 처벌할 수 있다고 하나, 문화재 지정구역(일부는 보호구역)인 소쇄원에 울타리를 치는 것은 문화재청에서 까다로운 사전 허가를 얻어야 가능한 일이다. 더구나 담장이 없는 개방형 원림으로 조성된 소쇄원의 경우 현실적으로도 타당치 않은 일이다.

절대로 잊지 말아야 할 소쇄원 정신

소쇄원은 담양 주변에 산재한 많은 누정(樓亭) 중에서도 그 의미가 각별하다. 대부분의 정자 원림이 저마다 은둔 처소를 표방하고 있으나, 은둔을 표방했다가도 기회만 되면 다시 정계로 나가곤 했으니 순수한 의미에서의 은둔은 아니었다.

송강 정철이 강원도 관찰사를 제수받자 '어와 셩은이야 가디록 망극하다 / 아!!! 임금의 은혜는 정말로 끝이 없도다'고 감격하며 임지로 부임하는 소회를 읊은 것이 가사 <관동별곡>이다. 오늘날 썼다면 "오! 예!!"가 들어갔을지도 모르겠다. 구구절절마다 임지로 떠나는 송강의 들뜬 마음이 노골적이어서, 이제나 저제나 벼슬 내려오기만 기다린 사람이 아닌가 여겨지니 은둔은 온 데 간 데가 없다.

관동별곡 서두에 적힌 대로 '강호애 병이 깁퍼 듁님의 누엇더니/ 자연을 사랑함이 병(病)과도 같아 대숲에 (은둔하고)사는 데'는 문학적 은둔이지 실제는 대나무 숲으로 '대기 발령'을 받은 것은 아닌지.

담긴 뜻이 지극히 심오한 오곡문 아래는 물놀이터 취급을 받고 있으나 소쇄원은 이를 제지하지 못한다. 이 장면은 대중에게 잘못 인식된 소쇄원을 상징적으로 말한다.
담긴 뜻이 지극히 심오한 오곡문 아래는 물놀이터 취급을 받고 있으나 소쇄원은 이를 제지하지 못한다. 이 장면은 대중에게 잘못 인식된 소쇄원을 상징적으로 말한다. ⓒ 곽교신
그러나 양산보의 은둔은 뜻이 달랐다. 기묘사화로 사약을 받은 스승 조광조의 장례를 치르고 향리인 지곡리(지금의 소쇄원 자리)에 들어온 17살 이후 평생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다. 기묘사화는 양산보가 과거 급제한 그 해에 일어났으니 그는 평생 제대로 된 벼슬 맛을 못 본 셈이다. 고기도 먹어본 사람이 찾는다고 권력의 맛을 못 봤기에 은둔의 지조를 평생 지킬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고 하면 양산보 할아버지의 높은 뜻을 능멸하는 불손한 일이겠다.

이렇듯 은둔의 뜻이 부근의 정자 원림과 원천적으로 다른 소쇄원은 원림 조성 동기부터 대쪽같은 선비 정신의 산물이었지 이른바 '놀자고 지은 정자'가 아니다. 이 대쪽 정신은 그의 유언에서 절정에 이르니 이 명유언은 그대로 소쇄원 조경 정신의 전부요 소쇄원 방문 때마다 절대로 잊으면 안되는 대명제이다.

(소쇄원을)절대로 남에게 팔지 말라. 계곡 구석구석마다 내 손 발 안닿은 곳이 없으니 돌 하나라도 상하게 하지 말라. (소쇄원의 참뜻을 모르는)우매한 후손에게는 물려주지도 말라.

이제 소쇄원이 온 국민이 사랑하는 원림이 된 마당에 이 유언은 비단 제주 양씨 후손에게만 해당하는 유언이 아니게 되었다. 소쇄원이 눈과 귀로만 완상하는 원림이 아니라 마음으로 생각하며 자신을 수양하는 원림임을 온 국민에게 고한 유언이 된 셈이다.

이 시대 우리는 소쇄처사 양산보(瀟灑處士 梁山甫)가 유언으로 당부한 깊은 뜻을 제대로 기억하며 소쇄원을 드나드는 것일까. 불손하게도 양산보 어른의 유언 끝 부분을 기자는 감히 다음과 같이 바꿔서 새겨 듣고 싶다.

(소쇄원의 참뜻을 모르는) 우매한 후손에게는 입장을 허락하지 말라.

덧붙이는 글 | 담양 주변 정자 원림 중에 내재적 외형적 뜻이 특별한 소쇄원을 '감성적 완상(玩賞)'의 측면에서 보며 <그래, 나 무식해! 소쇄원 모르거든?>이란 전편으로, '이성적 유지 관리'라는 측면에서 보며 <어찌되었건 소쇄원은 엄연히 남의 집>이라는 후편의 기사로 각각 꾸몄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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