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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여수를 떠난 해가 1990년입니다. 스무살 서울로 와서 학교를 다니고, 결혼을 했고, 또 지금은 직장을 다니고 있습니다. 여수에서 살던 날과 서울 생활 날짜가 얼추 비슷해져 갑니다. 제가 여수에 내려가는 날은 1년에 많아야 서너 번입니다. 올 여름 지난 14일부터 16일까지 제가 고향을 찾은 것도 아주 특별한 경우입니다.

그런데도 전 고향을 잊지 못하고 삽니다. 아니, 정확히는 여수에 얽매여 살고 있습니다. 왜 그런지 곰곰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소중한 사람과 기억들이 그대로 묻어 있기 때문인가 봅니다. 여수에는 어릴적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습니다. 그건 저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고향의 모습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머니는 30년 넘게 고향집을 지키고 계십니다.
어머니는 30년 넘게 고향집을 지키고 계십니다. ⓒ 김용국
고향집은 30년 넘게 그대로입니다. 그 세월 동안 시장에서 일을 하시는 어머니도, 고기잡이를 하시는 아버지도 여전히 노동에 묻혀 살고 계십니다. 고향집은 태풍이나 홍수가 닥치면 방 안까지 물에 잠기는 경우가 많습니다. 거의 한 해 걸러 한 번씩 물난리를 겪고도 부모님은 꿈쩍도 않으십니다. 이사를 가라는 아들들의 성화에도 "어딜 간들 얼마나 편하겠냐. 그저 여기서 살다 가야지"라고 하실 뿐입니다.

제가 다섯 살 때부터 살던 집이니 사실은 저도 어지간히 정이 들었습니다. 어릴 적 학교를 마치고 돌아올 때, 스무살 언저리에 군대 휴가를 나왔을 때, 그리고 가정을 꾸린 지금도 저를 어김없이 반갑게 맞아준 건 고향집과 어머니의 환한 웃음입니다.

아침밥상에 올라온 전어회무침. 역시 어머니의 손맛이 최고입니다.
아침밥상에 올라온 전어회무침. 역시 어머니의 손맛이 최고입니다. ⓒ 김용국
고향을 찾은 다음날 어머니는 새벽 시장에 다녀오셨습니다. 서울 생활하는 아들을 생각하느라 어머니는 아침 밥상에 유난히 해산물을 많이 올리셨습니다. 병어, 갈치구이에 장어탕도 있지만 제일 눈에 띄는 건 전어회 무침이었습니다. 어머니의 손맛 때문인지 회가 입에서 살살 녹는 것만 같습니다. 몇 년만에 먹어보는 맛인지 모르겠습니다. 여수에선 흔하디 흔한 전어회가 제게 이렇게 맛있는 음식이 될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평생 바다와 싸워 오신 아버지의 얼굴에 주름살이 깊어만 갑니다.
평생 바다와 싸워 오신 아버지의 얼굴에 주름살이 깊어만 갑니다. ⓒ 김용국
그런데, 식사를 하시던 아버지의 표정에 힘든 모습이 역력합니다. 주름살도 깊어만 갑니다. 세월은 못 속인다더니 언제까지 건강하실 것만 같던 아버지도 이젠 쉬실 때가 되셨나 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젊은 시절부터 '뱃사람'이었던 아버지는 40년이 넘는 세월을 바다와 함께 하고 계십니다. 올해만, 올해만 하던 것이 환갑을 훌쩍 넘어 칠순을 바라보는 연세가 되신 아버지. 요즘도 아버지는 멸치잡이로 새벽에 나가셔서 밤 12시가 되어야 돌아오신답니다.

"아버지, 이제 일 그만하셔야죠."
"편한 소리 마라. 우리 내외 입에 풀칠이라도 해야지."
"......"
저는 아버지께 생활비를 보내드리겠다는 말씀을 감히 드리지 못해서 죄송할 따름이었습니다.

아들 김준호와 함께 제가 다니던 초등학교에 왔습니다. 27년 전에 저도 저랬을까 싶습니다.
아들 김준호와 함께 제가 다니던 초등학교에 왔습니다. 27년 전에 저도 저랬을까 싶습니다. ⓒ 김용국
식사를 마친 후 아들 준호의 손을 잡고 제가 다니던 초등학교를 찾아가 봤습니다. 이곳에 와 본 지도 20년은 족히 된 것 같습니다. 학교는 건물만 몇 개 손보았을 뿐 예전 그대로입니다.

운동장에서 신나게 뛰어 놀고 있는 준호를 보니 27년 전 제 모습이 저랬을까 싶습니다. 그 순간 제가 초등학생 학부형이라는 사실이 믿어지질 않습니다. "동무들아, 놀자!"고 하면서 이름을 하나씩 부르면 친구들이 금방이라도 뛰쳐나올 것만 같습니다. 다들 어떻게 살고 있는지 궁금해졌습니다.

그래서 저녁에 고향에 남아 있는 친구 몇 명을 만났습니다. 이제는 가장이 되어 버린 그들과 철부지적 싸우던 얘기, 차비를 까먹고 학교까지 걸어다니던 얘기를 안주 삼아 술잔을 기울였습니다. 그렇게 맘이 편해질 수가 없습니다.

돌산공원에서 바라본 돌산대교.
돌산공원에서 바라본 돌산대교. ⓒ 김용국
서울로 올라오기 전날밤 저는 어머니와 아들 준호와 함께 돌산공원을 찾았습니다. 돌산공원은 여수에서 돌산대교를 지나면 언덕배기에 세워진 공원입니다. 야경이 멋있어서 시민들이 자주 찾는 곳입니다. 우리는 돛자리를 깔고 누워서 별을 바라보았습니다.

"준호야, 별 오랜만에 보지? 저기가 북두칠성인가 보다."
"아빠, 어디? 난 잘 안 보이는데."
"아빠 손가락 봐봐. 하나, 둘, 셋... 별이 일곱 개지?"

준호는 별을 보며 잠이 들었습니다. "어이구 시원하다. 아들 덕에 이렇게 편히 쉬는구나"하시던 어머니도 말씀이 없으신 걸 보니 피곤해서 눈을 붙이셨나 봅니다. 밤 12시가 되었는데도 멸치잡이 나가신 아버지는 아직도 배에 계십니다.

이 밤이 지나면 저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어머니, 아버지도 아들을 다시 만날 날을 기대하며 고된 노동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실 겁니다. 어쨌거나 오늘은 새벽까지 서울에서 못해 본 별구경을 실컷 하고 싶습니다. 밤바다가 그렇게 시원할 수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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