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다목리 부근에서 훈련 중인 군인들
다목리 부근에서 훈련 중인 군인들 ⓒ 최삼경
그 중 우리네 인간사의 변화를 축약해 보자면, 먼저 지난 유월 한 부대에서 수류탄 투척으로 인한 인명피해를 냈던 사고와 인격을 말살하는 엽기적 사건들로 점철됐던 군부대, 병영 문화의 변화에 주목할 수 있겠다. 이것은 우리 사회의 가장 완고한 군 조직에도 피할 수 없는 변화의 회오리가 예고됐다는 점에서 의미를 가질 듯 하다.

특히나 분단의 현실적 강박을 안고 살던 우리의 특수한 상황 하에서 '군'이라는 특수한 집단은 여전히 불가침적인 '우리 시대의 냉전 박물관'으로 고스란히 기능하고 있는 셈이다. 이런 점에서 국방색으로 상징되는 기존 이데올로기는 바뀌어가는 '주적' 개념과 관련하여 흔들리는 청춘의 차압딱지로 오버랩 되고 있는 것이다.

이미 병사들을 짓누르는 것은 '반공'이나 '멸공'의 의무감도, 일촉즉발의 전쟁발발의 위기감도, '전쟁'이 주는 죽음의 공포감도 아니다. 오히려 지금의 젊은 세대에게는 개인을 허용치 않는 전체주의에 대한 절망과 '충성, 애국'이라는 개념이 주는 모호함이 커 보인다. 지금의 혼란은 그동안 군기유지의 주요수단으로 쓰였던 구타가 적어짐으로 인한 '공백'이 여전한 물음표로 남아 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그래서 작가 하창수에게 있어 '군인의 길'은 어느 날 강보에 쌓여 있다 내팽개쳐진 아이가 '장난과 허위와 정신의 전진이 허락되지 않는 나날에서 오래 슬퍼하지 않는 일과 입 다무는 것, 그리고 눈감아주는 일'을 익히는 일이 된다. 그럴수록 '스물다섯 살의 여윈 몸과 눅눅한 기억의 그림자들, '선택할 수 없음으로 인해' 결코 쉽게 '돌아설 수 없는' 개인과 젊음을 지켜 나가는 '돌아서지 않는 사람들'이란 답답한 군상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허무한 날들이여! 누가 누구에게 몇 줄의 글을 써 보낸들 정작 무엇이 새로울 것이며, 그것은 또 얼마나 우리의 불안을 거두어 갈 수 있으랴.

작가 하창수에게는 현실 그 자체가, 사회 전체를 통째로 전체주의로 몰던 정부나, 이런 움직임에 대한 80년대의 반정부 민주화 투쟁, 노동현장에서의 행동강령까지도 '전체주의'의 틀을 그대로 유지하는 것으로 보여진다.

그리하여 그는 여전히 인간을 억압하는 굴레로부터 끊임없이 탈출하려고 애썼던 안간힘은 무엇이며, 소설은 과연 그 억압의 굴레로부터 인간을 얼마만큼이나 자유롭게 만들었는지를 반문하고 궁구하는지 모른다.

다목리 차부 풍경
다목리 차부 풍경 ⓒ 최삼경
소설은 10여개로 토막 낸 각기의 에피소드로 나뉘어 때로는 비틀거리며 이탈하기도 하고, 때로는 소리 지르고 쓰러지기도 하지만 끝내 '돌아설 수 없는 존재들'을 그려낸다. 그것은 소양댐의 거친 물 언덕이 눈 속으로 처박히면서부터 오랜 시간과 침묵과 정조(貞操)와 인내와 괴로움으로 점철될 스물다섯 기록의 시작이었다.

어느 날 갑자기 전방근무 부적격자로 후방으로 전출 간 한 신병은 산에서 목을 맸다는 소식이 들리고, 그를 아끼던 통신병은 응답 없는 무전기에 대고 그의 이름을 불러댄다. 제대를 며칠 남기지 않은 병장이 월북을 기도한 병장을 쏘아 죽이는 '유해의 봄'에서는 모든 게 '헛것'처럼 허허롭게 여겨진다.

선사시대 돌을 찾아 계곡을 다니던 공병대 이등병은 복귀일 날 지뢰를 밟고, 자신의 개가 군 동료를 물어 죽이자 군견병은 실어증 증세를 보이기 시작하고, 폭탄사고로 아이를 잃은 선임하사는 '파랑새'의 술집 여주인에게 위로를 구하다 제대해 버리고, 위병소 하사는 애인의 변심을 비관하여 총으로 자신의 머리를 날려 버린다.

화천군 다목리, 버스 차부(정류소)를 중심으로 술집과 노래방, 여관들이 놓여 있는 거리에 나섰을 때, 그때 군인 하창수는 어떤 해방감 같은 것을 느꼈을까. 벌써 20여년도 넘은 기억속의 풍광이지만, 담벼락에 노랗게 스마일 그림을 그린 군부대의 풍경이나 '전령' 완장을 찬 어느 사병의 얼굴에 나타난 표정 등, 기실 크게 바뀔 여지가 있어 보이지 않는다.

긴 장마 사이로 보이는 푸른 하늘, 수피령 아래로 낭자했던 혼란과 죽음의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아니 그보다는 한여름의 중간을 맞는 생명활동이 너무나 푸르게 진행되고 있었다. 어쩐지 서로 닮은 모습을 띤 강원도의 전방 풍경, 소망했던 봄에 참혹한 겨울을 겪을 수밖에 없었던 시절이 지난 과거 군의 모습이었다면, 이제 젊음 특유의 생기와 낙관으로 새롭게 정착되어가는 병영문화를 꿈꾸어 본다면 지나친 기성의 안이한 시각일 터인가….

민통선 인근의 군부대 풍경
민통선 인근의 군부대 풍경 ⓒ 최삼경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