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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암사 극락전 전경, 편액이 한자씩 떨어져 있다. 규모는 작으나, 조선 후기 맛깔스럽고 엄격한 품위가 살아있다.
화암사 극락전 전경, 편액이 한자씩 떨어져 있다. 규모는 작으나, 조선 후기 맛깔스럽고 엄격한 품위가 살아있다. ⓒ 신병철
화암사의 중심 법당은 극락전이다. 아미타부처님이 계시는 집이다. 편액이 다른 절간과는 달리 한자씩 떨어져 있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아담한 절집이다. 마주보고 있는 우화루와 아담한 안마당을 만들고 있다. 동서쪽에도 건물이 있어 마당은 포근히 건물로 둘러 싸였다. 마당이 건물 내부인지 외부인지 구분조차 되지 않는다.

극락전은 그리 높지 않은 막돌로 만든 기단 위에 아무렇게나 생긴 덤벙주초를 놓고 그 위에 건물을 시작했다. 기둥이 굵직굵직하다. 3칸 중에서 중간칸(어간)은 조금 더 넓다. 좌우 협간이 문짝이 세 짝인데 반해 어간은 문짝도 네 짝이다. 공포도 협간은 중간포가 하나씩밖에 없는데, 어간은 중간포가 두개씩이나 있다.

극락전 앞 뒤면 공포, 외2출목 내3출목의 공포를 지니고 있다. 외2출목 위에 또 하나의 부재가 있다. 앞쪽은 장식했으나 뒤쪽은 단순하게 처리했다.
극락전 앞 뒤면 공포, 외2출목 내3출목의 공포를 지니고 있다. 외2출목 위에 또 하나의 부재가 있다. 앞쪽은 장식했으나 뒤쪽은 단순하게 처리했다. ⓒ 신병철
공포는 건물 밖으로 2짝, 건물 안으로 3짝인 외2출목 내3출목이다. 그런데 이상하다. 외2출목이 아니라 3출목 같다. 2개의 외출목 위에 좀 떨어져 무엇이 하나 더 있다. 꼭대기는 용모양으로 장식까지 했다. 뒤편으로 돌아가 보면 장식 없이 그냥 비스듬하게 뻗어 있다. 이것은 공포가 아니란 말인가?

귀공포를 살펴보면 그 뻗어 나온 것은 공포는 아님이 틀림없다. 위에서 비스듬히 내려와 외목도리를 받치며 공포보다 더 밖으로 뻗어 나온 것이다. 건물 정면에서는 이 부재 끝을 장식했지만 건물 뒷면에서는 장식하지 않았을 뿐이다. 고려 이후의 건물에서는 볼 수 없는 하앙이란 지붕 부재다.

하앙은 서까래와 같은 방향으로 뻗어 있다. 그 위쪽 끝은 중간 들보(중보)에 연결되어 있다. 중간 들보에서 서까래와 같은 방향으로 비스듬히 걸쳐 있다. 지렛대처럼 건물 가장 밖에 나와 있는 외목도리를 받치고 있다. 이런 하앙은 고려 이전의 건물에 나타났다고 한다. 중국 당나라의 건물 중 지금까지 잔존하는 것이 있단다. 일본 법륭사 5층 목탑의 공포가 바로 이런 하앙식의 옛날 형식이라고 한다. 법륭사 5층 목탑은 백제 건축가들이 지었다고 알려지고 있다.

백제의 건축 양식이 살아 있는 하앙, 고려시대 이후에는 나타나지 않은 하앙이 살아 있다. 충남의 고건축박물관의 극락전 모조품과 앞뒤 하앙의 모습이다.
백제의 건축 양식이 살아 있는 하앙, 고려시대 이후에는 나타나지 않은 하앙이 살아 있다. 충남의 고건축박물관의 극락전 모조품과 앞뒤 하앙의 모습이다. ⓒ 신병철
부여 박물관에 집 모양의 작은 탑 파편이 하나 있다. 탑몸과 탑지붕 하나만이 남아 있다. 이 탑이 하앙식 가구를 지니고 있다. 아마도 백제를 비롯한 삼국시대와 통일신라 시대에는 하앙식 건물이 많았나 보다. 그렇다면 화암사 극락전은 백제의 하앙식 건물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건물이라 할 수 있겠다.

화암사 극락전은 우리나라에서 고대 건축, 그 중에서도 백제식의 건물 분위기가 남아 있는 유일한 건물이다. 서까래와 지붕의 무게를 쉽게 전달하기 위하여 하앙을 사용했다. 이런 하앙은 이후의 건축물에서 왜 사라졌을까? 건축가들이 연구해 봐야 할 주제다.

하앙이 퇴보하면서 그래도 남은 것이 솟을합장이 아닐까. 솟을합장은 마루도리에서 중도리와 중간들보에 연결되어 지붕을 튼튼하게 받들고 있다. 삼국시대 건축물의 형태를 일부나마 보고 싶거든 완주 화암사로 가 볼 일이다.

화암사는 상량문에 따르면 1605년에 다시 지었다고 한다. 임진왜란 끝날 즈음 1597년에 화암사가 불타버렸다. 타버린 극락전을 10년도 지나지 않아 다시 지은 셈이다. 임란 이후에 많은 절간이 다시 지어졌지만 화암사가 가장 빨리 재건한 축에 속한다. 그만큼 화암사는 인근 사람들에게 영향력이 컸음을 알 수 있다. 누가 돈을 댔을까. 완주 지방의 유지가 돈을 댔을 가능성이 크다. 절간의 내외적인 전체적인 분위기가 17세기 절간들의 짜임새와 분위기를 담고 있다.

본래의 화암사는 통일신라시대에 처음 세웠다. 이곳이 백제 지역이었던 만큼 백제식의 절집이었을 것이다. 여러 번의 중수를 거치면서 고려시대에도 남아 있었다. 화암사 중창기에 따르면 고려말 조선 초 성달생이라는 무인이 1425년부터 4년에 걸쳐 중창하고 단청도 다시 칠하였다고 한다. 세종임금 때였다.

극락전 내부 공포, 내3출목의 공포를 부드럽게 장식했다. 닫집과 낮은 대들보를 꽃처럼 떠받들고 있는 듯하다.
극락전 내부 공포, 내3출목의 공포를 부드럽게 장식했다. 닫집과 낮은 대들보를 꽃처럼 떠받들고 있는 듯하다. ⓒ 신병철
화암사 극락전은 다포식 공포 구성에 맞배지붕을 갖추고 있다. 맞배지붕은 기둥 위에만 공포를 짜는 주심포와 천장이 없어 서까래가 훤히 보이는 연등천장이 제격이다. 그러나 고려말 조선초기에 들어서서 주심공포 사이에 중간포를 짜 맞추는 다포식이 개발되었다. 다포식 공포와 함께 내출목이 여러 개 걸리면서 내부가 복잡해지자 천장을 짜서 넣었다. 이 극락전은 백제계통의 하앙식 건물에 고려 후기의 다포식이 가미되었고, 천정을 짜 맞추는 양식에서 조선 후기의 양식이 또한 가미되었다.

극락전의 내부는 화려하고 멋있다. 극락의 세상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다. 그렇다고 가볍지는 않다. 아직 근엄함과 지조를 갖추려 했던 양반 지주들의 분위기가 살아 있다. 내출목 공포들이 일정한 품격을 지니고 내부를 장식하고 있다. 외부의 공포 장식도 적당하고 품격이 제법 있다. 공포의 끝이 아래로 처지면서 위로 살짝 쳐들고 있다. 17세기 공포의 모습이다.

극락전 닫집, 부처님이 계신 자리 위 천개를 장식한 닫집이 화려하다. 온갖 상서러운 존재들이 천상의 세상을 연출하고 있다.
극락전 닫집, 부처님이 계신 자리 위 천개를 장식한 닫집이 화려하다. 온갖 상서러운 존재들이 천상의 세상을 연출하고 있다. ⓒ 신병철
천정은 복잡한 건축물 내부를 가리면서 반자를 짜 맞추어 멋있게 장식했다. 아미타부처님 위에 걸려 있는 닫집은 그야말로 최고의 장식을 다하였다. 복잡한 구조를 지닌 지붕과 그 아래 다포식 공포를 빼곡히 짜 넣었다. 불교와 관련 있는 온갖 상서로운 동물들이 날아다닌다. 용이 입을 벌리고 아래로 내려다보고 있다. 극락조들은 즐거운 듯 하늘을 날고 있다. 비천상이 옷자락을 하늘거리며 절대 진리의 극락 세상을 맘껏 누비고 있다. 연봉우리들이 나머지 여백을 메우고 있다. 우리나라 최고의 닫집으로 손색이 없다.

높은 기둥을 사용하지 않아 대들보가 아래로 처지고 크다. 세로로 서 있는 기둥과 가로로 걸친 대들보와 꽃처럼 피어오르는 공포들이 좁은 공간을 마구잡이로 장식하고 있다. 화려하나 가볍지 않고 촐싹거리지 않는다. 반반한 면에는 온갖 모습의 그림을 그려 넣었다. 최고 수준의 단청인 모로단청이다.

단청은 1707년에 했다고 묵서명에 기록되어 있다. 우리나라 단청들 중에서 품격 높고 아름다우며 우아한 자연색을 지니고 있다. 단청의 가치가 높단다. 외부 정면 공포와 하앙 사이를 판자로 막았다. 순각판이라고 한다. 이 순각판에도 빼놓은 곳 없이 불화를 그려 넣었다. 비천상, 주악상 등 불교를 알리는 온갖 그림들이 극락전을 수놓고 있다.

극락전 내부 단청과 외부 순각판의 그림들, 18세기 초에 그린 것으로 우아한 색깔과 그림이 극락 세상을 만들고 있다.
극락전 내부 단청과 외부 순각판의 그림들, 18세기 초에 그린 것으로 우아한 색깔과 그림이 극락 세상을 만들고 있다. ⓒ 신병철
화암사는 잘 알려지지 않은 절이다. 찾아가기가 쉽지 않다. 2월 하순에 화암사를 무작정 찾아가기로 작정했다. 백제가 어떻게 남아 있는지 궁금하기 짝이 없었다. 도로에서 벗어나 시골길을 한참을 자동차로 달린다. 겨우 산길로 접어든다. 조금 올라가면 차가 더 이상 갈 수 없다. 아 이제 절간이 나타나나 보다. 한참을 또 걸어간다. 깊은 산속이다. 그래도 절간은 보이지 않는다. 철난간으로 길을 만들어 놓았다. 오래됐음인지 조심하라는 팻말이 여럿 보인다.

화암사 찾아가는 길, 첩첩산중 절이 있으리라 생각할 수 없는곳에 화암사는 자리잡고 있다. 이 길을 지나면 긴 철계단이 나타난다. 외부에서는 절대 보이지 않는다.
화암사 찾아가는 길, 첩첩산중 절이 있으리라 생각할 수 없는곳에 화암사는 자리잡고 있다. 이 길을 지나면 긴 철계단이 나타난다. 외부에서는 절대 보이지 않는다. ⓒ 신병철
드디어 나타났다. 앞에 불명산화암사라는 편액을 가진 누대건물이 나타난다. 아래쪽에는 기둥만 세워져 있는 누대이고 2층에 건물이 올라가 있다. 덤벙초석과 편안하게 느껴지는 자연스런 기둥이 멋들어진다. 자연석 초석이 이렇게 제멋대로인 경우는 드물다. 산속이라서 더욱 그런가 보다.

산속에 있어 자연석이 더욱 어울린다. 잘 다듬은 매끈한 초석과 기둥이었다면 얼마나 산속 주위와 어울리지 못했을까. 누대 위 건물은 기둥이 네 개 정면 3칸인데 비하여 아래 누대의 기둥은 5개 4칸이다. 아래 위의 기둥의 일치가 만들어내는 규격화, 당연함의 짜증을 살짝 피하고 있다. 우리의 자연 동화 의식이 이렇게 살아 있고, 그것이 너무나 편안하다.

우화루 전체 모습, 아래는 누대 기둥이 있고, 위에 건물이 세워져 있다. 아래는 네칸, 위에는 3칸, 꽉짜여진 형식에 답답함을 피하고 있다. 기둥 세운 저 돌의 막무가내란...
우화루 전체 모습, 아래는 누대 기둥이 있고, 위에 건물이 세워져 있다. 아래는 네칸, 위에는 3칸, 꽉짜여진 형식에 답답함을 피하고 있다. 기둥 세운 저 돌의 막무가내란... ⓒ 신병철
우화루는 다포식 누대건물이다. 제법 높은 품격이 느껴진다. 그래서 17세기를 대표하는 건물 중에 하나가 되었다. 극락전과 함께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들어가는 문은 동쪽 건물이 공사중이라서 닫혀있다. 안타깝다. 비상계단으로 올라가본다. 아래에서 보이던 누대 건물이 위로 올라가 마당에서 보자 1층 건물이 되었다.

건물 편액도 우화루(雨花樓)다. 비와 같은 꽃, 꽃비 누대라는 뜻이다. 부처님이 성불할 때 꽃비가 내렸단다. 그래서 우화루란 이름이 많다. 아래에서 보던 불명산화암사(佛明山花巖寺)란 글자와 같은 서체의 우화루 글자가 17세기의 분위기를 느끼게 한다. 양반 지주들이 향촌의 실권을 장악하고 있을 때, 양반들의 지조와 고상한 품격이 배어나온다.

우화루 내부 모습, 안마당과 우화루 내부가 공간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그래서 내부를 시원하게 만들었다. 들보와 대공이 단순 시원하다.
우화루 내부 모습, 안마당과 우화루 내부가 공간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그래서 내부를 시원하게 만들었다. 들보와 대공이 단순 시원하다. ⓒ 신병철
우화루 바닥의 높이는 안마당의 높이와 같다. 그리고 우화루 내부가 마당쪽으로 툭 트여 있다. 마당이 우화루 내부로 연장되어 있고, 그것은 마당이 건물 안으로 들어가고 있기도 하다. 안 그래도 사방 건물로 둘러싸여 있고 식물 한 그루 심지 않은 안마당이어서 건물의 내부인지 외부인지 구분하기 힘든데, 우화루가 이런 현상을 크게 부추기고 있다. 우리 건축물 공간 배치의 특징이기도 하다.

그래서인지 우화루 내부는 오목조목 조화롭고 화려하기보다는 뻥 뚫려 있는 훤칠함을 지니고 있다. 내부 천정이 외부 마당의 천정인 하늘의 뻥뚫림과 연장해 있다는 의식이 그렇게 만들었을 것이다. 내부 고주가 대들보를 받치고 있다. 평주는 퇴보로 연결되어 있다. 대들보와 중보와 마루도리의 간격이 크게 넓다. 장식하지 않은 대공으로 이들을 받치고 있다. 훤칠하게 느껴지는 분위기는 이런데서 나타난 것이다.

극락전 닫집의 용 조각, 눈을 뻔히 뜬 용의 모습이 재미있다. 엄격함보다는 자연스러운 모습이 정감이 간다.
극락전 닫집의 용 조각, 눈을 뻔히 뜬 용의 모습이 재미있다. 엄격함보다는 자연스러운 모습이 정감이 간다. ⓒ 신병철
겨울이 물러가고 있는 2월 말, 화암사 극락전에는 스님도 보이지 않고 보살님도 보이지 않는다. 깊은 산중이라서 그런가 보다. 요사채에서 스님들의 두런거리는 소리만 간간이 들려온다. 문을 들어섰을 때 들리던 개짖는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누렁이 한 마리가 극락전 햇볕 잘 드는 곳에 앉아 꼬리치고 있다(앞쪽 사진에 나와 있다). 조금 전 반가워서 짖는 소리였나 보다. 자꾸만 쳐다보는 눈망울이 더 있다 가라고 애타게 부탁하는 듯했다.

언제 다시 화암사에 올 수 있을까? 공사 중이라서 올라갈 수 없었던 조그만 문 안으로 꼭 다시 들어가 보고 싶다. 공사 중이라서 제대로 볼 수 없었던 동쪽 건물과 어울리는 마당을 다시 보고 싶다. 녹음이 우거져 아무도 없는 곳에 별천지처럼 보일 것만 같은 깊은 산속 목탁소리를 기대하면서 화암사는 꼭 다시 찾아가 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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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에서 살고 있습니다. 낚시도 하고 목공도 하고 오름도 올라가고 귤농사도 짓고 있습니다. 아참 닭도 수십마리 키우고 있습니다. 사실은 지들이 함께 살고 있습니다. 개도 두마리 함께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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