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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류가방에서는 짙은 세월의 향기가 배어 나왔다. 행여 땀이라도 묻을세라 조심스레 만지는 필자의 손은 경이로움에 가늘게 떨었다. 종이를 꼬은 줄로 엮어 만든 것을 알고 보는데도 섬세한 종이 올과 조직의 치밀한 짜임에 명주로 짠것으로 착각이 된다. 종이끈으로 엮은 것이 아니라 '종이 실로 짰다'고 해야 맞을 지경이다.

▲ 지승으로 만든 휴대용 서류가방. 가로 38cm, 세로 24cm, 폭 5cm로 표면에 옻칠을 했다. 옻칠이 두꺼우면 사용 중 갈라지는데 알맞게 옻을 올려 재질이 마치 부드러운 양가죽같다. 이 유물이 언론에 공개되는 것은 처음.
ⓒ 곽교신
▲ 정교하게 짜인 표면. 씨줄이 날줄을 규칙적으로 건너 뛰면서 마름모 무늬가 놓여졌고, 잘 밀리는 종이의 특성을 살려 송곳같은 예리한 도구로 씨줄과 날줄에 적당히 밀림을 주어 그 밀린 선을 따라 구름문양을 새겼다.
ⓒ 곽교신
▲ 가방 내부의 칸막이면. 내부를 격막으로 이등분하여 사용을 편하게 했다. 옻칠이 안된 원판을 보고나서야 정말 한지로 꼬았을까하는 의심을 버렸다. 치밀한 짜임에 한동안 눈을 떼지 못했다.
ⓒ 곽교신
이 서류가방은 최영준 장인(55. 충남 홍성군)의 스승이자 시할아버님이셨던 김영복(86년 작고. 충남 무형문화재 지승공예부문) 장인의 작품으로 가보로 보관하는 유물이다.

정확한 제작 시기는 모르나 시조부께서 돌아가신 연도와 생전의 활동을 근거로 찬찬히 따져보니 최소 95년은 된 물건이다. 물론 지금도 정상적으로 사용이 가능하다. 하긴 천년을 간다는 한지이니 백살은 어린아이에 불과하다.

외부 활동이 잦고 언론 접촉이 많은 최 장인이지만 이 서류가방은 남에게 함부로 보이지 않았단다. 물론 신문, 방송 어디에건 내보인 적이 없었으며 따라서 언론공개는 이번이 처음이라는 말씀이다.

지승공예 작품들을 보며 감탄한 것이 한두번이 아니지만 이건 감탄의 수준을 넘는다. 한지를 꼬아 만들었다고 선뜻 믿기 힘든 정교함의 극치다. 마치 말총을 엮은 듯 섬세하다. 어쩌면 이렇게 만들 수가 있을까. 유물을 보며 뭔가 말을 한다는 게 필자는 "아니, 이게 참..."만을 연발했다.

눈을 가까이 갖다대도 올의 짜임이 구별이 안되어 확대경을 꺼내들었다. 지승공예품을 보며 렌즈와 게이지가 필요하리라고는 상상을 못했다. 올의 굵기가 0.8∼0.95mm 사이다. 필자가 가진 아날로그 게이지는 0.05mm 이하의 식별은 불가능하다. 백여년 전의 선조께서 종이를 손으로 꼰 올의 굵기를 재보겠다고 그 후손이 정밀한 현대식 공업용 게이지를 들고 덤비고 있다. 무엇을 '현대적'이라 말해야 옳은가.

박물관 등에 전시된 희귀한 지승공예품이라 하는 것을 적잖이 보아왔으나 이것은 그 어느 것과도 격이 완연히 다르다. TV프로그램 덕에 오래된 물건을 보면 가격을 매겨보는 것이 유행이나 이런 것은 값을 논하는 것조차 경망스러운 일이다.

유물의 공개에 감사의 말씀을 전하면서 가보를 뛰어넘는 귀중한 유물을 더욱 소중히 보관하실 것을 거듭 당부 드렸다. 이런 유물은 한 가정의 보배만이 아니라 국가의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지승공예

지승(紙繩)을 그대로 풀면 '종이 끈'이다. '지승'과 '지승공예'를 동의어처럼 쓰는 것은 정확한 말은 아니다. 지승을 '지노'라고도 하는데, 한자 지(紙)에 기다란 끈을 의미하는 우리 말 '노'가 합친 말이다. 지노, 지승이 모두 '종이 끈'을 뜻하므로 '지승을 한다'하면 '종이 끈을 꼰다'가 된다. 그러므로 반드시 '지승공예를 한다'고 해야 옳다. 정확한 용어의 사용은 전통의 계승과 전통의 재창조를 정확히 구별하는 기본이다.

한지를 테이프처럼 오려 돌돌 말아 끈을 만들고 이 끈 두 세 가닥을 합해 새끼처럼 꼬아서 질긴 종이끈을 만든 다음, 그 끈을 날실로 삼아 홑가닥의 지승을 씨실로 멕여 가며 온갖 생활용구를 엮어내는 것이 지승공예이다.

최영준 장인은 '충청남도지정 무형문화재 2호 지승공예 기능보유자'로 국가지정 보유자는 아직 없으므로 이 부문의 공식지정자로는 유일하다.

강원도 원주에서 공무원 남편을 따라 1973년 충남 광천으로 시집을 갔다. 시댁에서 생전 처음 본 지승공예품에 새색시 최영준은 한눈에 반했다. 그 때부터 종이를 꼬기 시작했고 남다른 재주를 보였다. 5남 7녀의 막내 손주며느리 최영준의 손재주와 지승공예에 대한 열정에 시조부 김영복은 유달리 막내손부를 귀여워 하셨고 그의 기능을 본격적으로 전수시키기 시작했다. 최영준의 지승공예 인생 32년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 최 장인이 꼬아낸 실을 서류가방 위에 올려보았다.두께가 한 눈에 비교된다. 옛장인의 기교의 끝은 어디일까.
ⓒ 곽교신
종이를 꼬아 끈을 만드는 작업은 매우 고단한 작업이다. 시리즈 2편 '발'에서 발을 매는 작업보다 실처럼 가는 대오리를 삼아내는 과정의 숙달이 더 어려운 이치와 같다.

32년 종이를 만진 손에 30분도 못 배운 필자의 손을 비교하는 게 말이 되진 않으나 필자도 손끝이 제법 맵다는 소리를 듣기에 덤벼보았다. 기초적인 설명을 듣고 야무지게 꼬아봤으나 가늘다가 굵다가 제멋대로다. 최 장인이 꼬아낸 종이끈은 마치 기계로 뽑아낸 듯 굵기가 일정하고 매우 가늘다. 그런데 최 장인이 꼬아낸 종이끈도 시할아버님의 서류가방 위에 놓으니 마치 머리카락 위에 국수 발을 올려놓은 듯 굵다. 대체 옛 장인들의 손끝엔 어떤 혼이 실려 있었을까.

요물단지 종이 요강

▲ 여러가지 질문을 많이 받는 지승공예 요강. 무형문화재전수회관 전시품.
ⓒ 곽교신
전시장의 지승공예품 중에 사람들의 이목을 가장 많이 끌며 질문이 많이 쏟아지는 것은 '요강'이다. 종이그릇을 요강으로 쓴다 하니 모두들 의아해 하며 이구동성으로 "새지 않아요?"를 먼저 묻는다. 필자도 그것을 먼저 물었다. 물론 새지도 스며들지도 않지만 최 장인은 '샌다, 안샌다'의 답변에 앞서 작은 목소리로 "그것보다 소리가 나질 않아요"를 더 강조했다.

옛 여인네들이 '우아한' 교통수단이던 가마를 타고 장거리를 이동하면서 겪어야하는 '우아하지 못한' 고민거리는 화장실이었다. 내려서 일을 보라고 한들 마땅히 갈 곳이 있을 리 없다. 아녀자가 남의 집 뒷간을 쓴다는 것은 엄두도 못 낼 일이다. 그러니 가마에 요강은 필수다.

문제는 소리. 가마꾼이 전부 남자인데 여간 신경이 쓰이지 않았을 것이다. 남자인 나는 '새지 않느냐'가 제일 궁금한데 여자인 최 장인은 소리가 나지 않는다는 것을 가장 먼저 강조하신다. 사용자의 입장에선 그걸 제일의 장점으로 강조하고 싶으신 모양이다.

종이로 만든 요강이 일을 보아도 새지 않는 이유는 간단하다. 겹쳐 바른 옷칠 덕분이다. 새색시 시절 시댁엔 종이요강은 물론 종이 세수대야도 있었다는데, 가벼워서 무척 좋았다고…. 옷칠을 하면 표면이 단단해지고 벌레도 먹지 않으므로 깨뜨리지만 않으면 매우 오래 쓸 수 있다.

▲ 31년 된 손지갑. 최 장인의 첫 작품으로 지승공예를 배운 이듬 해에 제작. 무형문화재전수회관 전시품.
ⓒ 곽교신
손지갑은 최장인의 제대로 된 첫 작품이라 하신다. 필자는 이 작품을 보면서 손재주 좋은 최 장인이 지승공예의 전통을 잇는 집안으로 시집을 간 것도, 그래서 시할아버님 생전에 손주며느리인 최 장인을 무척 예뻐하신 것도, 그 할아버님께서 풍을 맞으셨을 때 7년을 뒤를 받아내고 효부로 표창을 받은 것도 타고난 인연이 아닌가 싶다. 무한한 인내심이 필수인 지승공예의 특성상 최 장인의 그런 성품은 적격이 아니었을까 싶다.

지승공예의 미래

종이공예에는 종이를 꼬는 지승을 비롯해 겹쳐 바르는 지장공예, 종이를 물에 풀어 옹기를 빚듯이 그릇을 만드는 지호공예 등 종이로 만든 생활용구는 양반층에서 서민층까지 다양하게 사용되었다. 지호나 지장은 개량한지도 가능하고 특히 지호는 신문지를 풀어 만들어도 색만 잘 입히면 아주 좋다.

그러나 지승공예의 재료는 오로지 섬유가 길고 질긴 전통 한지라야 한다. 지금도 한지는 귀하지만 예전엔 종이 자체가 귀한 물품이었다. 대량 인쇄의 어려움이란 문제가 있었지만 서원에서도 가장 난제는 책의 확보였다. 그러므로 임금이 이름을 내려주는 '사액서원' 최고의 하사품은 '서책'이었다.

이렇듯 귀한 책을 오려서 끈으로 꼬아 생활용품을 만드는 것을 곱게 볼 리가 없다. 종이로 삼은 미투리 '지승혜'는 최고급 신발의 하나였는데 지승혜를 신는 것은 선비의 마음가짐이 아니다 하여 과거장에 입장을 시키지 않았다고도 한다.

그러나 지승공예는 새 종이를 쓰지 않는다. 달리 용도가 마땅치 않은 헌 책을 오려 활용하는 것은 물론 글씨 연습을 한 종이나 책을 묶고 잘라낸 종이 오래기도 모아서 알뜰히 썼다. 이것은 최고의 재활용이다. 지금도 휴지통에 인쇄를 중단한 멀쩡한 복사지가 꽤 있을 우리들은 멀어도 한참 멀었다.

지승공예 부문은 무형문화재 여러 분야 중에 비교적 전통의 계승이 활발한 부문에 속한다. 수준급으로 전통의 방식을 고수하는 이들도 10여명은 되며 취미 이상의 뜻을 세우고 진력하는 이들까지 합하면 그 수가 제법되어 지승공예의 앞날은 밝다고 보아도 좋겠다.

요즘은 옛책을 구하기 힘드니 헌종이를 재활용한다는 본래의 뜻은 사라지고 고서적을 뜯은 것처럼 보이도록 고문자를 인쇄한 개량한지를 오려서 지승의 재료로 쓴다. 재료는 옛것이 아니더라도 방식은 그대로 남아 이어감이 다행으로 생각된다.

최 장인은 지물포에서 파는 종이끈으로 편하게 엮는 등의 행동은 삼갔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힘들더라도 직접 꼬아서 끈을 만드는 것이 지승공예 본래의 뜻 아니겠냐는 최 장인의 고집에 필자도 전적으로 공감한다. 안쪽에 두꺼운 종이로 심지를 대고 지물포에서 파는 노끈을 단단히 붙여 지승공예품으로 교묘히 위장한 '작품'이 아닌 '상품'이 공모행사까지 파고들어 우리 문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실망시켜서는 안 된다.

이는 지승공예분야뿐이 아니라 모든 무형문화재에 공통으로 해당하는 일이다. 필자는 편의성을 이유로 학생들에게 노끈으로 실습을 시키는 일부 체험학습장의 관행도 사라지길 바란다. 종이를 직접 꼬아보는 힘든 과정이 지승공예의 진정한 시작일진대 결과만 가르치는 것은 의미가 없다. 문화도 양식이다. 물고기 잡는 법을 가르치지 않고 물고기만 주어서는 우리 문화의 미래 양식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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