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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1997년 그 해 겨울 아버지는 빙판길에 넘어져 가슴 통증을 호소하셨다. 청주에 있는 모 정형회과를 찾으셨다. 엑스레이 촬영을 하였다. 사진을 보고 담당 의사는 깜짝 놀라 아버지에게 되물었다.

‘아니, 이게 뭐죠?’

사진은 숭숭 구멍이 나 있었다. 아버지는 너무 자연스럽게 말씀하신다.

“아, 그 거 6·25 때 맞은 파편이에요.”

그리고 머리와 팔목 옆구리 엉덩이 등을 만지시며 이 곳에도 파편이 있다라고 말씀하셨다. 의사는 다시 묻는다.

‘아저씨, 국가 유공자세요?’

당시 아버지는 국가 유공자가 아니셨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국가 유공자증이 없으셨다. '증' 하나로 국가 유공자를 구분 지을 수는 없지 않는가.

‘이 정도인데 왜 국가 유공자 신청을 하지 않으셨어요?’

이렇게 말하는 의사에게 아버지는 ‘살아 돌아온 것만으로 만족한다.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이 더 많지 않은가’라고 하신다.

아버지 몸 속에 파편이 박혀 있었다니, 아무도 알지 못했다. 그 파편 속에 아버지가 젊은 시절 목숨을 걸어야 했던 그 시간들이 있었다. 아버지는 아무런 말씀을 하지 않으셨다. 왜일까? 흔히들 남자들은 술자리에서 빠지지 않는 것이 군대 이야기다. 고생한 이야기를 무용담처럼 늘어놓는다. 전쟁, 그 이름 뒤에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무언가가 있을 것이다.

영화 속의 한 장면이 아닌 삶과 죽음 사이에 놓인 순간 순간들. 아버지는 그 날의 하늘을 어떻게 기억하고 계실까? 돌아오지 못한 분들에게 미안한 마음에 또 다른 이유에 기억하고 싶지 않은 일일 수도 있다.

아버지는 국가 유공자 신청을 냈다. 몇 번의 신체검사가 이루어졌다. 아버지가 참전하셨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그런 상처를 가지고 살아오신 걸 아무도 알지 못했다. 왼쪽 팔목 신경에 박힌 파편 때문에 항상 전류가 흐르는 느낌이라고 하신다. 그래서 일을 하실 때 가끔 손목을 털곤 하신다.

신체 검사 내내 아버지는 못 마땅해 하셨다. 불필요한 일이라 생각하신다. 다들 그랬다며, 그리고 또 다시 그 말씀을 하신다. ‘살아 돌아오지 못한 사람도 있지 않느냐?’

2000년 7월 아버지는 50여년이 지나 국가유공자증을 받으셨다. 아버지에게 그 증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전쟁 영화를 보며 가슴 한켠 찡함을 느끼던 내가 정작 아버지의 이야기에는 왜 그리 오래토록 무관심했을까?

틈나는 대로 아버지에게 이야기를 들었다. 어떤 부분은 정확한 날짜와 상황을 기억하시는 부분도 있고, 어느 부분은 기억이 흐린 부분도 있었지만, 아버지의 얼굴에서 그 날의 두려움과 긴장 그리고 슬픔을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었다.

아버지의 생에서 어느 때보다 길게만 느껴졌을 그 시간을 의자에 편히 앉아 글을 쓴다는 것이 죄송한 마음이 들지만, 내 아이가 자라 아버지가 목숨을 걸고 싸웠던 그 나이가 되면 할아버지의 젊은 날을 들려주기 위해, 그리고 푸른 하늘을 지키기 위해 이름 한 줄 남기고 가신 이 땅의 모든 아버지를 기억하기 위해, 이제 더 이상 아버지의 기억 속에 그리고 아직도 군데군데 박혀 아버지를 괴롭히는 파편 속에 그 날의 하늘을 담아둘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유월의 하늘은 항상 푸르다. 눈부시게 푸른 이 하늘빛이 우리가 그 날의 하늘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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