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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밤 살짝 내린 비로 바람이 더욱 매서워졌다. 30일 오후 6시, 서울 영등포역 광장에서 만난 최창현(40세·뇌성마비1급), 정용기(29세·뇌성마비1급)씨의 얼굴은 차가운 바람에 벌겋게 얼어 있었다. 그만큼 추위에 떨었으면 실내로 들어가고 싶을 법도 한데, 서울에 도착했다는 안도감과 기쁨 때문인지 사진 촬영을 위한 기자들의 요구에도 연신 싱글벙글이다.

최창현, 정용기씨는 지난 26일 대구에서부터 전동휠체어로 구미, 김천, 대전, 천안, 수원을 거쳐 이날 오후 6시께 서울에 도착했다. 거리로 치자면 약 350㎞. 하루 70㎞를 8시간 동안 휠체어로 달려 5일 동안 강행군을 해왔다고 한다.

이번 국토종단은 전국중증장애인독립생활대책협의회(대표 최창현)가 주최한 것으로, 대통령 탄핵안 가결에 반대하는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국민의 뜻을 대통령에게 전달할 목적으로 추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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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 대통령에게 용기주러 청와대 간다"

“대한민국을 사랑하니까요”

'탄핵반대' 국민의 뜻을 전하기 위해 전동휠체어 국토종단으로 대구에서 서울까지 올라온 최창현(왼쪽)씨와 정용기(오른쪽)씨.
'탄핵반대' 국민의 뜻을 전하기 위해 전동휠체어 국토종단으로 대구에서 서울까지 올라온 최창현(왼쪽)씨와 정용기(오른쪽)씨. ⓒ 이정은
전동휠체어 국토종단은 이번이 처음인 정용기씨와는 달리 최창현씨에게 국토종단은 미국, 일본, 월드컵 개최도시 종단에 이어 이번이 네 번째. “그래도 매번 할 때마다 힘들지요”라고 말하는 최씨는 “그래도 대한민국을 사랑하기 때문에 이 힘든 길을 또 택했다”며 수줍게 웃었다.

최씨는 “고속국도를 따라 올 때 지나가던 차들이 응원해 줄 때 힘이 많이 났다”며, “내일(31일) 한나라당과 민주당 앞에서 시위를 하고, 청와대로 가서 대통령께 쓴 편지를 꼭 전해드리고 싶다”고 말했다. 최씨와 정씨는 계획한 일정을 모두 소화한 뒤 31일 오후 다시 대구로 내려갈 계획이다.

아래는 최씨와의 인터뷰 전문이다.

- 미국 국토횡단을 했다고 들었는데, 목적이 무엇이었나?
“2000년 IMF로 인해 힘들어하는 국민들에게 용기를 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내가 보여줄 수 있는 건 내 몸으로 무언가를 하는 것뿐이었다. 그래서 2000년 8월부터 로스엔젤레스에서 뉴욕까지 5500㎞를 횡단했다. 중간에 교통사고를 당해 애초 계획보다 오래(11개월) 걸리긴 했지만, 내가 세계 최초로 (휠체어) 미국 횡단에 도전한 사람이다.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자랑스럽다.”

“국민들을 ‘허수아비’로 보지 말라”

- 굳이 국토종단을 하지 않고 편하게 서울에 올라와도 됐을텐데.
“우리가 힘든 길을 일부러 택한 것처럼 국민들도 깨어나야 된다는 생각으로 임했다. 국민들이 깨어나 17대 국회의원들은 현명한 사람들을 뽑아야 한다. 그래서 이 나라의 주인은 국민이라는 것을 국회의원들에게 알게 해주어야 한다. 이번 탄핵은 대통령을 탄핵한 것이 아니라 국민을 탄핵한 것이다. 따라서 국민의 권리를 찾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지 모든 국민들이 알아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휠체어에 꽂은 피켓도 허수아비 모양으로 만들었다. 국민들을 ‘허수아비’로 보지 말라는 의미이다.”

“제가 고생한게 뭐 있나요”
장애인인권찾기회 ‘밝은내일’ 이경자 사무장

최창현씨와 정용기씨가 대구에서 서울로 올라오기까지에는 이경자씨의 도움이 컸다. 이 사무장은 지난 5일 동안 몸이 불편한 그들의 ‘손’이자 ‘길잡이’가 되어 주었다.

이씨는 “숙식은 어떻게 해결했냐”는 질문에, “식사는 주로 편의점에서 컵라면으로 대충 해결했지만 숙소가 가장 큰 문제였다”며, “근처 경찰서나 교회에 숙소 부탁을 해봤지만, 경찰서에서는 ‘탄핵이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안이라 우리가 협조해 줄 수 있는 게 아니’라며 조심스러워 했고, 교회는 비교적 협조적이었다”고 말했다.

이씨는 “두 분들이 고생이었지 제가 무슨 고생이었겠냐”며, “그래도 오늘(30일) 숙소는 최창현씨 친구분 집으로 정해져 다행”이라고 말했다.

“우리 내일 아침 몇 시에 출발할까요?” 최창현씨에게 묻는 이경자씨의 목소리에서 지난 5일 간의 고단함이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 이정은 기자
- 국도를 따라 올라오는 동안 응원을 해준 시민들은 없었나.
“대구를 출발해서 경상북도를 벗어나기 전까지 지나가는 사람들이 많이 응원해 줬다. 국도를 지날 때 큰 트럭이 지나가면서 경적을 누르면서 응원해 줬던 것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너무 고마웠다.”

- 서울에서의 계획은?
“내일(31일) 한나라당과 민주당 앞에서 탄핵안을 가결시킨 장본인들의 책임을 묻기 위해 시위를 할 것이다. 그리고 헌법재판소 앞에서도 탄핵의 부당성을 알릴 것이다. 헌재는 법의 정신에 입각해서 판결을 내리겠지만 법은 만인 앞에 평등한 것이다. 그 만인은 바로 국민이다. 따라서 국민이 원하는 것이 진정한 법이다. 이렇게 볼 때 국민이 원하지 않는 탄핵은 정당한 것이 아니다.

가장 걱정이 되는 것은 대통령에 편지를 전달하는 것이다. 내일(31일) 청와대에서 편지를 직접 대통령께 전달하고 싶다. 이 편지는 내가 펜을 입으로 물고 직접 쓴, 국민의 뜻이 반영돼 있는 편지이다. 이런 국민의 뜻을 대통령이 전해 받음으로써 국민에 대해서 한 번 더 생각해보게 될텐데…. 내일(31일) 대통령께 편지를 전달하는 모습을 국민들에게 꼭 보여주고 싶다. 불가능하다면 청와대 민원실에라도 접수할 것이다. 순수한 국민의 뜻을 받아들이는 것 역시 청와대가 할 일이다."

“대통령은 국민을 위해서 반드시 힘내야”

- 편지 내용을 말해달라.
“이 자리에서 다 공개할 수는 없고 (웃음), 내일(31일) 청와대 앞에서 편지를 공개할 것이다. 간단히 말하자면, 이번 탄핵안 가결은 국민이 원하지 않았던 것이기에 대통령은 탄핵당했다고 볼 수 없다. 따라서 대통령은 힘내야 한다. 그러나 그 힘은 대통령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차가운 길바닥에서 매일같이 촛불을 밝히는 우리 국민 모두를 위해서 내야한다. 촛불이 밝히는 빛은 단순한 불빛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밝히는 빛이다. 이 빛에 보답하는 길은 대통령이 힘내는 것이다. 탄핵안 가결 이후 대통령의 모든 직무가 정지된 이 시간을 국민을 생각하는 시간으로 삼아라.

국민들은 16대 국회를 반복하는 잘못을 또 다시 저지르지 않기 위해 국민의 힘을 보여줄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 걱정이 되는 것은, 경찰이 촛불문화제를 불법집회로 규정하고 막은 것이다. 본래 사람들은 과거를 쉽게 잊는다. 그래서 탄핵사태도 쉽게 잊을까 하는 걱정에 촛불문화제가 계속되기를 바랬다. 하지만 나는 우리 국민이 바보가 아니라는 것을 안다.”

최창현씨와 정용기씨 인솔을 위한 이경자씨의 봉고차. 창문에는 '탄핵철회를 위한 대구~서울간 휠체어로 국토종단'이라고 씌여있다.
최창현씨와 정용기씨 인솔을 위한 이경자씨의 봉고차. 창문에는 '탄핵철회를 위한 대구~서울간 휠체어로 국토종단'이라고 씌여있다. ⓒ 이정은

- 박근혜 의원이 한나라당 대표로 선출된 이후, 대구의 여론이 한나라당으로 서서히 기울고 있다고 하는데, 실제 느끼기에도 그런가.
“(웃음) 의식이 깨어있는 사람들이 바른 선택을 할 것이라 믿는다.”

- 대통령이 헌법재판소의 공개변론에 참석하지 않겠다는 것으로 알고 있다.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대통령이 직접 출석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그래야 국민들도 대통령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 아닌가. 대통령을 탄핵시킨 그들은 본인의 허물이 많기 때문에 그 허물을 감추기 위해 대통령에게 허물을 덧씌우는 것이다. 대통령은 공개변론에 출석하여 당당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더 위대한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최창현씨에 비해 수줍음이 많았던 정용기씨는 인터뷰 후 “우리 회장님이 아직 장가를 못가셨는데, 빨리 우리 회장님 장가 좀 보내달라”며, “좋은 여자 있으면 우리 회장님 소개시켜 달라”고 기자에게 웃으며 부탁하기도 했다.

최창현씨와 정용기씨는 31일 오전 9시 서울 영등포역 광장을 출발하여 전동휠체어로 이동하며 하루 일정을 소화하고 오후께 대구로 내려갈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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