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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생 전 어머니의 모습
생 전 어머니의 모습 ⓒ 고성혁
어머니 방을 들여다보니 윗목에 마치 허물처럼 어머니의 버선 한 켤레가 보입니다. 장롱을 열었더니 어머니가 입으시던 웃옷 한 벌이 걸려 있습니다. 혼자 힘으로 외출이라고는 노인당 출입이 전부였지만 그때 늘 입고 다니시던 옷입니다. 옷을 보고 있노라니 생전 어머니의 구부정한 외출 모습이 불현듯 생각나 가슴 한 쪽이 슬며시 기울어집니다.

어머니는 여든 여덟을 사시다가 지난 2월 초에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퇴근해 돌아오면 힘줄만 남은 손을 내밀며 “내 아들 손 한 번 잡아보자”하시던 어머니가 영원히 우리 곁을 떠나신 것입니다.

어머니가 떠나시던 저녁 함박눈이 펑펑 내렸습니다. 발목까지 빠지는 눈길을 따라 올랐던 산과, 어머니를 언 땅에 묻고 나서 배가 고프다며 먹었던 점심 광경이 선명합니다. 삶과 죽음의 확연한 경계. 이 것이 우리들의 삶인가 생각하니 마음이 더할 수 없이 쓸쓸해집니다. 인생무상, 삶의 회의… 어렸을 적 아무 것도 모른 채 어른 흉내를 내며 되뇌었던 말의 의미가 오늘따라 선명하게 살아납니다.

창 밖을 내다보니 어머니가 가시던 저녁처럼 눈발이 흩날리고 있습니다. 지금 어머니는 어디서 무엇을 하고 계실까요? 내 삶의 주춧돌이셨던 어머니. 내 인생 50년을 변함없는 모습으로 긁어 보듬어주셨던 어머니. 내 두 아이를 오직 사랑으로 키워주셨던 어머니. 우리가 모시기보다는 거꾸로 우리 부부를 모셔주셨던 어머니를 다시는 볼 수 없다고 생각하니 해거름의 어둠처럼 설움이 짙어갑니다.

어머니가 정성을 다해 키워주신 내 아이들
어머니가 정성을 다해 키워주신 내 아이들 ⓒ 고성혁
20년을 함께 했던 큰 아이도 더 큰 공부를 위해 우리 곁을 떠났습니다.

외국을 나간 것도, 군에 간 것도 아니건만 이 녀석의 얼굴이 아른거립니다. 보고 싶으면 한달음에 내려올 수 있고, 언제나 통화하여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서울이라지만 내 곁을 한시도 떠난 적이 없는 녀석이기에 마치 물가에 놓인 아기처럼 마음을 놓을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부모의 마음인가요? 그 마음으로부터 나를 사랑해주셨던 어머니의 마음을 읽게 되어 맑은 눈물을 흘립니다. 그리고 나를 통해 이어지는 대대(代代)의 물림으로 하여 어떤 전율과 함께 어렴풋이나마 삶의 의미를 깨닫게 됩니다.

홀로 남은 시간에 이 녀석 방에 들어섰더니 빈 책상이 보입니다. 고3의 전쟁터 같았던 지난해에는 책상 위로, 책장 안으로 책들이 수북히 쌓여 있었건만, 지금은 적막강산의 쓸쓸한 모습입니다. 회자정리(會者定離)는 인간사의 정해진 이치라고는 하지만 녀석이 내 아들이었기에 그 감정이 더욱 강한 듯합니다.

녀석. 어제는 광화문의 교보문고를 다녀왔다면서 제 엄마더러 큰 소리로 말했답니다.

“엄마, 교보문고가 엄청나게 커! 광주 삼복서점의 20배는 되는가봐. 엄마는 가 봤어?”

그 말을 하는 아내는 아무렇지 않은 듯 보였지만 저는 그 얘기를 들으며 ‘우물 안의 개구리’ 같은 아이가 어떻게 서울살이를 해야 할 것인지의 걱정과 함께 우리들의 ‘이별’을 실감했습니다.

대학생활과 이어지는 군 생활, 그리고 취업과 결혼. 생각해보면 아이는 이제 내 곁을 아주 떠난 게 확실합니다. 결혼을 하여 나와 같이 살아준다고는 하지만 그게 어디 말같이 쉽게 이루어지는 일입니까.

커버도 덮이지 않은 침대 모서리의 전자기타. 그리고 아이의 서랍 속에 담긴 사진들을 말간 마음으로 한참이나 쳐다보다가 방문을 나섰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의 이별도 곧 야위어 갈 것입니다.

이별은 늘 설움이지만 그러나 거역할 수 없는 흐름이므로 내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겠습니다. 하지만 지금의 느낌과 쓸쓸한 감정만은 잊지 않고 간직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것이 주는 은은한 노을빛 정경을 떠올리며 삶을 추스르는 지렛대로 삼겠습니다.

이제 영영 가신 어머니와, 검정 양복의 숨죽인 모습으로 그 어머니께 마지막 예를 올리던 아이도 만(灣)을 비행하는 철새처럼 떠났습니다. 1월의 다섯 식구에서 둘이 떠나고 동그마니 셋만 남은 지금 우리, 길 잃은 아이처럼 어리둥절하지만 이게 세월이려니, 삶이려니 여기며 살아가겠습니다.

그래도 무력한 인간이기에, 가고 오는 이별에 내 유한한 목숨이 어둠을 밝히는 신작로의 알불처럼 쓸쓸해짐은 어쩔 수가 없군요. 어머니는 이럴 때 늘 이렇게 말씀하셨지요.

"그래도 살아야 해야… 설움은 곧 잊혀져야…."

덧붙이는 글 | 어머니께서 떠나시자마자 큰 아이도 우리 곁을 떠났습니다. 어머니는 영원한 길을 가셨지만 아이는 더 큰 삶을 위해 제 길을 갔습니다. 이별은 설움이지만 그래도 극복하고 살아가야만 하는 삶의 과정일 뿐입니다. 3월에도 눈이 내릴 수 있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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