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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결정신과 민중의 진취적인 기상이 넘치는 영산 쇠머리대기놀이
ⓒ 진홍

경향 각지에서 삼일절을 맞이하여 각종 기념 행사가 치러지고 있는 가운데 경남 창녕의 영산에서는 수천 수만명의 함성이 아우성치고 있었다. 마치 1919년 그 날의 만세 소리만큼이나 우렁차고 기세 등등하다. 영산에 가면 남녀노소 구별 없이 지역 주민 모두가 행사에 참가하여 신바람나게 춤추고 노래한다.

우리 나라의 민속놀이는 대부분 세시풍속과 함께 발전, 전승되어 왔다. 그런데 영산에서는 3월 1일에 민속놀이를 한다기에 좀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이미 정월대보름이 지난 지 꽤 되었는데 민속놀이라니 누구나 고개를 갸우뚱할 일이다. 그러나 벌써 이 행사는 40여년째다.

필자는 몇 년째 벼르다 연휴를 맞이하여 2월 29일 저녁 경남 창녕의 영산을 찾았다. 벌써부터 이곳은 온통 축제 분위기다. 어린이들과 중고등학생들은 각자 만든 등에 촛불을 밝히고 마이크를 잡은 사회자는 "남산의 푸른 대는 삼일정신 깃들었고… 항쟁의 횃불을 높이 들어라… "며 목청 높여 '결사대의 노래'를 선창한다. 3·1봉화대가 있는 남산까지 시가 행진을 하기 위해서다.

영산 주민들은 3·1절을 매우 큰 긍지와 자랑으로 맞이하고 있었다. 그것은 영산이 바로 1919년 당시 영남에서 가장 먼저 항일의 횃불을 치켜든 곳이기 때문이다. 전야제 시가 행진의 절정은 당시 24명의 결사대가 반일항쟁을 결행한 남산에서의 봉화 점화라고 할 수 있다. 영산 3·1민속문화제는 이렇게 여느 지역 민속행사와는 달리 3·1항쟁정신을 계승하여 양력 3월 1일을 전후하여 펼쳐진다.

▲ 영산 3·1민속문화제는 지역주민이 군중적으로 만들어낸다.
ⓒ 진홍

영산은 중요무형문화재 25호와 26호인 '영산쇠머리대기'와 '영산줄다리기'를 비롯한 '구계목도놀이' '문호장단오굿' 등이 행해지는 민속놀이의 보고다. 현대화와 도시화에 밀려 우리의 민속 문화가 점차 사라져가고 있는 현실에서 영산의 민속문화 행사는 민족 정신의 뿌리가 되는 전통 문화를 이해하고 조상들의 지혜와 문화적 우수성을 배울 수 있는 문화 체험 학교라고 할 수 있다. 문화관광부에서는 '영산 3·1민속문화제'를 지역 특성화 대표 민속 축제로 선정하였다.

드디어 3월 1일. 아침부터 영취산 자락 아래 자리잡은 '무형문화재놀이마당'엔 사람들이 운집하기 시작했다. 삼일절이 영산에서는 일년 중 가장 큰 행사이자 온 마을의 축제일이기 때문이다. 인근 영남 지방에서는 물론 서울과 강원도 등지에서도 먼길 마다하지 않고 영산의 자랑인 민속놀이를 구경하기 위해 몰려들었다.

사전 행사로 풍물 한마당과 민요 한마당에 이어 '작은쇠머리대기'가 펼쳐졌다. 어른들이 겨루는 쇠머리대기를 청소년들이 행하기에 붙여진 이름인 것 같다. 이곳에선 어려서부터 직접 체험을 통해 민속놀이를 배우고 익히기에 조상들의 지혜와 정신이 자연스레 전승되고 있다. 애기줄다리기에 해당하는 '골목줄다리기'는 초등학생과 청소년들이 동서 두 패로 나뉘어 골목에서 만나 힘을 겨룬다. 이들이 장성하면 영산쇠머리대기놀이나 영산줄다리기를 직접 만들 것이다.

이어서 행해진 영산 구계목도놀이는 노동 과정에서 창조하고 발전시켜온 것으로 교통 운반 시설이 없던 전통 시대에 무거운 돌이나 통나무를 옮긴 데서 유래한 민속놀이다. 목도는 힘만 세다고 되는 일이 아니다. 작은 건 2~4명에서 큰 것일 경우엔 16~32명이 짝을 이루어 맞서 메고 목도 소리에 발을 맞추어 산을 넘고 내를 건너 바위와 통나무를 옮겨야 했던 고된 노동에서 비롯된 것으로 협동이 필요한 것이다. 그래서 목도 소리엔 민중들의 애환과 신명이 묻어난다.

다음으로 영산 문호장굿은 이 고장의 전설적 수호신으로 받들어지는 문호장(文戶長)을 위령하고 숭앙하는 영산 지방 특유의 무속으로 많은 무당들이 모여 음력 5월 1일부터 6일까지 계속되던 큰굿이다. 370여년 전부터 시작되었다고 전해지며 일제에 의해 중단되었다가 1968년부터 재개되었다고 한다.

▲ 주민들이 들고 나온 온갖 깃발들이 난무하며 한판 난장판 싸움이 펼쳐지고 있다.
ⓒ 진홍

드디어 오늘의 가장 큰 행사라 할 수 있는 영산쇠머리대기가 펼쳐진다. 나무쇠싸움이라고도 하는 쇠머리대기는 우리 나라에 전승되는 민속 문화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크고 강렬한 특성을 가진 놀이다. 쇠머리대기는 두 마리의 나무로 만든 거창한 황소의 대결을 형상화한 놀이로 1969년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받았다.

속설에 따르면 영산을 가운데 두고 마주서 있는 영취산(영축산)과 함박산(작약산)의 모양이 두마리의 소가 마주 겨누고 있는 형상으로 둘 사이에 산살(山煞)이 끼어 있다고 하여, 산살을 풀어주기 위한 살풀이 민속의 하나로 이 놀이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쇠머리는 머리와 몸으로 구분되는데 머리 부분은 삼각형이고 몸통 부분은 직사각형으로 머리 높이를 5m쯤 생소나무와 새끼줄로 엮은 다음 오방색천으로 장식한 조형미가 돋보이는 구조물이다.

쇠머리대기에 앞서 동서편 서낭 대나무가 겨루는 서낭대대기가 서전으로 펼쳐진다. 마을의 상징이자 수호신으로 왕대에 오색천으로 장식한 서낭을 힘센 장정들이 신명을 돋구어 위세를 과시하는 놀이다. 서낭대가 부러지거나 땅바닥에 쓰러지면 지게 된다.

이어 치러지는 진잡이놀이에서는 장정들이 오색 영롱한 깃발과 농악대를 앞세우고 적진을 향해 함성을 지르며 돌진하여 일대 공방전이 펼쳐진다. 깃발이 찢어지고 깃대가 부러지며 군중들의 열기는 점점 절정에 다다른다.

사낭대대기와 진잡이놀이가 끝나면 싸움터로 나가기 위해 동서 양편에서는 농악을 치고 깃발을 흔들며 분위기를 고조시킨다. 쇠머리 위에서는 대장, 중장, 소장 세 사람이 올라타 칼춤을 추며 독전을 한다. 흥분된 군중들은 쇠머리를 메어 올리고 풍물 소리는 격렬해지며 군중의 함성과 함께 두 마리의 거대한 소가 위용을 자랑하듯 한바퀴 시위를 한다. 이윽고 기세가 한껏 높아지자 양편은 정면으로 돌진하여 "쾅"하고 머리를 부딪힌다. 소머리가 하늘로 치솟고 군중들이 온 힘을 다해 상대 쇠머리를 밀어붙이면 풍물과 함성은 절정에 달한다.

쇠머리대기는 강렬한 남성적인 놀이로 정면으로 질주하여 단 한판으로 승부를 낸다. 소의 머리를 서로 맞대고 밀어 승부를 가리는데, 뒤로 밀리거나 밑으로 깔리면 승부가 판가름난다. 그러나 쇠머리는 구조물이 삼각형으로 만들어져 땅바닥에 닿아도 쓰러지지는 않기 때문에 승자와 패자가 없다. 싸움이 끝나자 군중들은 서로의 노고를 위로하고 또 한판 풍물놀이를 벌여 화합과 단결의 신바람을 일으킨다.

잦은 외적의 침입에 저항하며 수백년 동안 쇠머리대기의 전통을 이어온 이곳 주민들의 단결된 저력은 일제 치하에서 항일 만세 운동을 부르는 원동력이 되었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는 곽재우 장군을 비롯한 활발한 의병 활동과 민중의 항거로 왜적을 물리치며 마을을 자주적으로 지켜온 정신도 바로 이런 데서 비롯되었다 한다. 조상들의 애국, 애향 정신을 이어 받아 펼쳐지고 있는 것이 바로 오늘의 영산 '3·1민속문화제'인 셈이다.

▲ 골목줄다리기는 어린이와 청소년들이 조상들의 지혜와 정신을 배우는 체험현장이다.
ⓒ 진홍

다음 날 펼쳐졌을 중요무형문화재 26호인 영산줄다리기는 내년에 구경하기로 하고 발길을 돌리는 게 못내 아쉬었다. 골목줄다리기를 보며 박수를 치고 춤을 추던 김정수(85) 할아버지는 "줄다리기는 군중들을 한꺼번에 동원하기에 가장 좋은 놀이로 예전엔 줄 길이가 100에서 150m 이상이었으며 동원된 인원도 5~6만에 달했는데 요샌 많이 쪼그라졌다"고 아쉬워하셨다. 영산은 어떤 곳이냐고 묻자 할아버지는 한마디로 "억세다"고 대답하신다.

선사 시대로부터 가야 시대를 거쳐 오늘에 이른 이 고장은 주변에 유명한 우포늪을 비롯한 수많은 유물과 유적이 있어 제2의 경주로도 불린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지역 민중의 단결력과 저항 정신이 만들어낸 쇠머리대기와 줄다리기 등 민속놀이에 대한 영산 주민의 자부심과 긍지가 유달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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