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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장성군 황룡면 금호리. 마을 앞 큰길에 차를 세워두고 낯선 시골 마을을 가로질러 한참 걷노라면 마을 끝 산모퉁이엔 노송 몇 그루가 제법 어우러진 오솔길이 나타난다. 그 오솔길을 따라 조금 걷다 보면 제법 큼지막한 묘 하나가 있다.

그 유명한 청백리 박수량 선생의 묘다. 언뜻 보면 그저 평범한 묘다. 그러나 국사 송병준이 지은 신도비에 김인후 선생이 쓴 묘지명을 보면 결코 범상치 않은 묘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400여 년전 긴 세월을 이곳 유택에 잠든 망인의 인품에 앞서 묘 앞에 세워둔 묘비가 참으로 이채롭다.

하얀 비석. 백비(白碑)다. 묘 앞에 세워 두었으니 묘비임은 분명하나 아무리 보아도 글자 한 자 없다. 그렇다고 이게 아무데나 굴러다니는 자연석을 그대로 세워둔 건 아니다. 어느 석공의 손길에 잘 다듬어진 돌 하나. 전라북도 부안 지방에서 출토되는 활석이라니 비석재로는 최상급이다.

그런데 왜 글자 한 자 새겨 두지 않고 백비(白碑)로 세워 두었을까? 알고 보니 사연도 많은 비석이다.

정혜공 박수량 선생님. 그는 1491년에 전라남도 장성군 황룡면 산골마을에서 태어나 어려서는 신동 소리를 들으며 자란 기재요, 12살 때는 무장백일장에서 장원까지 한 재동이었다. 23세엔 진사 시험에 합격했고 35세엔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64세까지 39년간을 예조, 형조, 호조, 병조. 한성 판윤. 평양. 전라감사 좌찬성지중추부사 등 요직을 두루 지낸 이름난 조선의 충신이요, 한 평생을 청렴결백하게 산 청백리였다.

또한 선생은 실로 하늘이 내려준 효자였다. 선생께서 벼슬길에 올라 부모님 곁을 잠시 떠나게 되었다. 그 때 아버지께서 병환이 들자 선생은 아버지의 병환을 간호해 드리기 위하여 고부 군수로 임지를 옮겨 병간호에 정성을 다하였다. 부모님이 돌아가시자 관직을 버리고 3년 동안 상례를 지냈고, 중종 26년에는 다시 어머니의 병환 때문에 보성 군수로 옮겼다가 그 후 호조 참판으로 있을 때 임금님께 사의를 표하였으나, 뜻대로 되지 못하자 담양 군수로 내려와 재발한 어머니의 병환을 돌보았다. 그리고 어머니께서 세상을 떠나시자 3년 동안 무덤 옆에 움막을 짓고 살면서, 그곳을 잠시도 떠나지 않고 소리 높여 통곡하였던 이름난 효자이기도 하였다.

이렇듯 나라에는 충성, 부모에는 효도를 하는 선생의 고매한 인품이 어쩌다가 임금님의 귀에까지 전해지게 되었다. 어느 해 명종 임금께서는 박수량 선생이 너무도 청백하다는 소문을 듣고 암행어사를 두 차례나 보내어 확인해 보았더니 정말 그는 변변한 집 한 채 없이 청빈하게 살고 있었단다.

그래서 명종 임금은 하남골에 99칸짜리 청백당(淸白堂)을 지어주고 후한 상을 내려 주었다. 그리고 박수량 선생이 세상을 하직하고도 운상비조차 없다는 소리를 듣고 또 일체의 비용을 부담, 예장을 치러 주고 서해안 바닷가의 돌을 골라 비(碑)를 하사했다. 그런데 그 비(碑)에 비문(碑文)을 새긴다는 게 오히려 선생의 생애에 자칫 누가 될까 싶다며 묘 앞에 그냥 세워 두기로 했으니……. 이게 바로 그 유명한 백비(白碑)가 아니던가.

사람이 일생을 깨끗하게 살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더구나 39년 간의 긴 공직 생활을 청빈하게 살아 세인의 추앙을 받기란 더욱 어려운 일이다. '청백리' 아무에게나 붙여지는 호칭이 아니다. 요즘처럼 사회가 혼탁할 때는 더욱 돋보이는 청백리상이다. 살아서 청빈하게 살던 선생께서 죽어서도 빈 돌 하나로 후손들의 가슴에 감동을 주고 있음은 실로 부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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