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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든 아저씨는 노를 젓고 젊은 우리는 앉아서 구경하자니 조금 부끄러웠다
나이든 아저씨는 노를 젓고 젊은 우리는 앉아서 구경하자니 조금 부끄러웠다 ⓒ 신우철
다음 날 우리는 민박집 아저씨께서 노를 젓는 배를 타고 섬 주위를 둘러보았다. 파도가 부서지는 갯바위들을 솜씨 좋게 피해 아저씨는 우리를 동굴 속으로 데려갔다. 높이 올려다 보이는 어두컴컴한 천정 한 쪽으로 아득한 빛무리가 쏟아져 내리고 우리는 눈이 부셨다. 깎아지른 듯한 절벽을 돌아 하얀 등대가 있는 섬에 우리를 내려놓고 아저씨는 되돌아갔다.

우리는 풀밭으로 난 길을 걸어 등대섬의 절벽 끝까지 걸어갔다. 그 절벽 위에 서서 그 아래 펼쳐진 광대한 바다를 한눈에 담았다. 누구도 감히 말을 꺼내려고 하지 않았다. 우리는 대자연이 빚어낸 이 장엄한 풍경에 완전히 압도되어 있었다. 아마추어 사진작가이기도 한 선배는 나를 모델로 사진을 몇 장 찍었다. 나는 풍경과 하나가 되었다!

선배는 이 사진에 <아도니스의 탄생>이라고 이름붙였다. 그럴 만한가?
선배는 이 사진에 <아도니스의 탄생>이라고 이름붙였다. 그럴 만한가? ⓒ 신우철
썰물이 되면 이어지는 몽돌밭을 걸어 우리는 등대섬에서 본섬으로 이동했다. 아쉬운 듯 자주 뒤돌아보면서. 가파른 풀밭 사이로 겨우 자국만 나 있는 길을 걸어 우리는 마을로 접어들었다. 섬의 꼭대기쯤에서 시작되는 마을의 입구에는 아주 조그마한 국민학교가 바다를 굽어보고 있었다. 소하 국민학교 소매물도 분교장.

방학이라 손바닥만한 운동장은 텅 비어 있고 교무실과 교실 하나뿐인 학교 건물은 닫혀 있었다. 우리가 시소를 타고 있는 사이, 호기심 많은 선배는 요령 좋게 교실 문을 열었다. 지우지 않은 칠판에는 노래 가사로 보이는 글이 2절까지 쓰여 있었다. '넓고 넓은 바닷가에 외로운 섬 소매물도'로 시작되는 것으로 보아 이 작은 학교의 교가인 모양이었다.

아이들처럼 시소를 타며 우리는 크게 웃었다
아이들처럼 시소를 타며 우리는 크게 웃었다 ⓒ 신우철

내 생애 가장 즐거웠던 음악시간
내 생애 가장 즐거웠던 음악시간 ⓒ 신우철
우리는 즉흥 음악교실을 열었다. 선배의 동생은 노래를 부르고 선배는 탬버린을 흔들고 선배의 여자친구는 풍금의 건반을 누르고 나는 작은 북을 쳤다. 그것은 내 생애 제일 즐거운 음악수업이었다. 뭍에서 멀리 떨어진 섬의 단 하나뿐인 교실에서 이렇게 즐거운 음악수업을 가지게 될지 그 누가 알았겠는가!

그 날 저녁노을은 붉었고 우리는 다시 손전등을 들고 선착장으로 걸어 내려가 하늘의 별들을 향해 손전등의 빛을 쏘아 올렸다. 우리가 쏘아 올리는 이 손전등 빛 때문에 저 뭍의 어디쯤에서 지금 밤하늘을 쳐다보고 있는 그 누군가의 눈에는 분명 별들이 더 환하게 보일 거라고 생각하면서.

다음 날 우리는 짐을 꾸리고 통영으로 가는 여객선을 타고 소매물도를 떠났다. 배웅 나온 민박집 아주머니와 아저씨는 한참 동안이나 손을 흔들어주었다. 우리도 손을 흔들어주었다. 그러나 우리는 민박집 주인 내외가 아니라 어쩌면 우리 시야에서 점점 작아지는 저 소매물도에게 손을 흔들어준 것이 아니었을까.

섬은 멀어지고 우리는 드디어 뭍에 발을 들여놓았다. 버스 터미널에서 전화번호를 서로 교환하고 우리는 헤어졌다. 휴가는 끝나고 또 지겨운 일상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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