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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 교동이발관 간판. 교동 전에는 이름이 뭐였을까?
ⓒ 느릿느릿 박철

나는 머리카락 숱이 많고 빨리 자라서 보통 20여일이면 이발을 해야 합니다. 또 머리카락이 빳빳해서 머리 손질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그래도 작년부터 헤어드라이기로 이마가 드러나게 다듬고 딴에는 모양을 냅니다. 이마가 드러나면 젊게 보인다고도 하고 인물이 그래도 봐줄 만 하다고 합니다. 오늘도 단골 이발관을 찾았습니다.

교동이발관 아저씨와 퍽 친해졌습니다. 일년에 열다섯 번을 6년 동안 다녔으니 90번을 다닌 셈입니다. 90번을 다니면서 이발사 아저씨와 농을 주고받을 만큼 관계가 친밀해졌습니다. 시골 이발관이어서 냄새도 쾌쾌하고 머리를 감아줄 때는 뻣뻣한 솔로 머리를 좌우로 박박 문지르는데 처음에는 얼마나 아픈지 머리칼이 죄다 벗겨지는 줄 알았습니다.

나도 미련해서 아프다는 말도 못하고 꾹 참고 있으면 이발사 아저씨가 대충 물기를 털어 주고 서비스로(서비스를 강조함) 건강음료 한 병과 영양제 한 알을 줍니다. 별로 내키지 않는 것이지만 받아먹습니다. 나이가 좀 드니까 세상의 자질구레한 일에는 이제 좀 감각이 무뎌졌다고 할까요.

한번은 머리 손질을 다하고 스킨로션을 발라주는데 30년 전부터 시골 이발소 애장품인 ‘아모레’ 로션을 발라주는데 사실 냄새가 좀 그렇잖아요. 그래서 처음으로

▲ 수건이 차곡차곡 개켜져 있다. 우리네 인생도 저렇게 정리할 수 있을까?
ⓒ 느릿느릿 박철
“아저씨 서비스로 스킨로션은 좀 좋은 거로 씁시다. 거 맨 날 싸구려로 발라주지 말고 !”

했더니 아저씨가 화가 단단히 났습니다.

“목사님! 이게 얼마짜린 줄 아시오?, 이게 싸구려라구?. 똑바로 알고나 얘기 하셔야지!”

그러면서 약간 신경질 적으로 대답을 하시는데,

‘아뿔사, 내가 실수 했구나’
“아저씨 내가 잘못 알았나 봐요, 그러고 보니 냄새가 좋네요!”


교동이발관 아저씨는 한 '성질'합니다. 술을 한번 먹었다하면 일주일이고 열흘이고 이발관 문을 닫고 완전히 끝장을 내고 맙니다. 속상한 일이 많으신 모양입니다. 그러면 내 머리는 누가 깎아 준단 말입니까? 하는 수 없이 아내를 데리고 가서 여자미용실에서 깎은 적이 두어 번 됩니다.

그런데 도무지 내 취향이 아닙니다. 이발소 문을 잠그고 술을 자시는 임시휴업기간에 이제나 저제나 하면서 여섯 번을 허탕 친 경험이 있습니다. 칠전팔기라고 문을 열 때까지 갑니다. 삼선리에도, 고구리에도 이발소가 있지만 이상하게 안 가게 됩니다.

오로지 교동이발소만 갑니다. 그렇게 골탕을 먹어도 아저씨가 밉지 않고 큰 형님 같아서 가게 됩니다. 어쩌다 서울에 가게 될 경우도 서울에서 깎지 않고 교동이발관에 와서 깎습니다. 특별히 머리를 잘 깎고 머리손질을 잘 해주어서가 아닙니다.

내가 왜 한군데 이발관에 집착하는 것일까 생각해 보았는데 두 가지였습니다. 하나는 ‘편하다.’ 또 하나는 만 6년 동안 정이 들었고, 내 머리스타일을 “짧게 깎아라.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이런 잔소리하지 않아도 알아서 깎아주기 때문입니다.

나는 농촌목회자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목회에 무슨 세련된 기술이 필요하겠는가마는 설령 그런 것이 있더라도 시골목사가 공연히 도시 목사 흉내 낼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무슨 ‘교회성장 세미나’ 같은데 가서 기술 같은 거 전수받으려는 짓은 안했으면 싶습니다. 그저 소탈하고 조금은 빈듯하고 누구에게나 형님 같고, 친밀감을 줄 수 있는 그런 목사가 되었으면 좋겠다 생각합니다. 내가 그런 사람이라는 것은 아니니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 교동이발관 지광식 아저씨. 말도 구수하고 미남이다. 젊어서 여자 많이 울렸겠다.
ⓒ 느릿느릿 박철

어느날, 교동이발소 지광식(64세. 황해도 연백군 호동면 나당리) 아저씨께 <오마이뉴스>에 아저씨 얘기 좀 써도 되겠냐고 했더니, 좋다고 하면서 그간에 속에 담아 두었던 얘기를 다 털어놓으셨습니다. 장장 한 시간 넘도록 점심밥도 못 먹고 아저씨 얘기를 재밌게 들었습니다. 얼마나 구수한지 모릅니다.

-아저씨 교동에는 몇 살 때 건너 왔어요?
"내가 연백에서 열세 살 때 내려왔어. 6.25전쟁 그 다음 해야. 새벽녘에 야음을 틈타 피난민들이 목선을 타고 노를 저어 바다를 건너는데 얼마나 배에 사람이 많이 탔던지 움직일 수가 없는 거야. 새벽이니까 파도도 없고 잔잔해서 그렇지, 파도만 있었으면 배가 갈아 안기 직전이었어!”

-그때 교동 사람들 형편이 어땠어요? 전쟁이라 형편없었을 텐데요?
"아이구, 완전 거지소굴이나 마찬가지지 뭐. 대룡리 시장바닥이 사람으로 바글바글 했어. 전쟁나기 전부터 흉년이 들어 그 때 유행했던 말이 3년 숭년(흉년)에 모 이꽜네?(뭐 있겠냐?)” “모 이꽜네?”가 완전 교동 말이야. 교동 섬에 2만 명이 넘게 살았으니까 말다했지 뭐. 안 그래? 지금 대룡리 시장이 서울 명동같이 사람이 많았어. 완전 먹자골목이었지. 국수장사, 국밥장사, 떡장사, 대폿집 순 먹는장사뿐이었어."

-어떻게 해서 이발기술은 배웠어요. 처음부터 이발사가 되려고 시작한 일이었어요?
"아. 처음에 워낙 먹고 살게 없으니까, 입하나 덜라고. 입에 풀칠이라도 해야잖아. 그 때가 내가 16살 때야. 한달에 6천원 받기로 하고 이발소에 취직을 했지. 하는 일이란 게 질통지고 물 길러 나르고. 그 때는 석유고 전기고 없으니까 연료를 무엇으로 했느냐? 토탄이라는 게 있었어. 박 목사는 모를 거야? 그걸 땠어. 화개산이 완전히 헐벗어서 산이 벌개. 잔디도 다 캐다 땠으니까."

▲ 모내기철이라 손님이 없다. 오랫만에 손님이 오셨다. 면도질 하는 손이 바쁘시다.
ⓒ 느릿느릿 박철

한밤중에 물지게로 물을 저 나르는데 하루 일곱 번을 저 날라야 돼. 겨울이면 냇골에 가서 얼음을 깨고 물을 저 날라다 드럼통에 가득 채워 넣는 거야. 나중에는 그 먼데서 물을 저 나르는데 물 한 방울 흘리는 법이 없었어. 겨울에는 아까 말 한대로 고구리에 가서 땅을 한길을 파고 시커먼 토탄을 낫으로 두부 자르듯 잘라요. 그걸 떼서 지게에 저다 산에 가서 말려 갖고 벽돌 같이 생긴 토탄을 지게에 많으면 백장씩 저 나르는 거야. 죽을 똥 살 똥 하는 거지."

-그럼 이발소주인이 이발기술은 안 가르쳐 주던가요?
"처음부터 가르쳐주나. 처음에는 손님들 머리 감겨주고, 면도칼 갈고 간간히 만만한 사람들 면도부터 했지, 맨 날 주인 뒤에서 이발하는 거 눈여겨 보아두었다 해보는데, 손이 서툴러서 실수 많이 했어. 그래도 한 3년 하니까 웬만큼 하겠더라구.

-이발소 주인에게 기술 배우면서 구박은 안 받았어요? 옛날 사람들은 기술을 잘 안 가르쳐 주었다고 하던데.
"그 때는 전기가 없었잖아. 손님이 많을 적에야 호얏 불도 켜고 머리를 깎기도 했지만, 보통 때는 사람이 없어. 그래서 매일 저녁 물지게로 물을 저다가 그 다음날 쓸 물을 드럼통마다 가득 채워다 놓는 거야. 그러면 주인 여자가 얌체같이 한밤중에 그 물로 빨래를 하는 거야. 한번은 아침에 일찍 나와 물통을 보니 물이 하나도 없는거야. 미치겠더라구. 그래서 내가 화가 잔뜩 나서 주인보고 밥 먹으로 갔다 온다고 하구선 4홉들이 소주 한 병을 사들고 화개산엘 올라갔었지. 산에 무슨 안주가 있나? 산에 ‘싱아’라는 게 있었어. 박 목사는 먹어봤어? (예) 그걸 따서 안주 삼아 먹었지. 점심도 굶고. 박 목사, 말 마시겨. 고생 수태 했어! 지금 생각해도 지긋지긋해."

▲ 세면대. 타일과 양동이가 정겹다. 나도 저기서 머리 감고 싶다.
ⓒ 느릿느릿 박철
-지금 아주머니와는 어떻게 만나셨어요? 부부 금슬은 좋으셔요? 아저씨 옛날에 여자 깨나 울렸겠는데요?
"그 때 내가 스물 두 살이었어. 지금 우리 마누라는 스무 살이고, 물지게 지고 물 길러 다니다 눈이 맞았지. 우리 장인 네는 교동 부자였어. 여관을 하고, 뜰 안에 우물이 있을 정도였고, 그 일대가 다 우리 장인 땅이었지. 둘이 눈이 맞아 연애질을 했는데 소문이 대룡리 바닥에 다 났지. 그야말로 나야 빈털터리에 불알 두 쪽밖에 더 있어. 어느 날 장모가 날 보자데. 그래 내가 다리가 후들거려서 소주 반병을 먹고 갔지. 그래야 용기가 생기겠더라구.

장모가 대뜸 “이발소 총각 앉으라.” 그러잖아. 내 이름을 안 부르는 거야. 솔직하게 다 얘기해보래. 그래서 내가 그랬지 “둘이 좋아하는 사이다. 선을 넘어섰다.” 까짓 배짱으로 나갔지 뭐. 그러니까 장모가 어이 없어 하더라구. 그 때 마누라가 임신을 했었어. 그러니까 사람들이 “야, 순자는 자동적으로 굴러오게 돼 있어. 신경 쓸 거 없다.” 그러더라구, 우리 연애한 거 우여곡절이 많아. 우리 마누라, 나 만나서 고생 많이 했어. 불쌍한 여자지."

-그럼 그 때부터 계속 이발만 했어요?
"아냐, 내가 이발소 차려 몇 년 했었지. 그러다가 바람이 들어 중동에도 2년 갔다 오고, 외항선도 1년 6개월 타고 대룡리에서 술장사도 한 2년 해 봤고, 나머지 세월은 다 이발소 했지. 그럭저럭 내가 이발사 노릇한지가 40년이 넘었어."

-그동안 돈 좀 많이 벌었나요.
"많이 벌긴 뭘 벌어. 자식새끼들 키우고 사느라 모아 논 재산이 있나? 그냥 먹고 살만 해. 먹고 사는데 근심 걱정 없이 살면 되는 거 아냐."

▲ 대룡리 시장골목. 교동의 명동이다. 없는 것 없이 다 있다. 돈만 있으면 다 살 수 있다.
ⓒ 느릿느릿 박철

교동 이발소 지광식 아저씨(64세)는 “사진을 뭘, 자꾸 찍어.” 그러면서도 기분 나쁜 기색은 아니었습니다. 지면상 삼분의 일도 여기에 다 적지 못했습니다. 나와 얘기하는 동안 담배를 여섯 대를 피웠습니다. 옛날 얘기하면서 속이 타는 모양입니다.

지난 50년 세월이 간단치는 않았을 것입니다. 지광식 아저씨의 드러나지 않은 깊은 속내를 내가 어찌 다 알겠습니까? 참 외로운 분이었겠다 싶습니다. 앞으로 형님 삼아야겠다고 생각하면서 이발소 문을 나섰습니다. 머리를 깎고 집으로 가는데 모내기 한 들판이 파랗습니다. 교동의 너른 들판이 평화롭게 다가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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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철 기자는 부산 샘터교회 원로목사. 부산 예수살기 대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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