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인촌주식회사 공장 노동자 여직공 170명이 동맹파업에 가담했다고 보도한 1931년 8월 26일 자 <동아일보> 7면 상중단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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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독립운동진영에는 이른바 '빨갱이'들이 많았다. 이 점은 국내 운동가들이 많이 투옥된 서울 서대문형무소의 수감자 실태에서도 증명된다. 현존하는 서대문형무소 수형기록카드를 분석한 박경목 서대문형무소역사관장의 논문 '일제강점기 서대문형무소 수감자 현황과 특징'은 국내 독립운동의 그 같은 실상은 대략적으로 보여준다.
2016년에 <한국근현대사연구> 제78집에 실린 이 논문에 따르면, 죄명이 확인되는 서대문형무소 수감자는 4630명이다. 그중 가장 많은 유형은 오늘날의 국가보안법에 해당하는 치안유지법 위반자들이다. 논문은 이렇게 설명한다.
"치안유지법 위반(2745명)이 가장 많았으며, 보안법 위반(1171명), 국가총동원법 위반(479명), 소요(75명), 출판법 위반(47명), 강도 (20명), 살인(12명)의 순이다."
치안유지법·보안법·출판법 위반자와 소요죄 행위자들은 사상범으로 분류됐다. 논문은 "가장 높은 비율을 보이는 항목은 사상범죄"라며 "죄명 확인 인물 4630명 가운데 87.73%를 차지"한다고 설명한다. 국내 독립운동을 중점적으로 조명하다 보면, 이른바 빨갱이들이 다수였던 국내 독립운동의 실상을 피할 길이 없게 된다.
위 논문에 따르면, 국가총동원법 위반자가 10%를 넘는 479명이다. 윤석열 정권이 제3자 변제로 봉합한 강제징용은 바로 이 국가총동원법에 근거한 것이었다. 그래서 이 법을 거부한 사람들의 활동을 조명하게 되면, 강제징용·강제징병·물자징발 등에 대한 당시 한국인들의 저항이 확인된다. 전범기업의 책임을 덮어주고 제3자 변제로 봉합할 사안이 아니라는 점이 명확해진다. 그래서 이 분야의 국내 독립운동은 윤석열 정권 굴욕외교의 반민족성을 부각시킬 수밖에 없다.
3·1절 기념사에서 윤 대통령은 외교 및 교육·문화 분야의 독립운동을 특별히 강조했지만, 국내 독립운동의 주류는 이 분야가 아니었다. 소작쟁의와 노동쟁의가 중심이었고 공산당 계열 독립운동이 주류였다. 국가보훈부가 웬만해서는 독립운동으로 인정해 주지 않는 이 분야가 실상은 한국 독립운동의 주류였다.
성냥이 인촌(燐寸)으로 불리던 시기에 인천의 조선인촌제조주식회사 노동자들은 총독부의 비호를 받는 이 일본인 독과점기업 밑에서 성차별과 민족차별을 받았다. 1929년에 대공황이 발생하자 이 일본 기업은 한국 노동자들에게 부담을 전가시켰다. 노동자 임금을 7~30% 삭감한 데 이어 여성 노동자들의 임금을 10% 추가 삭감하는 일을 벌였다.
그러자 추가 삭감이 통보된 1931년 8월 15일, 김순이·이용림·윤기영·성하분을 비롯한 여성 노동자 180명이 사업장을 점거하고 파업에 돌입했다. 이들은 일제 경찰의 출동에도 굴하지 않고 버텨냈다. 그 결과, '임금 인하 조치의 무조건 철회'라는 항복 각서를 11일 만에 받아냈다. 그 뒤 상황이 역전돼 파업 참가자 상당수가 해고되기는 했지만 인천 성냥공장 노동자들은 항일투쟁의 성격을 띤 파업에서 역사적인 승리를 거뒀다.
1927년 5월 16일에는 일제의 어업 침탈에 맞선 항일투쟁이 제주 성산포 씨름대회를 계기로 폭발했다. 고은삼 등이 이끄는 500여 명의 제주도민들이 약 200명의 일본 어선 관계자 및 한국인 고용인들을 공격해 섬 밖으로 내쫓았다.
윤석열 정권, 국내 독립운동 역사도 회피할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