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 초대 대통령 취임식
대통령기록관
대한민국 정부 초대 대통령 취임사에서 이름이 언급된 여성이 있다. 1948년 7월 20일 국회에서 대통령으로 선출된 73세의 이승만은 24일 취임식 때 특정 여성의 이름을 언급하는 파격을 연출했다.
이날 이승만은 "여러 번 죽엇든 이 몸이 하나님 은혜와 동포의 애호로 지금까지 사러 있다가 오늘 이와 같이 영광스러운 추대를 밧는 나로는 뼈에 맺치는 눈물을 금하기 어려웁다"라는 첫 문장으로 취임사를 시작했다. 그러다가 국제연합(유엔) 임시본부가 있는 뉴욕주 롱아일랜드섬 레이크석세스에 나가 있는 임영신(1899~1977)의 실명을 거론했다.
"9월에 파리에서 개최하는 유엔 총회에 파견할 우리 대표단은 아직 공포는 아니하였으나 몇몇 고명한 인격으로 대략 내정되고 있으니 정부 조직 후에 조만간 완정 공포될 것이다. 한편, 우리의 대표로 레이그썩세스에 가서 많은 성적을 내고 있는 임영신 여사에게 대해서는 우리가 다 고맙게 생각하는 바이다."
해방 직후인 1945년 10월 조선여자국민당 위원장이 된 임영신은 이듬해에 미군정 자문기관인 남조선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민주의원) 의원이 되고 1947년에 중앙여자대학 학장이 됐다. 이 학교는 지금의 중앙대학교로 발전했다. 해방정국하에서 정치인과 교육자로 두각을 보이던 그가 대통령 취임사에서 거명되는, 이변이라면 이변인 사건의 주인공이 됐던 것이다.
취임식 뒤인 8월 4일, 임영신은 15일 출범할 대한민국 정부의 초대 상공부 장관으로 발탁됐다. 5일 자 <조선일보>는 기사 부제에 "상공에 임여사"라는 표현을 썼다. 취임사에서 거론된 데 이어 상공부장관으로도 임명된 '임 여사'는 이 시기 이승만 정권의 2인자로 부각됐다.
대통령의 전폭적 신뢰를 받은 그는 현직 장관직을 보유한 상태로 1949년 1월 13일 경북 안동에서 국회의원 보궐선거에 출마해 당선됐다. '국무위원이 국회의원에 출마해도 되나'라는 비판적 시선을 무시한 채 출마를 단행하고 당선까지 된 것은 이승만의 전폭 지원이 없고서는 힘들었다.
이로써 임영신은 정치적 절정에 올랐으나 더 이상 뻗어나가지 못했다. 보궐선거 때 관권을 남용해 부정선거를 했다는 비판을 받은 그는 유명한 '임영신 독직사건'에 휘말리고 그해 6월 장관직에서 물러난다. 갓 출범한 이승만 정부에서 주목도 크게 받고 평지풍파도 크게 일으켰다가 얼마 안 있어 물러나게 된 것이다.
이승만이 취임사에서 임영신의 실명을 굳이 거론한 것은 유엔의 지지를 받기 위한 외교 활동이 그만큼 중요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반드시 그것 때문이라고는 보기 힘들다. 두 사람의 사연을 들여다봐야 한다.
이승만의 프러포즈 거절
3·1운동 4년 뒤인 1923년 9월 1일 일본에서 관동대지진(간토대지진)이 발생하고 이를 틈 타 한국인 대학살이 자행됐다. 그로부터 얼마 뒤, 미국 유학을 준비 중이던 임영신은 대학살 참상을 찍은 유학생 김낙영의 사진을 미국의 이승만에게 전해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임영신은 회고록 <나의 40년 투쟁사>에서 학생 시절 이승만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를 떠올리면서 "그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부터 나는 이 박사를 만나려고 열망했다"고 말했다. 사진을 전해달라는 부탁을 받고 처음엔 주저했던 임영신이 결국 승낙한 것은 이 기회에 이승만을 만나볼 수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부산에서 승선한 지 19일 만에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임영신은 파레스호텔을 찾아 문제의 사진을 이승만에게 전달했다. 1972년 2월 23일 자 <경향신문> '내가 겪은 이십세기 (8): 승당 임영신'은 사진을 받은 이승만이 임영신의 등을 두드리며 "너 같은 용감한 딸이 있으니 조선은 꼭 독립될 거야"라며 "앞으로 자주 찾아와 나를 도와달라"며 미소를 지었다고 썼다.
그렇게 시작된 임영신의 미국 생활이 여러 해가 흘렀을 때였다. 그의 은사이자 다이빙 스타 세미리의 아버지인 임순길이 그를 저녁 식사에 초대했다. 위 기사는 "이씨가 이 박사의 뜻이라고 하면서 그와 결혼을 했으면 좋겠다는 말을 했다"고 알려준다. 이승만이 임순길을 통해 간접 청혼을 했던 것이다.
이승만의 프러포즈는 정중히 거절됐고, 두 사람의 친분은 계속 유지됐다. 정부수립 뒤에 임영신을 중용한 데서도 느껴지듯이 그 뒤로도 이승만은 항상 임영신을 가까이하려 했다. 임영신이 자기 호를 승당(承堂)으로 지은 것도 이승만에 대한 인식 때문이다. 이승만의 이름을 집어넣은 승당은 여러 가지 방식으로 해석될 수 있지만, '이승만의 집'으로 번역돼도 무난하다.
두 사람의 관계는 재미교포들 사이에서도 유명했다. 1973년 4월 6일 자 <동아일보> '비화 제1공화국 (3)'은 "이 박사가 아직 프란체스카와 결혼하기 전인 1932년 워싱턴의 교포들은 이 박사와 임영신과의 결혼을 청할 만큼 두 사람은 가까웠다"고 썼다. 이승만이 대통령 취임사에서 임영신을 거명한 데는 이런 사연도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