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6.25 12:18최종 업데이트 24.06.25 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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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시절에 주목받은 영화인 중에 김소동(金蘇東) 감독이 있다. 일본 니혼대학과 도쿄중앙음악학교를 나와 36세 때인 1947년에 '광복 이후 최초의 발성 영화'인 <모란등기>를 제작해 이목을 집중시키며 화려하게 등장한 감독이다.

그해 2월 9일 자 <경향신문>은 "모란등기는 김소동 연출의 전(全) 발성 16미리로, 내용은 순전히 중국의 유령 애화(哀話)"라며 기대감을 일으켰고, 6월 6일 자 <조선일보>는 "우리 손으로는 처음인 16미리 영화 녹음을 완성"했다고 보도했다. 첫 작품이 나오기 전부터 김소동에 대한 관심이 대단했던 것이다.
 

영화 <돈>의 포스터 ⓒ 한국영상자료원

  
그의 대표작은 47세 때인 1958년 3월 9일 개봉한 <>이다. 이 영화에는 가난에 쪼들리는 봉수(김승호 분), 그의 아들 영호(김진규 분), 영호의 애인인 옥경(최은희 분)이 등장한다. 봉수는 옥경이 사채업자 억조(최남현 분)에게 성폭행당하는 현장을 목격한다. 이런 상황에서 봉수는 엉뚱하고 기막히게도 억조가 흘린 돈을 주워 담는다.

그러다가 봉수는 억조와 싸움을 하게 되고 얼떨결에 살인을 저지른다. 이 현장에서 돈을 주운 옥경은 영호와 함께 서울로 떠나려다가 살인범으로 지목돼 체포된다. 두 사람은 기차에 태워져 경찰 본서로 압송된다. 봉수는 떠나는 기차를 쫓아가며 나를 잡아가라고 외쳐댄다.


1958년 영화계를 총평하는 12월 24일 자 <동아일보>는 "비교적 수준이 높고 양심적인 작품"이라고 <돈>을 호평하면서 관객 5만 명이 돌파한 사실을 소개했다. 이 기사는 홍성기 감독의 <별아 내 가슴>이 13만 7000명을, 김화랑 감독의 <사람 팔자 알 수 없다>는 10만 7000명을 동원한 일을 언급하면서 "두 편이 10만대를 돌파"했다고 전했다. '10만 관객' 돌파가 어렵던 이 시절에 <돈>은 5만을 넘었다. 내용도 좋고 성적도 좋았던 편이다.

영화 <돈>은 필리핀 마닐라에서 그해 4월 22일부터 개최될 제5회 아시아영화제(아세아영화제)에 출품될 두 작품 중 하나로 선정됐다. 영화제작자협회가 위촉한 9인 심사위원회의 결정으로 2월 26일 자 <동아일보>에 보도됐다.

그런데 김소동 감독은 마닐라에 갔지만, 그의 <돈>은 가지 못했다. 이승만 정권이 제동을 걸었기 때문이다. 재미없다는 이유였다. 이 정권은 <돈>을 <청춘쌍곡선>으로 교체해 출품시켰다. 5월 31일 자 <조선일보>는 문교부가 그렇게 한 이유를 이렇게 보도했다.

"한국의 비참한 암흑상을 그렸기 때문에 주제가 적당하지 못하고 작품이 어둡다는 이상야릇한 해석 아래 문교부에서 <돈>을 뽀이콧트하고 그 대신 <청춘쌍곡선>이라는 저속한 희극 영화를 사후에 바꿔치운 괴사가 일어났다."

국책에 부합한 영화들의 약진
 

영화 <청춘쌍곡선>의 한 장면 ⓒ 한국영상자료원

 
배우 황해·김희갑과 1950년대 후반 최고의 코미디언인 양훈 등이 출연한 <청춘쌍곡선>에는 가난한 집에서 자란 중학교 교사 명호(황해 분)와 무역회사 사장의 장남인 부남(양훈 분)이 등장한다. 대학 동창인 둘은 똑같이 위장병을 앓는다. 명호는 너무 못 먹어서, 부남은 너무 잘 먹어서.

의사는 두 사람에게 2주간만 생활방식을 바꿔보라고 권유한다. 이 말을 들은 두 청년이 서로 집을 바꿔 생활하면서 상대방의 여동생과 사랑하게 되어 합동결혼식을 올린다는 것이 영화의 줄거리다. 이승만 정권은 이런 영화가 좋은 영화라며 마닐라에 내보냈으나 결과는 참패였다. 한국 출품작들은 입상권에 들지 못했다.

정부의 불공정한 처사 때문에 고배를 마신 김소동은 이듬해에도 똑같은 일을 겪었다. 그가 만든 <오! 내고향>이 한국 전통의 미를 묘사한 <종각>으로 대체돼 제6회 아시아영화제에 출품됐다. 이번에도 이유는 같았다. <오! 내고향>이 너무 어둡고 건설적이지 못하다는 이유였다.

김소동 사례에서 나타나듯이, 제1공화국 시기에는 이승만 정권의 국책에 부합하는 영화들이 대거 약진했다. 이런 가운데 코미디 영화가 멜로 영화 다음으로 인기를 끌었다.

2011년에 <진단학보> 제112호에 실린 김청강 현 한양대 교수의 논문 '현대 한국의 영화재건 논리와 코미디 영화의 정치적 함의(1945~60)'는 이승만 집권기 코미디 영화의 특징을 "국가 이데올로기와 교훈성, 쇼와 코미디의 매우 어색한 만남"이라고 규정한다. 그런 뒤, 이 정권이 국고를 풀어 국민들에게 코미디 영화를 추천한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코미디 영화는 신생 대한민국에 대하여 끊임없이 밝고 유쾌하고 희망적인 이미지를 생산하고 반공·애국주의·민족주의 등의 코드를 영화에 삽입하는 방식으로 이데올로기적 목적을 성취했고, 이 영화의 생산자들은 이러한 상업 영화의 정치적 유용성을 무기로 정권에 협력하며 특권적인 산업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승만은 국민들이 김소동 영화처럼 어둡고 비판적인 영화보다는 밝고 유쾌한 영화에 심취되기를 희망했다. 그래서 코미디 영화를 중점적으로 지원했다. 이 때문에 이 시기 코미디 영화에는 대통령의 취향을 겨냥한 뜬금없는 장면들이 자주 튀어나왔다.

이승만 정권이 원했던 영화
 

영화 <뚱뚱이 홀쭉이 논산훈련소에 가다>의 포스터 ⓒ 한국영상자료원

 
1959년 2월 6일 개봉된 <뚱뚱이 홀쭉이 논산훈련소에 가다>는 남북관계나 정치문제와는 전혀 무관한 작품이다. 이 시기 최고의 코미디언 콤비인 양석천·양훈과 배우 김승호·김진규·윤일봉 등이 출연한 이 작품은 엎치락뒤치락하는 몸개그와 각종 공연 장면이 어우러진 영화다. 

그런데 주제와 전혀 무관한 엉뚱한 대사가 작품 중간에 툭 튀어나온다. 위 논문에 소개된 내용이다.

"에~, 세계 정세로 보아 바야흐로 공산 침략이 날로 심하여가는 이때, 우리 대한민국 국민은 더욱더 일치단결하야 세계의 평화를 좀먹는 공산도배를 분쇄하기 위해 일(日)로 매진하지 않으면 아니 되는 것입니다. 더욱이 육이오사변을 계기로 우리나라가 이에 가일층 힘을 기울이는 마당에 우리 동(洞)에서도 홀쭉이와 뚱뚱이 두 장정을 입대시킬 영광을 갖게 되었다는 것은 정말로 축하해야 할 일인 것입니다."

코미디 영화를 만들어야 자금 지원도 받고 정권의 호의를 받을 수 있었다. 이런 흐름을 타고 메이저급 영화사인 한국연예주식회사를 경영한 영화인이 있다. 정치깡패 임화수다.

2017년 <한국극예술연구> 제55집에 실린 유인경의 '1950년대 한국연예주식회사의 설립과 활동 연구'는 <한국악극사>를 저술한 박노홍의 회고록을 근거로 "한국연예주식회사는 대중의 위안·오락을 목적으로 한 공연·영화를 제작하고 배급·유통을 담당하고 극장까지 구비한 대형 연예기획사 겸 제작사로서, 운영자는 이승만 정권과 유착되어 연예·영화 분야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른 임화수 사장이었다"고 설명한다.

경찰이 검찰을 압도하고 군대에도 밀리지 않던 시절이다. 이런 시절에 경찰과 어깨를 나란히 한 집단이 정치깡패들이다. '깡패의 전성기', '코미디 영화의 전성기'라는 두 흐름을 접목해 임화수가 한국연예를 설립하고 "대중의 위안·오락을 목적으로 한 공연·영화"를 쏟아냈던 것이다. <뚱뚱이 홀쭉이 논산훈련소 가다>도 임화수 회사 작품이다. 위 김청강 논문은 임화수 영화의 특징을 "현대적이고 화려하고 쇼와 개그맨의 몸 연기 위주인 화려한 영화"로 요약했다.

이승만 정권은 일제 치하에서 갓 벗어나 한국전쟁을 겪고 자신의 장기집권하에 노출된 한국인들이 현실 분석적인 영화에 빠지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는 국민들이 재미있고 웃기는 영화에 탐낙하기를 원했다. 그래서 이 시기의 극장 간판들만 보면, 한국인들은 사랑에 빠져 있거나 아니면 즐겁게 노래하거나 익살맞은 표정을 짓는 국민들이었다. 이것이 제1공화국 극장가에서 형상화되는 대한민국의 이미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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