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5월 11일 서울 경복궁 흥례문 광장에서 열린 제127주년 동학농민혁명 기념식에서 동학농민혁명 참여자의 유족들이 국기에 대한 맹세문을 낭독하고 있다.
연합뉴스
<우선봉일기>의 1월 3일 자 기록에는 그가 체포된 뒤에도 호탕하게 웃으며 이상한 주문을 외우더라는 내용이 담겨 있다. 일본군이 작성한 토벌 기록인 <동학당정토약기(東學黨征討略記)>에도 그가 미친 사람으로 묘사돼 있다. 고문으로 육신이 망가진 상태에서도 의연하게 주문을 외우는 모습이 그렇게 비쳤으리라 볼 수 있다. 죽는 순간까지 대한독립만세를 외친 유관순처럼 이소사도 자기 나름의 주문을 외웠던 것이다.
이소사는 일본군의 점령으로 조선정부가 독립성을 빼앗긴 상태에서 동학군 부대를 이끌고 최후까지 일본군에 항전했다. 일본군의 공격으로 도시가 불타는 와중에도, 끝까지 말 위에서 항전을 지휘했다. 그러다가 포로가 돼 모진 고문을 받고 육신이 망가진 상태에서 일본군에 인계됐다.
이 정도의 항일투쟁을 했다면, 국가보훈부가 독립유공자로 지정했어야 마땅하다. 하지만 그는 독립유공자 1만 7848명의 명단에 들어 있지 않다. 공식적으로 그는 독립유공자가 아니다.
이에 관한 국가보훈부의 입장은 '1895년 을미사변 때 궐기한 을미의병부터 독립유공자로 인정한다'는 것이다. 1894년 하반기부터 1895년 연초까지 활동한 동학군은 독립유공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런 구분법이 타당하지 않다는 의견이 학계에서 나오고 있지만, 보훈부는 합리적 사유 없이 동학군을 유공자 범주에서 제외하고 있다.
동학의 슬로건이 반봉건·반외세였다는 것은 오래 전부터 국사나 한국사 교과서에서 강조됐다. 이 슬로건에 나오는 반외세의 '외세'는 일본이다. 동학은 제1차 거병 때는 반봉건을 위해 싸우고 제2차 거병 때는 반외세를 위해 싸웠다. 반외세 투쟁 때 일본군과 싸우다가 힘을 소진해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동학군 참여자들을 항일 독립유공자로 지정하지 않을 합리적 사유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소사는 이름은 알려져 있지 않지만 신원은 어느 정도 알려져 있다. 나이, 직업, 종교와 더불어 항일투쟁이 비교적 소상히 전해지고 있다. 그래서 그의 이름을 모른다 해도 그의 항일투쟁으로부터 교훈을 얻어내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을지문덕은 이소사만큼도 인적 사항이 알려져 있지 않다. 그렇지만, 현대 한국인들이 그의 업적을 이해하는 데에는 아무 문제가 없다. <삼국사기> 설씨 열전의 주인공인 설씨녀는 설씨라는 것과 여성이라는 것과 율리 사람이라는 것밖에는 알 수 없지만, 약혼자 가실에 대한 의리를 지켰다는 이유로 <삼국사기>에 등재됐다. 이름 없이 그냥 설씨녀로 소개됐지만, 의리의 표상으로 후대에 기억되는 데에 별문제가 없다.
독립유공자를 지정하는 것은 독립운동가 본인과 후손에게 보답하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독립운동가의 정신을 두고두고 기리기 위해서이기도 하다. 이름 없이 그냥 이소사로만 기억돼도 장흥 전투에서 보여준 그의 반외세·반제국주의 투쟁을 기억하는 데는 문제가 전혀 없다. '동학장군 이소사' 같은 인물을 하루빨리 독립유공자로 지정하는 것은 항일 독립운동의 퍼즐을 완성시키는 길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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