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S오픈 테니스 대회에서 남녀 동일 상금을 이끌어낸 전 미국 테니스 선수 빌리 진 킹(왼쪽)이 동일 상금 5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8월 28일(현지 시각) 미국 뉴욕에서 열린 US오픈 테니스 챔피언십 경기장에 입장하고 있다.
EPA=연합뉴스
테니스 팬으로서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는 시기에 개최되는 US오픈 경기를 올해도 놓치지 않고 틈틈이 시청했다. 경기를 볼 때마다 유독 내 눈길을 끈 것은 코트 바닥에 새겨진 '동일임금 50주년(50 years of equal pay)'이라는 문구였다. 검색해보니 여성과 남성 선수에게 동일 액수의 상금을 지급하기 시작한 지 50주년이 되는 해를 기념하기 위한 것이란다.
1972년 생애 9번째 그랜드 슬램 타이틀을 거머쥐며 US오픈 여자 단식 우승의 주인공이 된 빌리 진 킹 선수는 자신이 받은 1만 달러의 상금이 남자 단식 우승자 상금 2만 5천 달러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한 현실이 "구리다(it stinks)"라고 말했다. 이어 이듬해부터 동료 여성 선수들과 집단 보이콧을 고려하고 있다고 선언했다.
"저는 여성 선수들의 경기가 남성들의 경기에 버금가는 여흥의 가치(same entertainment value)를 제공하고 있다고 믿습니다. 여성 선수에게 동일 금액의 상금을 주지 않는다면 저를 비롯한 많은 여성 선수들이 내년에는 그 어디에서도 경기를 치르지 않을 겁니다."
1973년 US오픈 대회가 남녀 선수 모두에게 동일 상금 지급을 결정한 배경에는 이와 같은 여성 선수들의 조직적 항의가 배경이 됐다. 그해 7월 20일 자 <뉴욕타임스> 헤드라인은 이렇게 장식되었다. "테니스계는 모든 여성들도 평등하게 창조되었다는 점을 인정했다(Tennis Decides All Women Are Created Equal, Too)."
물론 '동일가치노동 동일임금'의 논리가 아무런 저항 없이 수용된 것은 아니다. 당시 프로테니스협회 회장을 비롯한 많은 이들이 그랜드 슬램 경기에서 최대 5세트까지 뛰는 남성과 달리 여성은 최대 3세트까지만 뛴다는 점, 그리고 남성 선수들의 육체적 기량이 더욱 뛰어나다는 이유로 동일 상금의 논리를 조롱하고 반박했다. 그러나 집요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결국 동일가치노동 동일임금은 실현되었다.
미국에 이어 2001년부터는 호주오픈에서 성별 상금 격차가 완전히 사라졌고, 2006년 프랑스오픈과 2007년 윔블던에서도 남녀 선수에게 동일 상금이 지급되기 시작했다. 기계적 동등성 기준에 의한 차별 임금 대신 비교가능한 가치(comparable worth)의 등가성에 의한 동일노동 동일임금의 원리가 보편화되기 시작한 것이다.
영화계까지 이어진 페이 미투
이와 같은 관점에서 보면 남녀 선수들 간 체력 차이가 테니스 기량 열등의 징표로 여겨질 수 없으며, 여성 선수들이 투여하는 노력과 에너지, 그들이 발휘하는 기량과 여흥의 가치는 남성 선수들의 것과 '같은' 가치를 갖는 것으로 평가된 것이다. 1951년에 체결된 국제노동기구(ILO)의 제100호 '동일가치노동에 대한 남녀 동일보수 협약'은 그렇게 여성들의 꾸준한 저항과 문제 제기를 통해 조금씩 현실에 뿌리내리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50년이 흘렀다. 그 긴 세월 동안 여성들은 계속 싸웠고 동료 시민들은 연대했다. 오랜 임금차별 관행에 맞서 페이 미투(pay me too) 운동이 확산되어 영화계까지 연대는 이어졌다. 남성 배우 베네딕트 컴버배치는 2018년 "여성 배우에게도 같은 출연료를 지급하지 않으면 나도 배역을 맡지 않겠다"고 발언해 주목을 받았다.
지구촌 곳곳에서 성별에 따른 차별과 격차야말로 가장 오래되고도 심각한 사회문제로서 정치가 앞장서서 불평등을 타파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를 반영하여 여러 국가에서 '성평등 임금 공시제'가 시행되었다.
영국에서는 평등법에 따라 성별 임금격차 보고를 의무화하여 2017년부터 시행되고 있다. 이에 따라 근로자 250인 이상을 고용하고 있는 사업주는 매년 시급과 상여금의 평균값과 중앙값의 성별 격차, 상여금을 받은 노동자의 성별 비율, 임금 분포 4분위별 남성 및 여성 근로자 비중 등의 정보를 공개하고 있다.
독일도 2017년부터 '임금구조 투명성 강화를 위한 법'을 시행하여 200인 이상 사업장의 노동자들이 동일 직급에서 동일 직무를 수행하는 동료의 임금을 열람할 수 있는 권리를 명문화했다. 아이슬란드는 2018년 동일노동 동일임금 인증제를 법제화했다. 노동자 25명 이상을 고용하고 있는 사업주는 유사 가치 노동을 하는 동일 직급의 노동자들에게 동일임금을 주고 있다는 것을 입증해야 한다. 2020년부터는 이를 입증하지 못하면 1일 미화 500달러의 벌금을 부과했다.
프랑스는 2019년부터 성평등 지수 공시제를 시행하고 있다. 이에 따라 50인 이상 사업장은 매년 남녀 노동자의 연령대별·동일 직급별 임금 및 승진 인원 비교, 가장 많은 임금을 받는 근로자 10명 중 여성 인원수 등의 성평등 지수를 매년 자사 홈페이지와 정부 웹사이트에 공개해야 한다. 2023년에는 호주 정부도 100명 이상의 직원을 보유한 기업에 성별 임금격차를 공개하도록 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