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5월 10일 문재인 대통령이 청와대 본관 집무실에서 임종석 비서실장과 대화하고 있다.
연합뉴스
문재인 대통령은 언론에 공개되는 외부 행사를 부담스러워했다. 2019년 1월 티타임에서 그 이유를 듣게 됐다. 당시 새해 부처 업무보고가 안건으로 올라왔다. 문 대통령이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뭔가 탐탁지 않을 때 나오는 버릇이다.
임종석 비서실장이 "업무보고를 줄일까요?"라고 물었다. 문 대통령은 "장관 업무보고가 부담되지는 않는다. 제일 큰 부담은 카메라 앞에 서는 (다른) 행사"라고 말했다.
의아했다. 3·1절, 8·15, 정상회담, 유엔 연설 등 대형 행사가 아니라 소소한 행사에 가는 게 부담이라니. 보고 받고 덕담하고 사진 촬영에 응하는 게 무슨 대수라고. 그게 아니었다. 문 대통령은 소규모 행사를 이렇게 준비한다고 말했다.
"가서 (행사를) 보기만 하는 게 아니다. 메시지를 준비해야 하는데, 많은 부담이 간다. 신동호 (연설) 비서관이 (써준 인사말과 내 말이) 싱크로율이 높은 편이지만 다소간 손을 봐야 한다. (행사) 콘셉트를 잡으면 전반을 봐야 한다. (보고서) 글을 뒷받침하는 여러 자료를 보고. 내 평소에 아는 분야도 있지만, 모르는 분야는 지식도 없고 자료로 공부해야 한다.
역대 정부에서 이렇게 많이 (행사를) 한 적이 없다. 행사 참여가 필요한 부분, 돌파해야 하는 것도 있다. 국민께 직접 호소하고 (국민과) 접촉면을 늘리려고 참모들도 자꾸 대통령이 찾아가는 현장을 만들려고 한다. 그게 장기적으로 옳은가. 대통령만 보이고 '청와대 정부'라는 말 들리는데, 행사를 지금처럼 가야 하는지 길게(봤을 때) 의문이다. 갑자기 줄일 수는 없지만."
충혈된 눈으로 출근하는 또 다른 이유가 밝혀지는 순간이다. 국정 과제가 아닌 잠깐 만나는 행사, 사진 찍고 악수하는 행사, 큰 행사 사이에 낀 작은 일정까지도 내용을 세세하게 파악하고서야 참석했다. 그런 자리에서 할 이야기도 허투루 여기지 않는다.
그럴 수밖에 없다. 부처나 기관, 청와대 담당자는 대통령 발언을 메모하고 기억한다. 고치거나 개선할 내용, 폐기할 점을 찾아내 후속 작업을 한다. 대통령이 따로 지시하지 않더라도.
기업이나 조직도 마찬가지다. 오너나 기관장이 지나가면서 한마디 한다. '사무실 분위기가 왜 이렇게 어수선해?', '저 사람 아직도 저기 있느냐?'. 그 뒤에 야단법석이 난다. 소식은 금세 전체에 퍼진다. 지나가는 투 말이라도 조심해야 하는 이유다.
문 대통령이 발설한 말은 정부 전체에 인장(印章)으로 작용했다. 자신의 발언에 스스로를 맸기 때문이다. '그가 한 말은 관철된다'. 말을 뒤집게 됐을 때 전후 사정을 설명해 양해를 구했다. 필요하면 사과도 했다.
나는 2003년 문재인 대통령을 처음 대면했다. 그가 참여정부 민정수석 비서관 때였다. 난 청와대를 들락거리는 기자였다.
대통령 해외 순방 때 국내에 남은 기자들에게 수석비서관들이 돌아가면서 점심을 샀다. 민정수석이 밥을 산다니 기자들 대부분 점심 자리에 갔다. 나는 문 수석 앞 왼쪽 45도쯤에 앉았다. 제대 군인처럼 깎은 그의 머리에는 새치가 살짝 섞여 있었다. 다소 굳은 표정이었다.
지금은 거의 사라졌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점심에 술을 꽤 마셨다. 잘나가는 고위직들은 '양폭'을 마셨다. 17년산 스카치 위스키와 맥주를 섞은 양주 폭탄주다. 노무현 대통령이 "내 친구"라고 한 청와대 수석, 그것도 권력기관을 담당하는 민정수석. 고위직 중의 고위직이다. 그런 그가 내는 점심이었다. '소폭'이 나왔다. 소주와 맥주를 섞은 소주 폭탄주.
한 기자가 물었다.
"수석님은 양폭 안 하십니까?"
뭐라고 답할지 궁금했다.
"예, 전 안 합니다."
그게 다였다. 이유도 없었다. 물어본 사람이 머쓱해졌다. 나중에 청와대 관계자가 이렇게 말했다.
"노동, 인권 분야에서 주로 활동한 변호사잖아. 부산, 경남 쪽 시국사건을 도맡다시피 하고. 양주는 자기에게 안 어울린다고 생각하는 듯하던데. '나는 소주야', 뭐 그런 식이지."
숙명과 소명 의식의 접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