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년 6월 3일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에서 부트로스 부트로스 갈리 유엔 사무총장이 유엔 환경개발회의(UNCED)를 개회하고 있다. 지구정상회의로 불린 이 자리에서 환경과 개발에 관한 기본 원칙을 담은 리우 선언이 채택되었다.
UN Photo/Michos Tzovaras
'사전예방원칙(Precautionary approach)'이라는 것이 있다. 31년 전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에 무려 178개국 대표(115개국 국가원수 또는 정부수반 포함)가 모여 지구의 환경과 미래를 위한 역사상 최대 규모의 국제회의를 열었던 당시 정의되고 승인된 원칙이다. 1992년은 여러 의미에서 인류가 희망으로 가득 찬 시기였다. 지금만큼 눈앞의 심각성을 인지하지 않았음에도 환경 문제에 대해 최다 규모의 국가들이 머리를 맞대고 대응 원칙을 세우던 때였다.
특정 시점에 과학적, 기술적, 경제적 지식이 충분치 않아 어떤 행위의 결과에 대한 확실성을 보장할 수 없을 경우, 그로 인해 잠재적으로 일어날 수 있는 위험을 사전에 대비하고 사전적 방어 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원칙, 그것을 사전예방원칙으로 명명하고 인류는 스스로 미래에 닥칠 위험에 대비했던 것이다.
한마디로 위험에 대한 명백한 확실성이 없더라도 가능성만으로 적극 대비한다는 원칙이다. 확실성이 인류의 합리적 사고와 진보를 보장한다는 데카르트주의에 대한 보완인 셈이다. '확실성이 없더라도'라는 말이 얼핏 확실성에 대한 모순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언어의 함정이다. 모든 인간의 의도에는 방향성이 있기 때문에 무엇에 대한 확실성인가의 질문이 동반돼야 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안전에 대한 확실성인가 불확실성인가'와 '위험에 대한 확실성인가 불확실성인가'의 질문은 전혀 다르다. 안전과 관련해서는 확실한 보장을 추구해야 한다. 반대로 위험에 대해서는 발생 가능성이 확실하지 않아도 피해야 한다. 그것이 거꾸로 안전의 확실성을 보장하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위험' 등의 부정적 가치에 대해 불확실성에도 반응하는 것이 확실성을 추구하는 합리주의에 적극 부합하는 것이며 고대부터 동서양 사상에 공통으로 가장 중심에 있는 지혜(智慧, φρόνησις 프로네시스) 가운데 하나로 여겨져 왔다. 1992년 리우 선언은 바로 이러한 인류사적 가치와 전통이 반영된 전 인류적 지구촌 선언이었다.
1992년은 철의 장막이 걷히고 새롭게 탄생한 러시아가 자유주의 세계의 문을 두드리며 화려한 조명을 받은 때였다. 수십 년의 냉전 시대가 종말을 고하고 인류가 보편적으로 지향할 가치에 함께 집중하게 되리라 믿던 때였다. 리우 선언은 바로 그러한 국제정치적 의미와 희망이 반영된 지구촌 선언이었다.
31년이 지난 지금, 과연 세계는 리우 선언의 지향점에 걸맞게 가고 있을까? 권위주의와 전체주의가 공산이념 때문이었다는 순진한 생각은 불과 30년 만에 정반대로 극우 전체주의 국가를 만들어 놓고 있는 러시아를 보면서 산산이 깨졌다. 냉전이 무너졌다는 당시의 환희는 점차적 의심을 거쳐 우크라이나 전쟁을 기점으로 완전히 실망으로 바뀌었다.
동구권이 무너지던 당시의 기성세대는 전 인류사에서 경험하지 못한 엄청난 부를 축적했지만 그 풍요로움을 다음 세대로 물려주지 못했다. 현재 인류가 가진 부의 총량은 당시에 비할 수 없이 커졌지만 개인은 생존을 위협받고 인류는 번식을 위협받을 만큼 경제 균형과 공정 분배가 완전히 무너졌다.
한미일 공조의 첫 작품, 핵 오염수 방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