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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를 키우면, 어른들끼리는 경험하기 힘든 낯선 일들을 겪습니다. 오직 육아하는 이 때만, 부딪칠 수 있습니다. 애 키우는 동안 나를 흘려보내는 것 같아 좌절감에 글을 씁니다. '너희만 크냐? 엄마도 같이 크자'는 마음으로 펜을 들었습니다. 아이와 함께 성장하기 위해 육아일상 속 메세지를 담아 글을 씁니다-기자말 


큰 딸이 웃으면, 작은 딸이 울 것 같고


거실에서 블록놀이하던 큰 딸이 엄마 손을 잡아 끈다. 안방 가서 놀자는 뜻이다. 옆에 같이 있던 둘째가 애처로운 눈으로 엄마를 본다. 아직 입에서 시큼한 젖냄새 나는 어린 둘째의 맑은 눈망울. 외면하기 어렵다. 엄마는 갈등하기 시작한다.

큰 딸 손을 놓고 작은 딸과 있으려니, 매번 어린 동생 때문에 기다리기만 하는 큰 딸에게 미안하다. 그렇다고 안방으로 가자니 덩그라니 혼자 거실에 있을 어린 영혼이 불쌍하다.

어쩌지? 두 아이를 모두 웃게 하려면, 거실이든 안방이든 세 모녀가 같은 공간에 있어야 한다. 9kg에 가까운 젖먹이를 하루 종일 안고 다니려니 버겁지만, 뾰족한 수가 없다. 둘 중 하나 안쓰러운 것보다 애미가 한 번 고생하기로 정했다. 결국 한숨 푹 쉬고, 둘째를 안아 안방으로 함께 간다.

첫째와 둘째 사이의 엇박자는 하루에도 몇 번씩 일어나는 흔한 일이다. 첫째가 만족하면 둘째가 서럽고, 둘째가 웃으면 첫째가 운다. 누구 하나는 서러운 틈에서, 엄마는 딸들이 못내 안쓰럽다.

어린 동생을 위해 큰 딸이 양보해야 할 때, 아이의 얇은 연갈색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속삭인다.

"엄마가 동생 돌본다고, 우리 큰 딸은 매번 뒷전이네. 미안해라. 동생 태어나기 전에는 큰 딸 중심으로 돌아갔는데……. 동생 감기 걸릴까봐, 올 겨울은 제대로 놀러가지도 못했네."

식사 때마다 엄마, 아빠, 언니는 식탁에 함께 둘러 앉지만, 둘째는 늘 바닥에서 찬밥 신세다. 밥 먹다가 눈이라도 마주치면 한 번 싱긋 웃어주고, 얼른 밥을 삼킨다.

"여보, 둘째 딸이 불쌍해. 큰 애 키울 때는, 혼자 있도록 둔 적이 없었는데……. 얘는 걸핏하면 덩그러니, 혼자야."

핵가족 체제에서 엄마아빠 힘만으로 두 아이를 동시에 만족시키기란 몹시 까다로웠다. 아직 한참 부모의 보살핌과 관심이 필요한 녀석들이기에, 어느 한 아이라도 아픔을 느끼지 않길 바랐다. 그런데 육아현장에서는 상황에 따라 관심과 보살핌의 불균형이 나타날 수밖에 없었다.

생각을 거듭하고 나니, 이상했다. 두 아이 모두 불쌍하기만 하다면, 대체 행복의 수혜자는 누구란 말인가? 시선을 바꿔 생각해야 했다.

 두 아이 모두 불쌍하기만 하다면, 대체 행복의 수혜자는 누구란 말인가.
 두 아이 모두 불쌍하기만 하다면, 대체 행복의 수혜자는 누구란 말인가.
ⓒ 최다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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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 바꾸기

"인간에게 모든 것을 빼앗아갈 수 있어도 단 한 가지, 마지막 남은 인간의 자유, 주어진 환경에서 자신의 태도를 정하고, 자기 자신의 길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만은 빼앗아갈 수 없다는 것이다."- <죽음의 수용소에서> 중."


언니이기 때문에, 동생인 탓으로 양보해야 할 것도 많다. 바꿔 생각하면, 누군가가 양보했으니 결과물도 있다는 뜻이다. 아이들을 가엾게 여기기 보다, 아이들이 누리는 결과물을 바라보기로 했다. '죽음의 수용소에서' 의 저자, 빅터 프랭클의 말처럼, 엄마로서 선택할 수 있는 긍정의 시선이었다.

철옹성 자존감, 첫째

큰 딸은 작은 딸이 태어나기 전, 만 24개월 동안 엄마, 아빠는 물론 집안 어른들의 사랑을 독점했다. 아이가 울면 온 식구의 비상 사태였다. 애착형성 걱정할 일 전혀 없었다. 사랑에 사랑을, 받고 받아 지금의 '똥꼬발랄' 완성형으로 자랐으니 말이다.

그 때 받은 사랑이 충분했던 모양인지, 큰 딸은 눈에 띄는 동생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 듯하다. 세상 행복한 녀석이다. 눈 뜨고, 잘 때까지 웃다가, 웃다가, 웃다가 하루를 마감한다.

"세상에서 제일 예쁜 아기는 누구야?"
"연우~"

자동 응답기마냥, 제일 예쁜 아기는 자기라고 대답한다. 먼저 태어난 복으로, 두터운 사랑을 받았다. 덕분에 아이는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철옹성 자존감을 갖고 있다.

 큰 아이 때는 옷 입힐 때도 쩔쩔 맸던 초보 엄마였다. 작은 아이, 옷 입히기 정도는 거뜬한 육아 경력자.
 큰 아이 때는 옷 입힐 때도 쩔쩔 맸던 초보 엄마였다. 작은 아이, 옷 입히기 정도는 거뜬한 육아 경력자.
ⓒ 최다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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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어나자마자 엄마아빠가 육아 경력자, 둘째

둘째는 노련한 부모 덕에 불안할 일이 적었다. 엄마아빠가 24개월 동안 육아 근육을 캥거루마냥 우락부락하게 불려 놓았다. 크게 당황할 일? 아직까진 없다.

"분수토 했어? 괜찮아. 잘 놀고, 잘 자지? 색깔은? 아까 먹은 뽀얀 젖색이야? 그럼 괜찮아. 지켜보자."

"밤잠 자다 자꾸 깨? 그냥 두자. 밤잠 쭉 자야하는 것을 배워야지. 다행히 아빠가 재우니, 엄마 젖냄새에 덜 괴로워해서 통잠 잘 수 있을 거야."

"울어? 기저귀도 가렸고, 막 수유도 끝냈으니 배도 부를 거야. 아마 심심한 모양이네. 잠깐 데리고 산책 가보자. 사람 구경 시켜주게."

둘째는 노련한 부모 덕에 불안할 일이 적었다. 그리고 심심할 틈이 없다. 혼자 덩그러니 떨어져있어도, 엄마, 아빠, 언니가 떠들고 돌아다니는 모습 보며 배실배실 잘 웃기만 한다. 정신없이 하루하루 지나 보니, 어느새 이유식 시작 할 5개월도 되었다.

첫째, 둘째는 각자 다른 길을 걸을 뿐이다. 따져보니 불쌍할 일 하나 없었다. 나만 그렇게 생각하고, 본인들은 그저 세상 즐거운 아이들이다.

무엇에 더 신경 쓸 것인가. 매일 반복되는 언니, 동생의 엇박자인가, 아니면 행복의 수혜자인가. 엄마인 내가 해 줄 수 있는 일은 각자 상황에 맞춰 잘 살고 있는 아이들을 가엾게 여기지 않는, 비교적 간단한 것이었다.

어린 아가들의 삶도, 자세히 들여다 보았더니 각각 다른 형태의 행복이 있었다. 어떤 삶의 모양이든 모두 귀하게 여긴다면 두 아이 다 만족스럽게 살 수 있지 않을까. 더불어, 내 삶에도 포진해 있는 행복들을 눈치챌 수 있도록, 아이들 옆자리에 같이 멍석을 깔아본다.



#육아#두 아이 육아#육아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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