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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만틱, 고성, 알펜, 장난감, 와인…"

모두 도로 이름이다. 독일에 150개가 넘게 조성된 '관광가도'들이다. 그 다채로운 이름만 들어도 가는 곳마다 어떤 매력을 품고 있을지 설렌다. 그중에서도 독일 최초의 테마가도인 '와인가도(wein straße)는 관광객들의 인기가 특히 높다. 라인강을 따라 북쪽에서 남쪽으로 약 85㎞쯤 이어지는 와인가도는 국경을 넘어 프랑스 알자스 지방의 와인가도로 연결된다.

와인가도는 다양한 품종의 포도 산지로 유서 깊은 독일 남부 팔츠(Pfalz) 지방을 관통하고 있다. 예로부터 팔츠 지방의 고지대에는 각 지방 영주들의 고성이 즐비했다. 성 아래의 경사지는 따뜻하고 풍부한 일조량으로 와인 재배의 최적지였다. 로마시대부터 각종 와이너리의 원산지로 명성을 날렸다.

독일 와인은 고대 로마시대부터 2000년 이상 전승된 포도재배의 전통과 노하우를 자랑한다. 유럽의 전통적 와인 생산국 가운데 최북단에 위치해 포도재배의 북방한계선에 해당한다. 그래서 포도재배의 최적지는 아니다. 예측하기 어려운 기후변화에 노출되는 악조건이다. 대부분의 독일 포도밭이 찬바람을 막을 수 있는 숲이 울창한 언덕이나 경사지, 햇볕을 반사하면서 주위 온도를 일정하게 유지하는 라인강 등 하천을 따라 펼쳐져 있는 이유다.

이렇게 강수량과 일조량의 적절히 조화되는 환경에서 독일의 포도는 긴 숙성기간을 갖는다. 서서히 익으면서 당분을 축적시키고 신선한 산미(酸味)를 유지한다. 여기에 환경 친화적 재배기술로 포도를 생산하고 첨단 셀러(wine cellar) 기술을 결합해 최고 품질의 와인을 빚어낸다. 특히 숙성되면서 독특한 휘발향을 풍기는 리슬링(riesling) 와인은 세계 포도재배량의 60%를 차지할 정도다. 리슬링 외에 바이스부르군더(weissburgunder), 그라우부르군더(grauburgunder)가 대표적이라고 한다.

라인스바일러마을 800년 된 라인스바일러 포도(와인)공동체마을
▲ 라인스바일러마을 800년 된 라인스바일러 포도(와인)공동체마을
ⓒ 정기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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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인가도 중심부에 '동화 속 삽화' 같은 농촌마을이

와인가도를 따라 크고 작은 고풍스런 도시와 자연스러운 마을들이 이어진다. 포도를 가공해 와인을 만들거나 체험관광객을 유치해 먹고 사는 농촌관광체험마을들이다. 6월부터는 크고 작은 마을축제도 다채롭게, 지속해서 벌어진다. 축제는 가을까지 쉬지 않고 이어진다. 물론 축제가 쉬지 않으니 축제를 즐기는 관광객의 발길도 끊이지 않는다.

포도가 익어가는 농촌마을 마다 수백 년이 넘은 중세의 건축물과 거리가 온전히 보존되어 있다. 살아있는 야외 박물관, 또는 에코뮤지엄(eco museum)이 따로 없다. 조상이 물려준 숲과 초지, 문화와 경관을 생태적으로 지키려는 정부와 농민이 합심한 노력의 결과다. 마치 '동화 속 삽화' 같은 풍광이다. 글로 더 표현하는 것은 부질없는 노력일 뿐이다. 사진으로도 감동을 느끼는 데 한계가 있다. 직접 가서 눈으로 보는 게 상책이다. 

놀라운 사실은 지붕의 각도, 담장의 색깔 등 건축물의 외관은 집주인도 마음대로 손댈 수 없다. 국가에서 법으로 정해놓은 법률과 규정대로 유지하고 보존해야 한다. 독일의 오랜 전통, 아름다운 문화경관이 살아있는 농가주택 외부는 집주인의 사유물이 아니라 온 국민의 공유재로 대접하는 셈이다. 심지어 농사에 방해만 될듯한 들판의 고목 하나도 마음대로 베어낼 수 없다. 쓸모없는 나무 한 그루 조차 농촌의 소중한 문화이고 경관이라는 게 이유다.

이처럼 아름다운 라인란트 팔츠(Rheinland Pfalz)주에 라인스바일러(Leinsweiler) 와인공동체마을이 고즈넉하게 자리잡고 있다. 1935년에 개통된 독일에서 가장 오래된 '포도주가도(wein straße)'의 중심부에 자리 잡고 있다. 풍미가 뛰어난 명품 수제 포도와인의 명소로 유명하다. 마을 입구에서부터 마치 잘 정돈된 공원에 들어서는 기분이 들었다. 가히 '포도 하나로 일군 농촌생활공동체'라는 별명이 저절로 떠올랐다.

스튜빙어 와이너리  스튜빙어 가족농의 와이너리, 농가레스토랑, 농박
▲ 스튜빙어 와이너리 스튜빙어 가족농의 와이너리, 농가레스토랑, 농박
ⓒ 정기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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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0년 중세의 역사가 물려준 값진 공유재 '와인'

라인스바일러 마을은 800년 전에 생긴 오래된 마을이다. 그런데 라인란트팔츠 지방에서 유일하게 아직도 중세 시대 건물과 거리가 남아있다. 그것도 박제화된 박물관이나 기념관이 아니라 주민이 생활하는 주택으로 현대를 살아남았다. 외관은 마음대로 훼손할 수 없지만 내부 주거환경은 현대식 인테리어로 개조해 사용하고 있다.

450여 명쯤 사는 전체 180가구 가운데 와인 농가는 12가구에 불과하다. 하지만 와인 농가끼리 만 고부가가치 수익 창출의 기회를 독점하지 않는다. 와이너리를 소유하지 않은 나머지 농가도 조상이 물려준 마을의 공유자산인 '와인'으로 함께 먹고 산다. 와이너리를 중심으로 전후좌우에서 와인시음장, 전통식당, 농가민박시설 등을 운영한다. 이렇게 해서 라인스바일러 농가들은 독일 평균농가 소득 이상의 농외소득을 창출하고 있다. 부촌이다.

라인스바일러 마을을 찾는 관광객은 연간 5만 명이 넘는다. 독일 관광가도 중에서도 최상위 수준의 인기있는 와인가도를 대표하는 중심마을답다. 관광객들이 묵어갈 수 있는 농박은 30가구 정도에서 운영한다. 한국의 농촌체험휴양마을의 그 농박이나 펜션을 생각하면 오산이다. 웬만한 도시의 호텔보다 더 정갈하고 세련된 농박이 적지 않다.

농박은 독일 관광협회(DTV)에서 철저히 관리한다. 모든 숙박 시설을 평가해 별점으로 등급을 매긴다. 편리함, 화려함도 중요하지만 농촌다움과 고풍스러움 등에 점수를 많이 배점한다. 고풍스러운 농촌 마을에 자리 잡은 라인스바일러 농박은 늘 높은 점수와 등급을 받는다. 와인가도 14개 마을을 대표하는 라인스바일러마을에는 관광청의 홍보 공무원 2인이 상주할 정도다.  

스튜빙어씨  스튜빙어 와인농장의 농장주이자 와인마이스터 ‘피터 슈튜빙어’씨
▲ 스튜빙어씨 스튜빙어 와인농장의 농장주이자 와인마이스터 ‘피터 슈튜빙어’씨
ⓒ 정기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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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인 마이스터'들을 만나서 휴양하고 치유하는 '국민들의 별장'

라인스바일러는 물론 독일의 농촌마을에는 일회적인 구경이나 유흥 목적으로 농박을 찾는 뜨내기 손님들은 거의 없다. 대개 가족 단위의 장기 휴양객이 단골고객이다. 봄, 가을에는 3일 이상 체류하는 관광객, 여름에는 가족 단위의 7일 이상 머무는 장기휴양객이 대부분이다.

일단 독일에는 농촌관광이라는 표현을 쓰지 않는다. 관광이 아니라 휴양이나 치유라 부른다 농촌은 관광의 대상이 아니라 옷깃을 여미고 쉬러 오는 공간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일상에 지친 도시민들이 휴양과 치유를 목적으로 농촌을 찾는 체류형, 휴양형 농촌관광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농민 또는 농촌주민들은 '독일 국민들의 별장지기'로 불린다. 

관광객들이 라인스바일러 마을을 찾아와 굳이 며칠씩 묵고 가는 이유는 당연히 '와인' 때문이다. '와인 마이스터'들이 대를 이어 가족농 형태로 와이너리를 운영한다. 와이너리마다 독특한 풍미의 와인을 경쟁하듯 만들고 있다. 중세 이래 농가마다 대대로 전승해온 비장의 고유 제조비법을 간직하고 있음은 물론이다. 그래서 와이너리마다 맛과 향이 다 다르다. 물론 와인을 잘 모르는 나로서는 그 미묘한 차이를 알 길이 없다.

특히 저마다 독특한 풍미를 자랑하는 10여 농가의 와인은 서로 다른 상표로 출하하며 선의의 경쟁을 벌인다. 하지만 품질은 크게 다르지 않다. 주민들이 공동으로 설립한 조합에서 와인의 품질을 철저히 공동 관리하고 있기 떄문이다. 개별 와이너리보다는 라인스바일러 공동체의 가치가 더 우선한다는 공감과 약속을 지키고 있는 것이다.

농박  귀농한 예술가가 운영하는 퇴페라이 농박
▲ 농박 귀농한 예술가가 운영하는 퇴페라이 농박
ⓒ 정기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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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만 유로의 억대 가족농, 스튜빙어 와인 마이스터

품질과 상품성이 좋은 라인스바일러산 와인은 이제 독일 전역으로 판매되는 것은 물론 외국에 수출까지 하고 있다. 와인 마이스터 피터 스튜빙어(peter stübinger) 씨의 와이너리의 60%는 직판하고 나머지는 멀리 함부르크 등 북부까지 판매한다. 생산하는 와인의 90%가 화이트 와인(weiss wein)이다. 육고기는 적포도주, 생선은 백포도주라는 어설픈 한국인의 통념이 깨지는 순간이다.

15ha의 포도밭을 3대에 걸쳐 형제, 자녀 등 온 가족이 함께 농사짓고 와인을 주조한다. 통상 한 가족농의 노동력으로 적정하게 농사 일을 감당할 수 있는 규모는 5ha 정도라고 한다. 그렇다면 스튜빙어 가족농은 3배 정도의 규모를 감당하는 셈이다. 10여 품종의 포도를 재배해 50여 가지의 와인을 가공한다. 1㎡에 1리터의 와인이 생산된다고 한다. 와인 1리터당 3유로에 팔면 1ha(1만 제곱미터) 당 3만 유로(한화 약 3700만 원)의 고소득을 올리는 셈이다.

5ha만 해도 연간 소득 15만 유로의 억대 가족농인데 스튜빙어 가족농은 그 3배인 15ha에서 45만 유로의 소득을 올리는 고소득 농가다. 게다가 사과밭 1.5ha에서 사과주 등 과일 증류주도 만들고 식당과 농박까지 겸하는 복합농가다. 농박은 독일관광협회에서 별점 3~4개 등급으로 인증받았다.

라인스바일러의 와이너리와 농박을 찾는 농촌관광객들은 가격이 다소 비싸더라도 직접 농가를 찾아가는 이유를 이렇게 말한다. 우선 지역에서 생산하는 유기농산물을 구입해 먹으며 건강해지는 기분이 든다고. 또 중세시대의 풍광이 살아있는 농촌마을에서 조상의 전통과 문화를 체감할 수 있다고. 아울러 자연과 환경의 고마움도 새삼 느낄 수 있다고.

이러한 도시 소비자, 관광객들의 신뢰와 기대를 라인스바일러의 농부들은 잘 알고 있다. 그래서 결코 농산물, 농식품 등 먹을거리로 장난치지 않는다. 농촌마을의 문화와 경관을 절대 해치지 않는다. 농사는 힘든 일이지만 그만두거나, 농촌을 떠날 생각은 굳이 하지 않는다.

라인스바일러 포도밭  와인관광가도의 중심에 자리잡은, 포도밭에 둘러싸인 
라인스바일러 마을
▲ 라인스바일러 포도밭 와인관광가도의 중심에 자리잡은, 포도밭에 둘러싸인 라인스바일러 마을
ⓒ 정기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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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 ‘독일의 농부’ : 문화경관 직불금, 농업회의소, 협동조합, 가족농가, 유기농업, 사회안전망 등으로 국가와 정부의 돌봄과 보살핌을 받으며, ‘돈 버는 농업’이 아닌 ‘사람 사는 농촌’을 위한 ‘농부의 나라’를 지키며 살아가는 독일, 오스트리아 등 EU(유럽연합)의 ‘행복한 사회적 농부’ 이야기



#독일#라인스바일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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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연구소(Commune Lab) 소장, 詩人(한국작가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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