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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달이면 벌써 18년이 됩니다. 

1998년 9월 3일. 누구에게는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이지만, 제게는 공권력에 의해 우리의 일터가, 우리의 동료들이 짓밟힌 날이었습니다. 옛날이야기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나에게, 그리고 그날을 기억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9월 3일은 어제 일처럼 생생합니다.

1996년, 저는 24살의 나이로 만도기계에 입사했습니다. 처음해본 공장일이 어찌나 버겁든지 두 달만 하고 관둬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함께 일하는 형님들이 잘 보살펴 준 덕에 2년을 넘겼습니다.

우리들의 전쟁

 지난 2일 저녁 갑을오토텍 노동자들이 집회를 열고 결의를 다졌다.
 지난 2일 저녁 갑을오토텍 노동자들이 집회를 열고 결의를 다졌다.
ⓒ 지유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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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IMF가 터졌습니다. TV를 켜면 하루가 멀다 하고 기업들이 폐업하고 도산하고 노동자들이 쫓겨나는 일이 다반사였지요. 불안했지만 만도기계는 워낙 튼튼한 회사라서 사실 별일 없으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인가 TV를 켜니 9시 뉴스에 한라그룹이 최종 부도처리가 된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마치 누군가 뒤에서 아무런 예고도 없이 사정없이 내 뒤통수를 때리고, 머리를 뒤흔드는 더러운 기분이었습니다.

불길한 징조는 단 한군데도 찾아볼 수 없던 회사였는데, 순전히 회장님의 문어발 경영 때문에 계열사들이 연쇄부도 처리가 된다고 했습니다. 이걸 사람들은 흑자부도라고 불렀습니다.

회사에서는 우리에게 고통분담을 해야 한다며, 인력감축을 해야 한다고 윽박질렀습니다. 그때부터 우리들의 전쟁은 시작되었습니다. 단 한 번도 곁눈질하지 않고 열심히 일했던 노동자들은 현장에서 쫓겨나지 않겠다고 머리띠를 매고 공장을 점거했습니다. 부도의 책임은 전적으로 경영진에게 있는데, 그 책임을 우리 노동자들이 짊어져야 하다는 것을 우리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밥도 공장에서 손수 지어먹고 우리들의 절박한 요구가 담긴 현수막도 곳곳에 달았습니다.

당시 만도기계는 아산, 평택, 문막, 청원, 경주, 대전, 익산 7개 공장에 2800명 노동자들이 일하고 있었습니다. 이 노동자들이 한라로고가 새겨진 똑같은 작업복을 입고 한날한시에 공장 가동을 멈췄습니다. 회사는 인위적인 인력조정을 하지 않겠다고 고용합의서에 서명했지만 합의서 잉크가 채 마르기도 전에 정리해고를 선언했습니다.

그리고 1998년 9월 3일 회사와 정부는 경찰병력 4500여 명을 투입해 농성 중이던 2700여 명의 조합원들을 강제로 연행했습니다. 과정에서 41명이 구속되고 300여 명이 불구속되었습니다.

이후 만도기계는 독일기업으로, 프랑스기업으로 그리고 다시 미국기업으로 찢어져서 매각되었고 우리는 이제 서로 다른 이름으로 다른 방식의 삶을 살아야했습니다. 제가 있던 청원공장은 독일기업에게 매각되었습니다.

당시 아산 공장이었던 갑을오토텍은 1999년 스위스 UBS AG사의 자회사인 UBS캐피탈컨소시엄 매각돼 만도공조로 바뀌었습니다. 이후 만도공조는 2003년 위니아만도로 사명을 변경했고, 이듬해 차량공조사업부분만 다시 미국 모딘사에 매각돼 모딘코리아로 재출범했습니다. 그리고 2009년 갑을상사그룹이 모딘코리아를 인수하면서 갑을오토텍이 탄생합니다. 그게 끝이라고 생각했습니다.

2016년 8월 1일, 갑을오토텍 공장 앞에 다시 용역과 경찰이 빼곡하게 서 있었습니다. 누가 봐도 1998년 당시와 판박이였습니다. 다른 게 있다면 경찰 폭력 대신 용역 폭력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고, 노동자들은 당시보다 더 치열하고 간절하게 이 투쟁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제 하나 남았습니다

 지난 7월 29일 오후 충남 아산에 위치한 갑을오토텍에서는 '특전사 용병, 용역깡패투입 규탄, 민주노조 사수, 갑을오토텍 투쟁 승리 민주노총 결의대회'가 열렸다.
 지난 7월 29일 오후 충남 아산에 위치한 갑을오토텍에서는 '특전사 용병, 용역깡패투입 규탄, 민주노조 사수, 갑을오토텍 투쟁 승리 민주노총 결의대회'가 열렸다.
ⓒ 지유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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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도기계 7개 공장. 어려운 시기 노조를 만들었던 선배들 덕분에 당시 만도기계 사업장은 노동조건이 좋았고, 노조활동도 활발한 편이었습니다. 각 지역에서 누구보다 모범적으로 활동했습니다. 그러나 2011년 프랑스 발레오만도 공장에서 시작한 노조파괴 광풍은 2012년 만도기계를 지나 콘티넨탈, 보쉬전장 등 구 만도 사업장을 모조리 휩쓸고 지나갔습니다.

파괴된 노조는 둘로 갈라졌고 회사는 노조파괴의 대가로 노조파괴 브로커에게 돈 보따리를 가져다 바치는 어처구니없는 일들이 벌어졌습니다.

정이 넘쳐나던 현장은 약육강식의 정글로 변했고 형은 기업노조로, 동생은 금속노조로, 부인은 금속노조로, 남편은 다시 기업노조로 넘어가는 웃기고 슬픈 현실에 우리는 놓였습니다.

노동자들의 삶은 파괴되고, 그 고통의 크기만큼 자본은 더 많은 돈을 긁어모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갑을오토텍만 아직 남았습니다. 노동자들이 자본에 의해 찢기지 않고, 민주노조 깃발 아래 모두가 함께 단결된 모습으로 남아 있는 공장! 식당에서 일하는 여성노동자들, 경비실 노동자들 모두가 차별 없이 정규직으로 일하는 공장! 이제 구 만도기계 노동조합에서 갑을오토텍 딱 하나 남았습니다.

그리고 같은 로고의 작업복을 입었던 우리의 선배들은 시커멓게 그을린 얼굴, 충혈된 눈으로 공장 앞을 지키고 있습니다. 노동자들에게 마지막 보루인 삶의 공동체인 민주노조를 지키려는 그 절박함이 고스란히 제 심장에 박힙니다.

제발, 자본의 질주를 멈추게 해야 합니다

 지난 2일 저녁 갑을오토텍 노동자들과 가족대책위 회원들은 함께 집회를 열고 결의를 다졌다.
 지난 2일 저녁 갑을오토텍 노동자들과 가족대책위 회원들은 함께 집회를 열고 결의를 다졌다.
ⓒ 지유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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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1일. 갑을오토텍에 회사 측이 불러온 용역들이 배치되는 날, 저는 공장에 들어가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경찰은 '중립'이라는 탈을 쓰고 우리의 출입을 막았습니다. 용역의 폭력에 내몰린 가장들의 얼굴을 조금 더 가까이에서 보겠다는 가족들의 눈물과 외침도 경찰의 방패를 뚫을 수 없었습니다. 그저 잘 짜인 각본처럼 경찰은 용역들에게 공장 턱밑까지 자리를 내어줄 뿐이었습니다.

2015년 갑을오토텍이 자행한 노조파괴는 이미 언론을 통해 널리 알려졌습니다. 갑을오토텍이 노조를 파괴할 목적으로 전직 경찰과 특전사를 채용해 벌인 무자비한 폭력에 많은 사람들이 혀를 내둘렀습니다. 이 일로 지난 7월 18일 박효상 전 대표이사가 법정 구속되고, 노조파괴를 컨설팅 했던 노무법인은 등록이 취소되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1년 만에 노동자들이 결국 파업에 나서자 회사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직장폐쇄를 강행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용역을 투입하겠다고 합니다. 정부는 공장 앞에 수 천 명의 경찰을 깔아놓고 공장투입을 저울질하고 있습니다.

유성기업에서는 노조파괴로 노동자가 죽었습니다. 이건 명백한 타살입니다. 노조파괴 시나리오를 지시한 현대차와 그걸 실행한 유성기업이 노동자를 죽음으로 내몬 것입니다. 노조파괴는 노동자들을 죽음의 사각지대로 내몹니다. 미치지 않고는 살 수 없는 현장. 죽기보다 출근하기 싫은 죽음의 공장. 그것은 전적으로 노조파괴 공모자들이 만든 막장드라마입니다.

갑을오토텍도 마찬가지입니다. 노동자들이 투쟁에 나서자, 현대차는 물량을 재빠르게 이원화시켰습니다. 의도와 무관하게 사실상 갑을오토텍 자본과 맥을 함께하고 있다는 강한 의혹을 지울 수 없습니다. 혹여라도 갑을오토텍 노동자들의 투쟁이 패배한다면 그것을 지켜보고 있는 다른 자본에는 한번쯤 계산기를 두들겨봐야 한다는 뿌리칠 수 없는 강한 유혹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 투쟁을 관심 있게 지켜보고 있는 대다수 노동자들에게는 극심한 공포와 패배주의를 안겨줄 것입니다.

2016년 한국사회에서 자본은 노동조합을 금기어로 만들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여전히 우리 사회에서 유일한 희망은 노동조합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갑을오토텍 노동자들의 싸움은 노조파괴를 끝장내고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삶을 스스로 지키는 싸움입니다. 비뚤어진 상식을 바로 잡고 일상의 평화로움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싸움입니다. 그리고 동료들의 생명을 지키고, 노동자의 존엄을 지키고자 하는 너무도 절박한 싸움입니다. 

노조파괴로 이어지는 죽음의 전주곡을 이제 멈추게 해야 합니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는 금속노조 콘티넨탈지회 조합원입니다.



#갑을오토텍#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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