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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주 분황사 모전석탑(국보 제30호). 현재 남아 있는 신라 석탑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으로 회흑색 안산암을 벽돌 모양으로 다듬어 쌓아 올렸다.
 경주 분황사 모전석탑(국보 제30호). 현재 남아 있는 신라 석탑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으로 회흑색 안산암을 벽돌 모양으로 다듬어 쌓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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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흔적을 찾아 떠나는 여행은 늘 마음을 설레게 한다. 과거의 시간 속에 머물러 있는 듯 보이면서도 현재 우리와 함께 살아 숨 쉬고 있다는 느낌이 전해져 오기 때문이리라. 

지난달 28일 오전 8시 30분 창원서 출발한 우리 일행이 경주 황룡사지(사적 제6호, 경북 경주시 구황동)에 도착한 시간은 11시께. 불상 높이가 무려 4.8m가 되는 장륙존상(丈六尊像)을 모셨던 금당터를 먼저 둘러보았다.

쓸쓸한 옛터에서 신라인의 꿈을 그리다

   경주 황룡사지(사적 제6호) 금당지. 장륙존상과 협시불의 대좌석, 그리고 이들 삼존불 대좌석의 동서쪽으로 14개의 불대좌석이 남아 있다.
 경주 황룡사지(사적 제6호) 금당지. 장륙존상과 협시불의 대좌석, 그리고 이들 삼존불 대좌석의 동서쪽으로 14개의 불대좌석이 남아 있다.
ⓒ 김연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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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당터 중앙 후면에는 장륙존상과 협시불의 대좌석(臺座石)이 자리하고 있고, 이들 삼존불 대좌석 동서쪽으로도 각각 7개씩 불대좌석(佛臺座石)이 남아 있었다. 원래 이곳에 궁궐을 짓다가 황룡이 나타났다는 말을 듣고 사찰로 고쳐 짓게 되었다는 황룡사의 연기설화도 흥미롭지만, 삼국유사에 전해지는 황룡사 장륙존상에 관련된 기록 또한 신비스럽기 그지없다.

서축 아육왕이 황철과 황금을 모아 석가삼존불을 만들고자 했으나 그 뜻을 이루지 못했다 한다. 그래서 인연 있는 나라에서 장륙존상의 모습을 이루기를 기원하면서 금과 철, 그리고 삼존불의 모형을 배에 실어 바다에 띄워 보낸 것이 신라 땅에 닿게 되었고, 이것을 재료로 신라 진흥왕 대에 장륙존상과 두 보살상을 주조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황룡사지 구층목탑지. 사리공이 발견된 심초석과 64개의 초석이 남아 있다.
 황룡사지 구층목탑지. 사리공이 발견된 심초석과 64개의 초석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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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25년(1238) 몽고의 침입으로 가람 전체가 불타 버려 이제는 쓸쓸한 흔적만 남아 있는 황룡사는 네 분의 왕을 거쳐 장장 93년 동안 국가사업으로 조성된 큰절이었다. 제24대 진흥왕 14년(553)에 짓기 시작하여 26대 진평왕 6년(584) 장륙존상(丈六尊像)을 모실 금당을 중건하였고 27대 선덕여왕 14년(645)에 이르러 백제 장인 아비지에 의해 구층목탑을 완성함으로써 가히 신라 호국불교의 본산이라 할 수 있었다.

우리는 금당지 남쪽 일직선상에 위치한 목탑지로 건너갔다. 사리공(舍利孔)이 발견된 심초석(心礎石)과 64개의 초석을 볼 수 있었다. 외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당나라에서 귀국한 자장의 건의로 선덕여왕 12년(643)부터 3년의 조성 기간을 거쳐 높이 약 80m인 구층탑을 완성하게 되었는데 일본, 중화, 오월, 탁라, 응유, 말갈 등 이웃 아홉 나라를 제압하기 위해 탑을 구층으로 세웠다고 전해져 내려온다.

황룡사 구층목탑, 황룡사 장륙존상, 그리고 진평왕이 하늘로부터 받았다는 천사옥대(天賜玉帶)를 신라삼보(新羅三寶)라 일컬으며 신라 왕실의 권위와 호국을 상징하는 세 가지 보물로 여겨 온 것을 보면 신라인들의 마음속에 황룡사가 차지하는 비중이 얼마나 큰지 짐작할 수 있다.

    황룡사지에서 분황사로 걸어가는 길에.
 황룡사지에서 분황사로 걸어가는 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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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주구황동당간지주(경북유형문화재 제192호).
 경주구황동당간지주(경북유형문화재 제19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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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사라져 버린 구층목탑의 장엄한 자태를 머릿속에 그리며 불력(佛力)으로 나라를 지키고자 했던 신라인들의 모습을 한참 떠올리고 있는데 우르르 금당터로 몰려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알고 보니 서울에서 수학여행을 온 초등학생들이다. 잠잠하던 옛터에 갑자기 생기가 넘쳐흐르는 느낌이 들었다. 번듯한 건물이라고는 전혀 없는 이곳 황룡사지를 어린 학생들은 어떻게 기억하게 될지 궁금하다.

노란 유채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길 따라 가까운 거리에 있는 분황사 쪽으로 걸어가는데 당간지주(경북유형문화재 제192호)가 눈길을 끌었다. 옛날 절에 행사나 의식이 있을 때 당이라는 깃발을 걸었는데, 당을 달았던 깃대를 당간이라 하고 당간을 양쪽에서 지탱해주는 두 돌기둥을 당간지주라 한다. 분황사 소유로 추측되는 이 당간지주는 특이하게도 당간의 받침돌이 거북 모양이라 인상적이었다.

가슴 콩닥콩닥 '모전석탑'을 거쳐 낭산 자락서 삶을 사색하다

    경주 황복사지 삼층석탑(국보 제37호). 692년 신라 효소왕이 부왕인 신문왕의 명복을 빌고자 세운 탑이다.
 경주 황복사지 삼층석탑(국보 제37호). 692년 신라 효소왕이 부왕인 신문왕의 명복을 빌고자 세운 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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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황사 경내로 들어서자 현재 남아 있는 신라 석탑 가운데 가장 오래된 모전석탑(국보 제 30호)이 한눈에 들어왔다. 회흑색 안산암을 벽돌 모양으로 다듬어 쌓아 올린 걸작을 마주하자 내 가슴이 콩닥콩닥하면서 신바람이 절로 났다.

자연석 기단 네 모퉁이에 사자상이 한 마리씩 앉아 있고, 1층 몸돌 네 면마다 쌍여닫이 돌문으로 된 감실이 있다. 불상을 모시는 감실 양쪽으로는 불법(佛法)을 지키는 인왕상이 힘차고 용맹스러운 모습으로 돋을새김되어 있었다. 선덕여왕 3년(634) 분황사의 창건과 함께 건립된 것으로 여겨지는 모전석탑은 기단 규모나 탑 형태로 보아 7층이나 9층이었을 것으로 추정하지만 아쉽게도 3층만 남아 있다.

    분황사 모전석탑 인왕상. 불상을 모시는 감실 양쪽으로 돋을새김되어 있다.
 분황사 모전석탑 인왕상. 불상을 모시는 감실 양쪽으로 돋을새김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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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다시 황룡사지로 걸어 나와 점심을 먹기 위해 차를 타고 놋전2길로 이동했다. 한 음식점에 들어가 순두부찌개와 제육볶음으로 점심을 맛있게 하고서 황복사지 삼층석탑(국보 제 37호, 경주시 구황동)을 보러 갔다.

신라 제32대 효소왕이 부왕인 신문왕의 명복을 빌고자 692년에 세운 탑이다. 지붕돌 네 귀퉁이가 살짝 올라가 경쾌한데다 세 지붕돌의 처마 끝부분을 올려다보니 마치 새가 날개를 천천히 펴면서 하늘로 날아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1942년에 이 탑을 해체 수리했을 때 2층 지붕돌에서 금동 사리함과 높이 12.2cm인 금제여래좌상(국보 제79호), 높이 14cm의 금제여래입상(국보 제80호) 등이 발견되기도 했다. 그런데 낭산에 있었던 이 절집은 의상이 출가한 곳으로 알려져 있을 뿐 언제, 누가 창건했는지는 전해지지 않고 있다.

    신라 문무왕의 시신 화장터로 추정되는 경주능지탑지(경북기념물 제34호).
 신라 문무왕의 시신 화장터로 추정되는 경주능지탑지(경북기념물 제3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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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주능지탑지 십이지신상중 하나.
 경주능지탑지 십이지신상중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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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주 낭산 마애보살삼존좌상(보물 제665호). 매우 드물게 보살상과 신장상이 나란히 배치되어 있다.
 경주 낭산 마애보살삼존좌상(보물 제665호). 매우 드물게 보살상과 신장상이 나란히 배치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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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2시 50분께 낭산 서쪽 기슭에 있는 경주능지탑지(경북기념물 제34호, 경주시 배반동)에 이르렀다. 신라 제30대 문무왕의 시신 화장터로 추정되는데 예로부터 능지탑, 능시탑, 또는 연화탑으로도 불렸다. 원래 기단 사방에 십이지신상을 새긴 돌을 세우고 그 위에 연꽃무늬 석재를 쌓아 올린 5층탑으로 짐작되나 무너진 것을 다시 쌓을 때 원형을 알 수 없어 2단만 쌓고 나머지 돌은 한쪽 옆에 모아 두었다.

능지탑 주변으로 민들레가 지천이라 괜스레 기분이 좋았다. 마침 능지탑지와 멀지 않은 위치에 경주 낭산 마애보살삼존좌상(보물 제665호)이 있어 중생사 절집으로 갔다. 바윗면에 조각된 이 작품은 매우 드물게 본존인 보살을 중심으로 악귀를 몰아내는 신장상(神將像)이 좌우에서 협시하고 있었다.

능지탑이 가까운 거리에 있는 점, 그리고 조각수법 등으로 보아 통일신라 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균열이 심한 상태라 아쉬웠다. 개인적으로 신장상의 표정이 지금도 잊히지 않는 것이 그 얼굴에서 힘든 삶을 살아가고 있는 오늘날 우리들의 고뇌가 느껴져서이다.


#황룡사지#신라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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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3.1~ 1979.2.27 경남매일신문사 근무 1979.4.16~ 2014. 8.31 중등학교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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