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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KBS 내에서 길환영 사장의 퇴진과 KBS 공정성·독립성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터져 나오고 있다. 길환영 사장의 '직할 부서'라고 할 수 있는 '수신료 현실화 추진단'에서도 길환영 사장의 사퇴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나왔다. 이곳에서 근무하고 있는 오성일 팀장은 22일 오전 사내 게시판에 쓴 글에서 길환영 사장의 사퇴를 요구해, 큰 호응을 얻었다. 오성일 팀장의 동의를 얻어, 그가 쓴 글을 소개한다. [편집자말]
유가족 앞 고개 숙인 길환영 길환영 KBS 사장(왼쪽)이 지난 9일 오전 서울 종로구 청운동사무소 앞에서 박근혜 대통령의 면담을 요구하고 있는 세월호 유가족과 생존자 가족들에게 사과 발언을 하고 있다. 오른쪽은 유경근 세월호사고가족 대책위 대변인.
▲ 유가족 앞 고개 숙인 길환영 길환영 KBS 사장(왼쪽)이 지난 9일 오전 서울 종로구 청운동사무소 앞에서 박근혜 대통령의 면담을 요구하고 있는 세월호 유가족과 생존자 가족들에게 사과 발언을 하고 있다. 오른쪽은 유경근 세월호사고가족 대책위 대변인.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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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임 KBS 보도국장의 폭로는 과장·왜곡된 일방적 주장이었고 사장이 즉각 해명, 대응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한 것이 사태를 악화시킨 원인이라고 하셨습니다. 팩트로 보면 문제 될 일이 아닌데 전임 보도국장의 무책임한 발언 때문에 이 지경까지 왔다는 것으로 들립니다. 

그럼 전임 보도국장 기자회견이 있었던 5월 9일 이전으로 돌아가 봅시다. 세월호 취재 현장에서 KBS의 기자와 카메라가 욕을 먹고 쫓겨났습니다. '기레기' 기자 후배들이 침몰하는 KBS의 저널리즘을 탄식하며 반성문을 올렸습니다.

그때 사장님도 함께 아파하며 반성하고 계셨습니까? 유족들이 어린 학생들의 영정을 들고 KBS로 몰려올 때 무얼 하고 계셨습니까? 사과를 준비하고 계셨습니까? 그 분들이 KBS에서 냉대 받고 청와대 앞으로 가지 않았다면 무얼 하고 계셨을까요? 그래도 '결자해지'의 심정으로 고개 숙이셨을까요? 안 그래도 반성하고, 사과하고, 고치려고 결단하던 참이었는데 백운기 국장의 경우처럼 '오비이락' 격으로 하필 그때 유족들의 청와대행 돌발 행동이 발생했다고 하시겠습니까?  

분명하게 바라봐야 합니다. KBS가 정말로 두려워해야 할 것은 유족들을 대통령 문 앞까지 가게 한 것이 아니라 KBS로 오게까지 했던 것입니다. 그들이 효자동으로 가지 않았다면 사장께서는 반성도, 사과도, 대화도 없었을 거라는 생각 때문에 긴 해명에도 마음이 열리지 않습니다.

대통령 보도는 왜 20분 이내에 나가야 합니까

그동안 잘 해 왔는데, 문제될 것 없었는데 전임 보도국장의 왜곡 폭로가 오늘의 혼란을 불러왔다는 듯한 그 해명이 그래서 구차하게 들립니다. 세월호 사고 이전, 전임 보도국장의 폭로 이전, 사장께서 보도본부에 넌지시 제시하던 의견이 통하던 '흔들림 없던' 길환영 체제를 생각하는 것은 여전히 우울하고 갑갑합니다.    

빼라, 바꿔라, 대놓고 지시하지는 않으셨을 듯합니다. 꼼꼼하고 치밀하신 분이니 사사건건 그렇게는 안 하셨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사장께서 이것저것 물어보고 '좋은 의견'이라고 전달하셨다는 그것들이 공교롭게도 권력에 이롭거나 정부의 부담을 줄여주는 방향이었던 것만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사장께서) PD 출신이어서 보도의 메커니즘을 잘 모른다면 '대통령 관련 보도 20분 이내 소화', '해경 비판 보도 자제' 같은 것들도 보도 전문가들의 원칙과 판단에 맡겨 두는 것이 옳지 않았겠습니까? 꼭 그렇게 꼼꼼히 챙기지 않아도 KBS 뉴스는 이미 권력에 대한 비판에는 충분히 신중해 왔다고 생각합니다. 이 점에 있어서는 전임 보도본부장, 보도국장은 물론 보직을 사퇴한 부장단들도 반성에서 자유롭지 못할 것입니다.     

대통령 관련 보도는 왜 20분 이내에 소화되어야 하는 것입니까? 내용이 있고, 경중이 있을 텐데, 그런 것들 모두 고려해서 보도본부에서 판단하고 있을 텐데, 왜 사장께서 굳이 20분 이내에 소화하라고 의견을 주셔야 하는 것입니까? 사장께서 수신료현실화를 통해 어깨를 겨루어 보자는 BBC 사장도 보도국장에게 그런 가이드라인을 주는지 궁금합니다.

어린 생명들이 침몰하는 배 안에 갇혀 있는데도 제대로 된 구조는커녕 거짓말과 책임회피에 급급한 해경이었습니다. 그들을 비판하지 말고 독려해야 실종자가 빨리 수습될 수 있다는 판단은 도대체 어디서 나오는 것입니까? 그렇다면 아직 실종자 수습도 안 끝났는데 해경을 해체시켜 버리는 대통령의 경솔한 결정에 대해서도 뉴스에 반영하도록 의견을 주시는 게 옳지 않겠습니까? 

사장님이 지키려는 공영방송은 대체 어떤 겁니까

KBS 기자협회 "청와대만 바라보는 길환영 집에 가라" KBS 기자협회 회원들이 21일 오후 서울 여의도 KBS 신관 앞에서 열린 총력투쟁 결의대회에서 청와대의 KBS 보도와 인사 개입 등을 규탄하며 길환영 KBS 사장의 사퇴를 요구하고 있다.

이날 KBS 기자협회는 세월호 유가족과 실종자 가족 취재를 위한 최소한의 인력은 제외하고 무기한 뉴스 제작을 거부한다고 밝혔다.
▲ KBS 기자협회 "청와대만 바라보는 길환영 집에 가라" KBS 기자협회 회원들이 21일 오후 서울 여의도 KBS 신관 앞에서 열린 총력투쟁 결의대회에서 청와대의 KBS 보도와 인사 개입 등을 규탄하며 길환영 KBS 사장의 사퇴를 요구하고 있다. 이날 KBS 기자협회는 세월호 유가족과 실종자 가족 취재를 위한 최소한의 인력은 제외하고 무기한 뉴스 제작을 거부한다고 밝혔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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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내 담화에서는 '기자 직종의 정서를 이해 못한' 측면이 있다고 에두르셨지만, 일전 기자회견에서는 '기자협회가 강경하게 하는 것은 직종이기주의'라고 말씀하셨더군요. 그 말이 본심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앞서 얘기했듯이 KBS의 보도가 이 지경에 이른 데는 사장님뿐만 아니라 기자 집단의 책임이 큽니다. 이 와중에마저 직종이기주의가 개입한다면 그 또한 용서 못할 일입니다.

그러나 지금의 이 사태는 사장님의 인식처럼 직종의 이해관계로 귀착시켜 버릴 문제가 아닙니다. 직종을 불문하고, 선후배를 가리지 않고 사장 사퇴를 호소하고 있습니다. 막내 기수 기자들의 눈물과 분노에서 시작된 기자협회의 사퇴 요구가 직종이기주의라면, 사장님을 협회원에서 제명까지 하면서 사퇴를 요구하고 있는 PD협회는 직종혐오주의입니까? 경영협회, 방송기술인협회, 아나운서협회, 방송그래픽협회, 계약직협회, 설비협회, 직능인연합회는 직종사대주의입니까? 본질을 왜곡하려 하지 마십시오.

'좌파노조에 의해 방송이 장악되는 것은 반드시 막아야' 한다고도 얘기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자연인 길환영이라면 몰라도 공영방송 사장으로서는 그런 말 쉽게 해서는 안 됩니다. 독립성이 위협받는 공영방송, 권력 앞에 얌전한 공영방송, 국민이 정말로 알고 싶은 진실을 용기 있게 알리지 못하는 공영방송, 그래서 국민의 마음 속에서 멀어져 가는 공영방송을 어떻게라도 살리자고 불이익을 무릅쓰고 호소하는 수많은 직원들을 싸잡아 좌파라고 하시면 사장께서 지칭하는 그 좌파로부터 지키려는 공영방송은 도대체 어떤 공영방송입니까?

'정치적 목적'이 있다고 근거 없이 단언하지 마십시오. 지금 많은 구성원들이 간절히 바라는 것은 '정치적 목적'에 부합하는 어떤 완곡한 '좋은 의견'도 발붙이지 못하는 KBS 뉴스와 프로그램입니다.  

더 해명할 게 없다면, 이제 물러나 주십시오

PD로서 30년 동안 사장님이 보여준 성실성은 인정합니다. 최초의 내부 승진 사장으로서의 자부심도 존중합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공영방송의 생명인 독립성과 자율성을 지켜내지 못한 책임을 면할 순 없습니다. '보도 메커니즘을 잘 몰랐다, 좋은 의견을 제시한 것뿐이다. 그렇게 받아들여질 줄은 몰랐다'는 해명으로 덮을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사장님께선 짧지 않은 재임 기간 동안 권력에 당당하고 단호한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어떤 해명과 다짐도 공허하게 들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상황에서마저 구성원들의 간곡한 호소를 직종이기주의와 좌파선동으로 규정짓는 그릇된 인식 때문에 일말의 기대마저 접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해명이 있기 전까지는 사장님의 사퇴를 거론하는 데 주저함이 없지 않았습니다. 일방적인 얘기에 휩쓸려 위험한 주장을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두려움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망설임 없이 요구할 수 있겠습니다. 이제 더 해명할 것이 없다면 자리에 연연하지 말고 물러나 주십시오.   

※ 글을 적어 놓고 이런 글, 이런 요구가 수신료현실화에 찬물을 끼얹는 것 아닌지 고민했습니다. 지난 7년여의 기간, 실무자로서 수신료현실화 추진에 참여해 온 터라 더더욱 마음 속 혼란이 컸습니다. 하지만 국민들의 냉소 속에서도 KBS의 독립성과 공정성을 지키고자 하는 간절한 의지들이 아직 살아 있음을 보이는 것이 수신료현실화를 위한 작은 불씨나마 살려가는 길이라는 생각에 주제넘은 글 드립니다.


#길환영 사장 퇴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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