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대구 방천시장에 있는 김광석 조형물  김광석 벽화길 입구에 있는 김광석 조형물. 마치 하늘소극장에서 콘서트를 하는 모습같다.
▲ 대구 방천시장에 있는 김광석 조형물 김광석 벽화길 입구에 있는 김광석 조형물. 마치 하늘소극장에서 콘서트를 하는 모습같다.
ⓒ 권미강

관련사진보기


김광석이 부른 주옥같은 명곡들을 소재로 한 최초의 뮤지컬 <바람이 불어오는 곳>이 지난 7월 28일 끝났다. 개인적으로 모든 걸 접고 뛰어든 공연이었다. 뮤지컬 홍보프로듀서는 처음이었으니 두려움도 있었다. 하지만 386세대로서, 김광석의 노래를 듣고 위안을 얻었던 사람으로서 빚진 자의 마음으로 손을 보탰다.   

어쿠스틱 뮤지컬 <바람이 불어오는 곳>은 김광석을 그리워하고 그의 노래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만든 공연이다. 7년여의 기획기간을 거쳐 지난해 초부터 본격적인 준비를 하고 김광석의 고향인 대구 대봉동에서 초연에 들어갔다. 2012년 11월 30일부터 그가 세상을 떠난 1월 6일까지 총 44회의 공연을 올렸다.

'굳이 대구에서 할 필요가 있느냐', '실패할 거다' 등등 우려를 접고 밀어붙인 공연이었다. 다행이 많은 관객들이 우리의 마음을 읽어줬고 반응도 좋았다. 그리고 김광석 노래의 고향이자 1000회 콘서트를 기록한 대학로로 올라왔다.

투자자는 없었다. 그저 김광석을 좋아하는 지인들과 기획자가 십시일반 모은 돈으로 어렵게 올렸다. 올해 3월 15일부터 5월 19일까지 두 달여간 달렸고 그에 힘입어 6월 21일부터 7월 28일까지 앙코르공연에 들어갔다. 총 158회 공연에 1만9000여명의 관객이 들었다.

대단한 일이다. 그가 떠난 지 17년. 그의 노래는 지금도 여전히 살아있는 것이다. 어떤 분들은 울었고 어떤 분들은 환호했다. 노래마다 담긴 사연이 다 달랐고 자신의 사연이 담긴 노래가 나올 때는 흐느끼기도 했다.

놀랍게도 미국의 뉴욕, 텍사스, LA, 프랑스 파리, 캐나다 토론토, 중동 두바이, 아프리카 가나, 일본 오사카, 동경 등등에서 오신 분들도 많이 관람했다. 고국에 다니러 온 교포들이었고 연령층도 다양했다(공연 중 가장 멀리서 오신 관객에게 선물을 주는 내용이 있다).

공연을 지켜보면서 나 또한 그의 노래에 매번 감동했다. 마음이 울적할 땐 가만히 내밀어주는 따뜻한 손 같았고, 기쁠 땐 더 마음을 평온하게 해주는 친구 같은 노래들. 문득 그가 떠난 지 17년이 된 이 시대에도 그의 노래는 '왜 이렇게 불리어지고 사람들에게 위안이 될까?' 궁금증이 아닌 궁금증이 생겼다.

그래서 그를 만나기로 했다. 물론 가상인터뷰를 통해 말이다. 그가 생전에 했던 인터뷰와 콘서트장에서 했던 말들, 그의 대학노트들, 그의 지인들의 이야기들을 토대로 질문에 대한 답을 유추해냈다. 가상인터뷰였음에도 난 내내 행복했다. 정말 그가 옆에 있는 거 같았고 그의 노래가 내내 귓가에 맴돌았다. - 기자 말

"여러분, 행복하세요? 전 행복 ^^ 해요!"
"바람이 불어오는 하늘을 올려다보세요. 제 노래가 들릴 거예요"

노래가 끝나면 늘 하는 말이 있다. 그의 트레이드마크 같은, "행복하세요". 그의 얼굴도 행복해보였다. 웃으면 눈가와 입가로 주름이 가득한 영락없는 하회탈이다. 그 얼굴을 보고 누군들 행복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런 모습으로 늘 우리 곁에 있을 줄 알았다.

그가 즐겨 찾던 홍대나 대학로 그리고 인사동의 골목길 어디, 잘 보이지 않는 간판이 바람에 흔들리는 허름한 카페 같은 곳에 가면 분명 있을 줄 알았다. 그리고 며칠쯤, '김광석 라이브콘서트' 이런 글자가 박힌 포스터가 그 카페 골목에 두어장쯤 붙어있을 줄 알았다.

노래로 세상 사람들과 오랫동안 만나고 싶어 했고 우수에 젖은 목소리로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을 불러 슬픔을 끊임없이 밀어 넣어줬지만 이내 '일어나'로 희망 한 줌 던져주던 사람이었으니 말이다.

1996년 1월 6일 새벽 4시 30분쯤 그는 돌연 자신의 길을 이승에서 하늘로 틀어버렸다. 한 마디 말도, 변명 거리 글 한 장도 남기지 않고. 이유도 영문도 모르고 그를 떠나보낸 사람들은 말 그대로 남겨진 사람이 가져야 하는 멍한 기분에 휩싸였다. 그와 특별한 인연이 있던 사람도, 그와 개인적인 대면은 없지만 그의 노래만은 누구보다도 좋아했던 사람도, 라디오에서 가끔 흘러나오던 그의 노래를 듣던 사람도 그의 부고는 참 낯설고 견디기 힘든 소식이었다.

그렇게 세월이 흘렀다. 그를 기억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여 매년 추모제도 지내고 추모콘서트도 열었다. 또 그렇게 세월은 흘렀고 그의 부재는 이제 일상이 됐다. 하지만 그의 노래는 여전히 불리고 있다. 누구나 가고 싶을 때 가고, 듣고 싶을 때 듣는, 그의 노래는 주인 없는 카페에서 듣는 노래가 됐다. '김광석, 다시부르기 콘서트'는 지금까지 진행되고 있고 그의 노래를 담아낸 뮤지컬도 만들어졌다. 그의 노래는 더 영원해졌고 그는 노래의 영원한 주인이 됐다. 영원한 가객(歌客) 김광석. 하늘소극장에서 여전히 라이브콘서트를 하고 있는 그를 만났다. 그리고 그가 노래의 길을 하늘로 낸 이유를 들어보기로 했다.

김광석, 그를 대면하다 

김광석 기타  뮤지컬 '바람이 불어오는 곳' 대구초연에서 17년 만에 무대에 오른 김광석의 기타.
▲ 김광석 기타 뮤지컬 '바람이 불어오는 곳' 대구초연에서 17년 만에 무대에 오른 김광석의 기타.
ⓒ LP STORY

관련사진보기


그가 불렀던 '흐린 가을하늘에 편지를 써'처럼 흐린 가을하늘이 아닌 눈부신 연둣빛 하늘. 하늘소극장은 그 언저리에 있었다. 구름으로 된 문을 열고 들어가니 무대 중앙에서 하모니카를 불고 있는 그가 있었다. 기타는 그와 한 몸처럼 적당히 그의 배에 닿아 있었다.

- (쭈볏쭈볏) 안녕하세요.
"(나를 보고 그냥 웃는다. 하회탈 같은 웃음)"
- (바짝 다가가서) 잘 지내시죠 ^^.
"(쑥스럽다는 듯 '씩' 웃는다)"

그의 웃음은 여전히 촌티 났다. 그 촌스러움이 참 좋다. 사람냄새 나는 촌스러움. 그가 세련됐다면 그의 노래가 그리 가슴에 와 닿았을까 하는 생각을 문득 해본다. 시간이 별로 없다. 그는 공연을 해야 하고 나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야 했으니 인터뷰는 서둘러 진행했다. 그동안 궁금했던 것을 두서없이 물어보기로 했다. 

- 왜 떠나셨어요?(첫 질문이 너무 도발적이었나?)
"1995년 8월 즈음인가요? 공연이 중반을 넘어섰고 다들 축하해줬지요. 열심히 했다고 , 특종이라고 악의 없는 칭찬들을 해주고, 하지만 내 마음 속에 일고 있는 허전함은 무엇 때문인가? 나를 치열하게 해준 것은 무엇이었나? 후회도 보람도 아닌 그저 살아있음에 움직인…. 그 움직임이 불쌍하고 무료했어요. 사람들이, 울고 웃고 박수치는 그 사람이, 사람들이 무료했어요, 즐겁지 않는 이유를 모른 채 난 여전히 즐겁지 않았지요. 가라앉는 것인가? 무섭구나.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그리고 5개월 만에 이곳으로 왔지요. 아직도 모르겠어요. 그런데 편안해요. 아무 생각 없이 내가 부르고 싶은 노래만 부르면 되니까요(예의 그 하회탈 웃음이다).

김광석벽화길  김광석 고향인 대구 중구 대봉동 방천시장에 조성된 김광석 벽화길. '바람이 불어오는 곳'에서 주인공 이풍세를 열연한 가수 박창근씨를 비롯해 많은 가수들이 이곳에서 버스킹콘서트를 연다.
▲ 김광석벽화길 김광석 고향인 대구 중구 대봉동 방천시장에 조성된 김광석 벽화길. '바람이 불어오는 곳'에서 주인공 이풍세를 열연한 가수 박창근씨를 비롯해 많은 가수들이 이곳에서 버스킹콘서트를 연다.
ⓒ 권미강

관련사진보기


- 처음부터 너무 센 질문이어서 죄송해요 ㅠㅠ. 너무 아쉬워서요. 고향이 대구라고 해서 참 반가웠어요. 대구에는 김광석벽화길도 있는 거 아시죠? 많은 사람들이 벽화길에 와요. 거기에 가면 항상 김광석씨의 노래가 흘러나오죠.
"제 이름이 붙은 길이 있다니 참 좋네요. 후후. 음, 대구 중구 대봉동에서 정확히 1964년 1월 22일 태어났어요. 3남2녀 중 막내예요. 아버지가 자유당정권시절에 교원노조사태로 교단을 떠나고 68년도에 서울 창신동으로 이사 왔어요. 그러다 대구에 계신 할머니가 쓰러지셔서 다시 대구로 내려갔지요. 동덕국민학교로 전학갔는데 한 2년 정도 다닌 거 같아요. 그러다가 6학년 되던 해 서울로 다시 이사 와서 졸업은 창신국민학교에서 했지요. 대구에서의 기억이 나네요. 토끼도 기르고 야구도 하고 그랬는데…. 앞 이빨이 나온 토끼가 어찌나 귀엽던지. 후후후. 대봉동 참 그립군요."   

- 음, 본인이 음악에 소질이 있다는 것을 언제부터 알게 됐나요?
"소질이 있다기보다는 노래 부르는 것을 좋아했어요. 경희중학교 시절 현악반에 들어간 게 음악과의 첫 만남이지요. 그때부터 바이올린, 오보에, 플루트 등 다양한 악기를 배우고 악보 보는 법도 익혔어요. 79년 대광고등학교 시절에는 합창단 활동도 했지요. 82년에 명지대 경영학과에 입학해서 1학년 때 대학 연합동아리인 '연합메아리'에 들어갔어요. 그때 한 친구에게 '젊은 예수'라는 운동권 가요집을 선물 받았는데 그 안에 있던 '못생긴 얼굴'을 부르다가 그만 남자답지 못하게 울어버렸어요. 진짜 촌스럽죠." 

- 그게 매력 아닌가요? 후후. 그럼 본격적으로 가수의 길을 걷게 된 때는 언제였나요?
"84년에 김민기 형의 '개똥이' 음반에 참여했고 이때 만난 사람들과 '노래를 찾는 사람들 1집'을 만들었어요. 그런데 85년 1월 군에 입대했는데 큰 형님이 군에서 돌아가셨어요. 그로 인해 6개월 만에 제대하고 복학했는데 뭘 할까 고민하다가 '못생긴 얼굴'과 같은 노래를 부르고 사는 것도 괜찮겠다 싶어서 노래의 길로 접어들었지요. 87년 10월에 기독교 백주년 기념관에서 열린 노찾사의 첫 정기 공연에 참여했는데 ' 녹두꽃'이란 노래를 불렀어요. 그때 관객들이 내 노래를 듣고 열광했어요. 그리고는 단숨에 노찾사 간판가수로 떠올랐는데 난 잘 모르겠어요. 후후 그때부터 각종 집회에 단골로 초대됐지요."

- 노찾사에서 인기를 얻었지만 대중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았는데 대중가수로서의 길은 언제부터 걸었나요?
"대학 1학년 때 교회성가대 활동을 했는데 거기서 '사랑의 썰물'을 부른 임지훈 형을 만났어요. 그때부터 음악적으로 참 가깝게 지냈죠. '사랑의 썰물'은 동물원 멤버이자 '거리에서, 그날들, 흐린 가을하늘에 편지를 써, 기다려줘, 변해가네' 등 그야말로 김광석이라는 가수를 있게 한 김창기가 만든 곡인데 지훈형은 이 곡 하나로 엄청난 인기를 누렸죠. 아무튼 이런 인연들이 모여 자연스럽게 대중가수의 길을 걷게 됐어요. 그러니까 그때가 87년 여름이었던 걸로 기억되네요. 노래를 좋아하는 친구들과 모여서 별 생각 없이 녹음한 것을, '산울림'의 김창완씨가 듣고 음반을 내자고 해서 낸 음반이 88년에 낸 '동물원 1집'이었지요. 

그때 우리들은 "이걸 사는 사람은 이상한 사람일 거다"라고 농담을 했었는데 '거리에서'와 '변해가네'가 빅히트를 쳤지요. 멤버들 다 어리둥절했었죠. 우리들의 노래가 사람들에게 희망을 준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벅찼죠. 상업주의에 오염되지 않은 밝은 이미지를 구축하고 천편일률적인 사랑 타령에서 벗어나지 못하던 주류 대중음악의 작은 대안이라는 평가를 받았구요. 동물원 멤버로서 참 많은 공연을 다녔지요. 그러다 슬슬 나만의 음악을 찾고 싶었어요. 그래서 동물원에서 나와 89년, '기다려줘', '너에게'를 담은 1집을 내놨어요. 계몽문화센터에서 첫 개인 콘서트를 시작했는데, 조금 힘들었지만 정말 열심히 음악 활동을 했었죠."

어쿠스틱 뮤지컬 '바람이 불어오는 곳' 의 한 장면  이풍세라는 인물을 통해 김광석의 노래의 길을 되짚어본 뮤지컬 '바람이 불어오는 곳'
▲ 어쿠스틱 뮤지컬 '바람이 불어오는 곳' 의 한 장면 이풍세라는 인물을 통해 김광석의 노래의 길을 되짚어본 뮤지컬 '바람이 불어오는 곳'
ⓒ LP STORY

관련사진보기


- 총 몇 개의 앨범을 냈나요?
"89년 1집을 시작으로 91년 '사랑했지만'이 담긴 2집을 내고, 92년 '나의 노래'가 담긴 3집을 내면서 이제는 정말 노래의 삶을 살겠다고 마음먹었죠. 93년 3월에는 동물원 노래와 민중가요에서 내 스스로가 베스트라고 생각하는 '거리에서, 이등병의 편지, 광야에서, 그루터기' 등을 모아서 '다시부르기 1집'을 냈어요. 반응이 괜찮았어요. 작품성이나 상업성 둘 다 만족시켰다고들 했지요. 그리고 93년 7월에는 10년간의 노래생활을 정리하고 되돌아보기 위해 한 달간 대학로 학전소극장에서 콘서트를 가졌어요. 이때 상당히 많은 분들이 콘서트장을 찾았는데 관객들과 눈을 마주보면서 부르는 노래가 너무 즐거웠어요.

94년에는 '서른 즈음에', '일어나'가 담긴 4집 음반을 냈는데 이때부터 '김광석'이라는 가수로써 좀 더 명확해진 노래의 길을 보여줬다는 평가를 받았고요. 95년에는 김민기, 김의철, 이정선, 백창우, 김목경 등 1970년 포크 1세대로부터 이어져오는 흐름과 계보를 하나의 음반으로 정리하기 위해 '다시 부르기 2집'을 냈는데 그야말로 '한국모던포크의 대표곡 모음집'이라고 할 만하죠. 이 음반에는 한 대수의 '바람과 나', 이정선의 '그녀가 처음 울던 날', 양병집의 '두 바퀴로 가는 자동차', 김의철의 '불행아' 등 모던포크 뿐 아니라 백창우의 '내 사람이여', 한동헌의 '나의 노래', 김창기의 '잊혀지는 것, 변해가네', 유준열의 '새장 속의 친구' 등 상당한 노래가 수록됐고요. 류근의 시에 내가 곡을 붙인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이 실려 있어요."

- '다시 부르기' 음반 때문인지 지금의 팬들은 그 노래들이 모두 김광석씨의 노래로 알고 있어요.
"저로서는 참 고마운 일이죠. 사실 그 음반들이 성공을 거두면서 콘서트도 성공하고 대중적으로 인기도 얻으면서 경제적으로 큰 도움이 됐고, 홍대 앞에 제 건물도 얻게 됐죠. 후후. 음반이 성공하게 된 것은 당시 세션의 정수를 보여줬던 조동익밴드가 맡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편곡을 맡은 조동익씨는 원곡의 맛을 헤치지 않으면서도 '김광석이라는 가수'의 버전으로 곡들을 재탄생 시켰죠. 사실 리메이크 노래는 원곡을 능가하기는 힘든데 진정한 편곡의 진수를 보여줬지요."

어쿠스틱 뮤지컬 '바람이 불어오는 곳'  대구초연 포스터  대구 초연 포스터에는 김광석과 함께 이풍세역을 맡은 박창근과 최승렬이 나란히 인쇄돼 있다
▲ 어쿠스틱 뮤지컬 '바람이 불어오는 곳' 대구초연 포스터 대구 초연 포스터에는 김광석과 함께 이풍세역을 맡은 박창근과 최승렬이 나란히 인쇄돼 있다
ⓒ LP STORY

관련사진보기


- 저도 '다시부르기 2집'에 실린 곡을 다 좋아해요. 뭐랄까요? 노래와 삶, 기쁨과 슬픔, 자유와 외로움이 진득하게 녹아들었다고나 할까요? 슬픈데 힐링이 되고 기쁘기에 더 없이 기쁜 그런 느낌이요. 눈에서는 눈물이 흐르는데 뭔가 마음은 평온해지면서 입가에 미소를 짓게 되는 그런 느낌이요. 에구…. 감정이 복받치네요. 후후. 근데 이런 기분 느끼는 거, 저만이 아닐 걸요?
"그렇다면 다행이네요. 제 노래가 마음을 치유해준다니요. 사실 '다시 부르기' 음반들은 저에겐 특별해요. 그 전까지 '김광석' 하면 '기다려줘, 사랑했지만' 뭐 이런 노래를 부른 가수 정도로 알고 있었고 대학가에서 주로 사랑받아온 가수였죠. 그런데 이 음반이 나오면서 서서히 대중적인 인기를 얻기 시작했다고 봐야죠.

아까도 말해지만 '다시 부르기 1집'을 내고는 대학로 학전소극장에서 한 달간 공연했는데 제 노래 뿐 아니라 제가 평소에 좋아했던 노래들을 불렀죠. 주위에서는 그 노래들을 음반으로 내보면 어떻겠냐고 했고 이렇게 세상에 나오게 된거죠. 그리고 대학로에서 1000회 소극장콘서트라는 기록도 남겼고요. 이때가 저로서는 진정한 '가객(歌客)'으로 살았던 때가 아닌가 생각돼요.

- (반함과 존경이 교차되는 눈빛으로 김광석을 바라보며) 한 음악평론가는 이 음반에 대해 이렇게 평하더군요. '김광석의 놀라운 힘은 남의 노래를 자신의 노래로 체화하는 완벽한 소화력이다. '이등병의 편지'부터 '광야에서'까지 모든 노래들을 마치 원래 김광석이 만들고 불렀던 것 같은 착각을 부른다.' 이렇게요.
"아, 김작가라는 음악평론가가 한 말이군요. 후후 그 친구는 저에게 늘 고민하고 사색하는 사람이었다고 회고하더군요. 그의 회고처럼 전 오랜 무명의 세월과 노래로 벌였던 투쟁의 시간들을 지나왔어요. 이러한 시간들이 저에겐 나름대로의 철학이 되고 감정에 체화돼 목소리로 녹아들었다고 하는데 정확하게 본 거 같아요. 그게 제 노래의 힘이 됐다고 저도 생각하구요. 힘겹게 지내온 과거는 그냥 흘러가는 게 아니잖아요. 그런 시절을 지내왔기에  비로소 진정으로 내고자 했던 목소리를 가질 수 있었던 거 같아요. 그러니 뭐든 너무 빨리 이루려 하지 마세요. 후후. 삶이란 어찌 보면 시종일관 기다림이잖아요. 기다리다보면 만나게 되는 거잖아요." 

- 아, 인생의 화두 같은 말씀이시군요. 저, 오빠라고 부를게요. 저보다 나이가 많으시니 오빠라고 해도 되죠? 히.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주는 그. 이제 그는 오빠다 후후). 광석오빠가 이곳 하늘소극장으로 노래의 길을 정한 지 17년 됐어요. 그런데 다시 대학로에서 '김광석붐'이 일고 있어요. 그것도 뮤지컬로요. '故 김광석이 부른 명곡으로 만든 최초의 어쿠스틱 뮤지컬'이라는 '바람이 불어오는 곳'이 소극장에서 공연되고 있구요. 유명한 배우들이 출연하는 대형뮤지컬인 '그날들'이 공연되고 있어요. 올 연말에는 또 다른 뮤지컬도 만들어진다고 해요. 이런 거 보면 광석오빠가 우리에게 '영원한 가객'임에 틀림없어요. 그쵸?
"아, 참 부끄럽고 고맙네요. 음, 전 내 노래가 '나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게 이야기하고 싶어 하는 것을 말하는 일종의 전달매체이길 바라요. 내가 살아가면서 생각했던 것을 노래로 말함으로써 위안도 받고 또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거, 뮤지컬도 이것만은 놓치지 않고 만들어졌으면 좋겠어요."

- 시간이 많이 됐네요. 아쉽지만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여쭐게요. 김광석에겐 음악이란, 노래란 무엇인가요?
"좀 전에 얘기한 대로 나의 노래는 대화이고 소통이에요. 이야기라고 할 수 있지요. 사랑하는 이야기, 아파하는 이야기, 그리워하는 이야기. 평범한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겪고 느끼는 이런저런 일상의 이야기를 노래로 담아내는 거죠. 또 음악을 통해 내가 항상 꿈꾸는 것은 변화에 대한 갈망이죠. 팬들과도 항상 새롭게 만나고 싶고 노래에서도 매일매일 새로움이 묻어나길 바라요."

- 진짜 마지막으로 우문인 줄 알겠지만… 앞으로의 계획이 있다면요?
"이곳에서 계획이라니요. 후후. 내가 예전에 마흔살이 되면 오토바이 하나 사서 세계일주하고 싶다고 그랬어요. 머리 빡빡 깎고 금물 막 들여 가지고 가죽바지 입고…. 그게 그렇게 해보고 싶었죠. 충무로 가서 오토바이 구경도 하고 앉아보기도 했어요. 멋질 거 같았어요. 근데 그걸 못해봤네요. 음. 여기서 한번 해볼까요? 하하하…. 이렇게 하늘소극장에서 노래 부르는 게 좋아요. 가끔 아랫동네 내려다보면서 어떤 노래를 좋아하나 하면서 그 노래 듣고 싶다하면 노래 불러주고요. 아, 듣고 싶은 노래 있으면 언제든지 하늘을 쳐다보고 외쳐주세요. 그럼 불러 줄게요. 단 제 노래는 이제 가슴으로도 들어주세요. 바람이 불어오는 곳, 그곳에서 제 노래가 들릴 거예요."

어쿠스틱 뮤지컬 '바람이 불어오는 곳'   '바람이 불어오는 곳'은 김광석과 노래의 정서를 고스란히 담아냈다는 호평을 받았다.
▲ 어쿠스틱 뮤지컬 '바람이 불어오는 곳' '바람이 불어오는 곳'은 김광석과 노래의 정서를 고스란히 담아냈다는 호평을 받았다.
ⓒ LP STORY

관련사진보기


그와의 인터뷰는 끝났지만 난 그와 끊임없이 대화를 나눴다. 마지막 질문은 마지막을 모르고 이어졌다. 그의 노래처럼 말이다. 그의 말이 오랫동안 가슴을 적신다.

"나의 노래는 나의 힘이고 나의 삶이죠. 그 노래가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자그마한 울림으로 다가가길 바랄 뿐입니다."

덧붙이는 글 | * 이 글은 대구문화재단 계간지 '대문' 여름호에도 게재됐음을 밝힙니다.



#김광석 #바람이 불어오는 곳 #어쿠스틱 뮤지컬 #김광석 다시부르기
댓글1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상식을 가지고 사는 사회를 꿈꾸는 사람 '세상의 평화를 원한다면 내가 먼저 평화가 되자'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