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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집을 나가기만 해도 한라산이 이렇게 보인다.
ⓒ 조남희

춥다. 입이 돌아가도록 집이 춥다. 그럼 보일러를 틀면 되지 않냐고? 가스가 떨어졌다. 가스가 어떻게 떨어지냐고? 가스비를 안 냈냐고? 가스 고지서가 오는 집에 살면 좋겠다. 비싼 가스라도 좋으니 당장 배달이 왔으면 좋겠다. 

제야의 종소리가 새해가 왔음을 알리는 동시에 우리 집 가스는 운명하셨다. 누군가 이런 내게 '삶은 고난을 통해 더욱 아름다워진다'며 위로하지만 위로가 안 됐다. 날이 밝자마자 서귀포의 온갖 LPG가스배달소에 전화를 돌려보지만 연휴인지라 나를 구제해줄 배달집은 없었다. 결국 2013년 1월 1일 정초부터 씻지도 못하고 떡국도 못 먹었다.

여기는 제주도 서귀포시 대평리다. 나는 서울내기 출신이다. 도시가스란 나에게 밥먹고 숭늉마시는 것처럼 당연한 것이었으며 가스비는 자동이체로 돌려놓고 살았던 사람이다. 추운 겨울에 보일러를 틀어놓는 것 또한 당연했다.

실내온도를 20도 이하로 유지하자는 TV의 공영광고를 보면 '너나 해! 있는 것들은 더할 텐데 왜 나한테 난리야' 라며 뜨끈한 방바닥에 등을 지지는 것을 즐겨왔던 사람이다. 그런데 지금은? 실내온도 20도는 꿈도 못 꾼다. 보일러를 매일 튼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다. 전기장판 속에서 추위를 견딘다. 그러다 가끔 전기장판 속에서도 실내의 찬 공기가 나를 잠 못이루게 할 때면, 보일러를 튼다.

제주도에 와서 가스 때문에 '멘붕'에 빠졌던 그날을 잊지 못한다. 대평리 집 입주 전에 고맙게도 주인집에서 가스를 가득 채워놓으셨다고 했다. 겨울이 오기 전까지 나는 가스에 대해서는 완전히 잊어버리고 살고 있었다. 

외출하고 집에 돌아온 어느날 밤, 보일러가 안 들어왔다. 주인집을 찾았다.

"가스가 떨어졌다고요? 어떻게 그렇게 가스가 빨리 떨어져요?"
"보일러를 매일 트니까 그렇지!"
"헉!!!!"

입 돌아가기 전까진 보일러를 틀지 않는다!

겨울에 보일러를 매일 틀지 않는다는 건 생각해본 일이 없다. 밤새 떨며 다음날 멘붕에 빠진 채로 가스배달소에 전화했더니 삼십분만에 엘피지 가스통이 배달 왔다. 50kg에 10만2000원. 비싸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어쩔 수 없다.

주인집과 같은 가격대로 해달라고 주인 아주머니가 박박 우겨주신 덕에 그나마 5천 원 깎았다. 그 날 이후로 나는 입이 돌아갈 지경이 되지 않으면 보일러를 틀지 않았다. 수면양말을 신고 잠바를 입었다. 전기장판 밖으로 최대한 나가지 않았다. 보일러를 틀더라도 15도 이하를 유지했다.

그렇게 아껴서 쓰는데도 며칠 되지도 않아 불시에 가스가 떨어지는 일이 발생한다. 볶음밥을 한참 볶다가 가스가 떨어지면 화가 치민다. 요즘은 잔여량을 알려주는 건전지도 있는 세상인데 왜 그 비싼 가스통은 그런 기능이 없는 건지···.

누가 우리집 가스를 몰래 훔쳐가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쯤되니 가스통 실은 트럭이라도 보면 납치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다. 이런 심정을 주변에 호소하는데, 서귀포시 하원동 아파트에 사는 한 지인은 방 하나 반쪽만 15도로 틀었는데 가스비가 25만 원이 나왔다며 입에 거품을 문다.

제주도에도 제주시의 일부 지역은 도시가스가 공급된다. 그렇지만 대부분 육지처럼 LNG천연가스가 아닌 LPG와 공기의 혼합방식이며, 저렴하지도 않다. LNG공급을 위한 기지가 한림에 생긴다는데, 서귀포에 공급될 날을 기다리는 건 요원해 보인다.

현재 제주도는 기름보일러, LPG가스보일러, 화목보일러, 전기보일러 등이 혼재되어 있다.
제주도는 사실 서울보다는 덜 춥다. 한라산과 중산간지역을 제외하면 해안가 지역은 겨울에도 일반적으로 영상의 온도를 유지한다. 날마다 눈이 와서 길바닥에 쌓이고 빙판길에 넘어질세라 조심조심 걷는 일은 제주도에서 거의 없다. 

그렇지만 종잡을 수 없는 제주도의 바람은 태풍이 오는 것처럼 철제 현관문을 흔들 정도여서, 집안에 찬 기운이 들이친다. 이렇게 차가운 겨울밤을 보내야 하는 도민들은 전국 최고 수준의 비싼 난방비에 몸을 움츠리고 산다. 서울처럼 난방을 했다간 가스비 폭탄을 맞게 된다. 섬에 산다는 이유만으로 이렇게 살아야 한다니, 조금 서럽다. 

서러우면 밖으로 나간다. 바람이 거세지 않은 날 제주도의 겨울은 여름에 주로 오는 관광객들이 알지 못하는 맛이 있다. 한라산도 좋고, 눈 덮인 사려니 숲길도 좋다. 굳이 힘들게 한라산을 올라가지 않고 차를 타고 한라산 둘레를 지나가기만 해도 폭설이 내린 한라산의 멋진 설경이 파노라마처럼 눈앞에 펼쳐진다.

제주도 말고 어디서 이런 맛을 느껴볼까. 그렇게 팔 벌려 포근히 감싸주는 듯한 눈 덮인 한라산을 볼 때면 절로 이런 말이 나온다. 

"그래, 제주도는 이런 맛이지!" 

제주도의 겨울, 예상치 못한 가스비 공격 때문에 춥긴 춥다. 그래도 포기할 수 없는 제주만의 매력 때문에 나는 오늘도 덜덜 떨며 제주에 산다.

 눈덮인 사려니숲길을 걷는 사람들.
ⓒ 조남희



#제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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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사는 서울처녀, 제주도에서 살아가는 이야기를 전해드릴게요 http://blog.naver.com/hit10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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