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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여름 가뭄과 폭염, 그리고 볼라벤-덴빈-산바로 이어지는 연이은 태풍이 한반도 남해안에 남긴 상처는 이루 말할 수 없다. 농작물은 온통 쑥대밭이 돼 고추·콩·참깨 등 밭작물은 앙상한 줄기만 남아있다. 결실을 앞두고 바람을 맞은 벼는 잎과 이삭이 하얗게 말라 쭉정이 뿐이다. 가을햇살 아래 황금빛으로 물들어가야 할 들판이 온통 회갈색으로 메말라 볼품이 없다.

서남해안 연안을 매우고 있던 전복·굴·김 양식장은 뜯기고 부서진 채 무더기로 엉켜 해안가로 밀려와 그 형체마저 알 수 없이 지금도 모래톱과 갯바위에 나뒹굴고 있다. 산은 산대로 수십 년 자란 나물들이 뽑히고, 꺾이고, 넘어져 난리도 이런 난리가 따로 없다. 태풍에 잎을 다 떨어뜨리고 가지만 앙상한 벚나무 가로수는 어떻게든 살아볼 요량으로 철 잃은 꽃을 피우고 있다.

주민들과 관공서에서는 많은 인력과 장비를 동원하여 피해복구에 힘써보지만 한계가 있다. 해안가에 쌓여있는 양식 장비와 산 속에 쓰러진 나무들을 정리하기 위해서는 앞으로 몇 년이 걸릴지도 모르는 상황이다. 산은 언제쯤 울울한 나무들로 제모습을 갖추고 사람들을 맞이할 수 있을지 기약할 수도 없다.

태풍에 쓰러진 나무들 태풍에 쓰러진 나무들 사이로 언제 다시 나무들이 자라 이만한 숲을 이룰 수 있을 지 안타깝다.
▲ 태풍에 쓰러진 나무들 태풍에 쓰러진 나무들 사이로 언제 다시 나무들이 자라 이만한 숲을 이룰 수 있을 지 안타깝다.
ⓒ 임경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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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일을 겪고 나면 자연 앞에 한없이 나약한 인간의 모습을 보지만, 사람들은 또 언제 그랬냐는 듯 그새 잊고 욕심껏 자연을 파헤치고, 자르고, 깎으며 재단하려 애쓴다.

추석을 맞아 찾은 고향은 생각보다 처참했다. 태풍에 생채기를 입은 산야는 찢겨진 나뭇가지가 말라 온통 검붉은색이다. 주렁주렁 빨간 고추가 익어가고, 어머니가 노을에 젖어 참깨를 털던 산밭에는 앙상한 고춧대 사이로 물고랑만 깊이 파여 있다.

상처뿐인 바다에서는 추석도 아랑곳하지 않고 말목과 부이, 로프 등 양식시설물을 챙겨 바다를 오가며 재기의 몸부림을 치고 있는 주민들 대하기가 미안하다. 어둡게 그늘진 그들의 얼굴에 무언가 위로의 말이라도 해줘야 하는데, 깊게 패인 주름 속에 드리워진 근심이 그 어떤 말로도 위로될 수 없을 것 같아 말문을 닫는다.

철 잃고 핀 벚꽃 태풍에 잎을 떨군 벚나무의 고군분투가 꽃으로 피어났다.
▲ 철 잃고 핀 벚꽃 태풍에 잎을 떨군 벚나무의 고군분투가 꽃으로 피어났다.
ⓒ 임경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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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 않아도 사람들이 떠나고 고령화돼 고요하고 황량한 마을이 태풍의 영향으로 찾아오는 이도 줄고 모두들 생활고에 바빠 명절 분위기를 찾아볼 수가 없다. 그래도 지난해까지는 가까운 이웃 친지들끼리 둘러앉아 서로의 안부와 세사의 풍설을 나누며 술잔을 주고받았는데, 올해는 그런 자리 만들기도 힘들다.

국민들이 힘들고 어려울 때는 풍년이 들어 먹을거리라도 풍성해야 하는데, 가뜩이나 일자리는 없고 물가는 치솟아 서민들이 살아가기에 힘든 상황에서 농사마저 작파해 앞으로 민심이 얼마나 흉흉해질지 걱정이다. 더욱이 연말에는 대선을 앞두고 있어 온통 관심이 그쪽에만 쏠려있고 서민들의 생활고에는 안중에도 없는 듯하다.

정부야 농산물 가격이 오르면 보관량을 방출하고 외국에서 수입해 온다지만, 생활의 터전을 잃은 농어민들은 어디에서 위로를 받고 보상을 받으며, 희망의 실타래를 다시 풀어 나갈 수 있을지... 한가위 둥근달 속으로 명멸되는 그들의 수심 가득한 얼굴이 한없이 애잔하게 느껴진다. 모든 것이 풍성하고 넉넉해야할 이 가을에 근심이 앞서니 막막할 뿐이다.


#태풍피해#추석#고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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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물처럼, 바람처럼, 시(詩)처럼 / essayist, reader, travel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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