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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에야, 아주 뒤늦게 영화 <도가니>를 봤다. 워낙 많이 회자된 영화인지라 상대적으로 감흥이 덜하리라 짐작했다.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한마디로 충격이었다. 이런 일이 벌어진 사회의 구성원으로서의 자괴감, 어른으로서의 부끄러움, 남자로서의 당혹감, 선생으로서의 수치심, 그리고 인간으로서의 먹먹함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영화 <도가니>에 극적 전개를 위한 허구적 요소가 얼마나 들어갔는지 모른다. 100% 사실은 아닐 것이다. 그렇더라도 영화는 현실의 본질을 크게 훼손하지 않았으리라. 신성하다는 학교에서 교육자가 피교육자를 성적으로 유린한 사실, 그것도 상습적으로. 가해자의 범법 행위가 사법부·경찰 등의 권력에 의해 은폐된 일. 말 못하고 듣지도 못하는 어린 학생은 사회적 약자 중에 약자라는 사실 등등.

 

가장 섬뜩한 것은 그런 일이 우리 사회 한 구석에서 실제로 벌어졌다는 사실, 그 자체다. 무엇이 문제일까? 인간의 탈을 쓴 쌍둥이 형제와 교사? 양심을 팔아 돈과 자리를 구걸하는 일군의 파렴치한들? 물론 그들이 저지르고 키운 일이긴 하다. 하지만 이런 일탈적 존재가 문제의 발단이자 몸통은 아니다. 이들이 출몰하고 활개 치게 한 배후에는 사회적 무관심이 똬리를 틀고 있다. 바로 그 때문에 엽기적 강자가 무고한 약자를 함부로 취급해도 쉬쉬 할 수 있는 분위기가 조성되는 것이다.

 

인권도 그렇고, 민주주의도 그렇고, 제도의 문제가 아니라고 본다. 2009년 5월23일 서거한 노무현 전 대통령 묘역에 가면 너럭바위를 받치는 강판에 이런 글귀가 새겨져 있다. '민주주의 최후의 보루는 깨어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입니다.'

 

노 전 대통령 서거 당시 분향소를 찾은 김대중 전 대통령은 "나의 반쪽을 잃어버린 것 같다"고 통곡하며 "지금은 민주주의의 위기"라고 일갈했다. 그는 20여일 뒤인 6월11일 6·15 남북정상회담 9주년 기념식에 휠체어를 타고 나타나 작심한 듯 호소했다. "행동하는 양심이 되자.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악의 편이다. 행동하면, 그것이 옳은 일인 줄 알면서도 무서우니까, 시끄러우니까, 손해 보니까 회피하는 일도 많습니다. 그런 국민의 태도 때문에 의롭게 싸운 사람들이 죄 없이 세상을 뜨고 여러 가지 수난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면서 의롭게 싸운 사람들이 이룩한 민주주의는 누리고 있습니다. 이것이 과연 우리 양심에 합당한 일입니까." 이는 그의 생전 마지막 연설이 되었다.

 

민주주의를 위해 헌신한 두 전직 대통령의 결론은 '깨어있는 시민'과 '행동하는 양심'이었다. 둘은 표현만 다를 뿐 같은 말이다. 우리가 몸담고 사는 사회와 이웃에 대한 관심. 그것이 민주주의의 출발점이라는 절규다. 영화 <도가니>를 보면서 든 암담함과 그 뒤에도 내내 가시지 않은 무력감의 실체도 다름 아닌 이 세상과 타인에 무관심한 세태였다. 만약 우리가 깨어있는 시민이고 행동하는 양심이었다면 '광란의 도가니'가 가당키나 한 일이었을까. 영화 속 무진은 우리 사회의 자화상인 것이다.

 

올해 어린이날을 맞아 <경향신문>과 <고래가그랬어 교육연구소>가 공동으로 '아이를 살리는 7가지 약속'을 제안했다. 1. 지금 행복해야 한다. 2. 최고의 공부는 놀기다. 3.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게 성공이다. 4. 남의 아이 행복이 내 아이 행복이다. 5. 성적이 아니라 배움이다. 6. 대학은 선택이어야 한다. 7. 아이 인생의 주인은 아이다.

 

구구절절 옳은 말임을 우리 모두 잘 알고 있다. 아이들은 그렇게 자라야 한다. 그러나 나 홀로 나서기는 불안하다. 내 아이만 경쟁 사회에서 도태될까 두렵기 때문이다. 그저 부모란 이유에서 아이에게 미래의 행복을 위해 오늘의 행복을 저당 잡히라고 강요하는 셈이다. '7가지 약속'은 우리가 아이들에게 베풀 수 있는 최소한의 배려다. 우리 모두가 서명을 통해 7가지 약속에 동참하는 소박한 행동에 나설 때에야 내 아이뿐 아니라 우리 아이들의 숨통이 트일 것이다.

 

영화 <도가니>의 끄트머리에 이런 말이 나온다.

 

"우리가 싸우는 건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가 아니라 세상이 우리를 바꾸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예요."

 

인권도, 민주주의도, 아이들의 행복도 거창한 구호나 고도의 법제도 개선이 아니라 우리 주변에 대한 관심과 작은 행동에서 싹튼다. 어린이나 장애인 같은 사회적 약자에게는 강자의 횡포나 배고픔 따위보다 무서운 게 우리의 무관심일지 모른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대전충남인권연대 뉴스레터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도가니#무관심#양심#인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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