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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복을 받으려면 복 받을 일을 해야한다 생각합니다. 그것이 우리네 조상님들이 후손들에게 전해준 아름다운 유산이란 생각도 합니다. 새해가 온 것을 아는 것은 사람뿐일 듯합니다. 그리고 한 해의 마무리에 대한 아쉬움도 사람만이 느끼는 감정미학은 아닐까요? 만 47세의 청년으로 제게 작년 연말은 사실 가장 의미있는 연말이었을 것 같습니다.

 

여덟 차례 여행한 네팔이고 네팔의 문화 예술인 그리고 이주노동자들과 많은 인연을 쌓아온 사람입니다. 작년 5월에 네팔을 찾고 7월쯤 결혼을 하기로 한 처자를 만나 언약을 했습니다. 양가 부모의 허락도 받았습니다. 결혼 절차가 까다로워 일시 귀국했다가 다시 네팔을 찾고 기사에 올린 것처럼 지난 12월 15일에 결혼식을 했습니다. 그러니 연말의 기억치고는 가장 아름다운 기억일 듯도 하고 소중한 연말일 듯도 합니다.

 

결혼한 후 보통의 경우라면 신혼여행도 가고 신혼재미도 말할 법한데 그렇지는 못합니다. 아내는 전과 다름없이 결혼식을 위해 모처럼 5일간의 휴가를 냈고 그중 하루 결혼식을 했습니다. 그리고 결혼식에 참석한 인도에서 오신 어머니와 가족들, 사가르마타(에베레스트)히말 기슭인 오컬둥가라고 하는 곳에서 찾아온 아버지를 찾아 인사를 했습니다.

 

제 아내 먼주 구릉은 두 사람의 어머니와 두 사람의 아버지가 있습니다. 한 사람의 아버지는 자신의 아버지와 헤어진 어머니가 재혼하여 여동생과 남동생을 낳고 돌아가셨습니다. 어린 시절 헤어진 아버지는 또 다른 어머니와 결혼하여 동생들을 두었습니다.

 

사실 제가 결혼하기로 결정했을 때는 함께 사는 여동생과 어머니만 생존한 것으로 알았습니다. 그러니 결혼 후 안 사실대로 보면 제 아내 먼주 구릉(37세)은 제게 거짓말을 참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전 그녀의 그런 거짓말에 하나도 놀라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녀가 자신의 여동생인 언주 구릉(21세)과 너무나도 잘 지내는 모습 때문이었습니다. 두 자매의 모습에서는 그 어떤 특별한 갈등을 볼 수 없었습니다. 그들이 다른 아버지와 한 어머니의 자매인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결혼식을 얼마 남겨두지 않은 상태에서 먼주는 홀로 고민했습니다. 아버지에게 연락을 할 것인지 말 것인지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처음에는 당황한 중얼거림인데 나중에 자초지종을 들은 저는 그냥 무조건 모셔야한다고 말했습니다. 잘한 것일까요? 그후 먼주는 아버지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그리고 살얼음판을 걷듯 결혼식이 다가오는 날들을 기다렸습니다. 지금은 인도에 살고 계시는 어머니가 이 소식을 알면 결혼식에 오지 않으실 거라는 것입니다. 두 분이 헤어지고 한 번은 아버지를 뵈러 오컬둥가 사가르마타 기슭의 산 마을을 찾았다고 합니다. 그때도 아버지는 다정한 모습을 보여주지 않으셨다고 합니다. 어린날의 불운한 기억을 안고 산 그녀가 가엾게 느껴졌습니다.

 

아무튼 결혼식 며칠전 두 분이 카트만두의 각기 다른 집에 와계신다는 소식을 접했습니다.

저는 먼주와 함께 아버지를 찾아 인사를 드렸습니다. 아버지는 눈에 눈물이 고였고 먼주는 아무렇지 않은 듯이 인사를 했습니다. 먼주는 다른 어머니와 한 아버지의 딸인 산토스라는 여동생과도 반가운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조금은 서먹한 시간이 흘렀습니다.

 

하지만 아버지와 딸 그리고 사위가 될 낯선 이방인 사이에는 그 어떤 담장도 없는 것처럼 편안한 인사가 이어졌습니다. 그리고 이틀 후 인도에서 네팔로 진입하는 네팔측 도로가 통제되어 인도에서 어머니가 오실 수 없을 지도 모른다는 뉴스가 전해졌습니다. 조금은 암담하고 답답했습니다.

저는 아내 될 사람에게 하늘의 뜻에 맡기자 말했습니다. 내심 걱정은 했으나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하늘이 보살펴 줄 것이라 호언하며 말했습니다. 다음날 길이 열렸습니다. 결혼식 바로 전날인 12월 14일에 인도에서 어머니가 도착하셨습니다. 마치 대단한 기적이 이루어진 것처럼 먼주와 저는 기뻐했습니다. 재혼한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지금은 홀로 고인이 된 아들의 아들과 며느리와 함께 사시는 어머니가 장녀인 딸의 결혼식에 참석하지 못하실 것을 염려했기 때문입니다. 남일이라도 안타까운 일일 것인데 당사자의 일이니 더욱 그 다행스러움은 큰 기쁨으로 느껴졌습니다. 다음날 결혼식은 예정대로 진행된 것이 아닙니다.

 

당초 한국의 전통혼례를 계획했으나 전통혼례복이 준비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한복을 입고 인사를 하는 것으로 식을 올리자고 먼주와 의논했습니다. 고민하다 그래도 결혼이라는 의식을 올리는데 그냥 인사만 하기는 아쉬운 생각이 났습니다. 그래서 과거 한 사찰을 찾은 신도에게 스님이 축원을 빌어주느라 목에 걸어주었다는 카다를 떠올렸습니다.

 

우리가 새로운 방식을 찾아 우리에게 축원을 빌어주러 오시는 분들에게 먼저 카다를 목에 걸어주자는 것이었습니다. 당초 150명에게 청첩장을 전했고 150여명이 참석하리라 짐작했습니다. 그래서 150개의 카다를 준비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생각보다 훨씬 많은 인사가 결혼식에 참석했습니다.

 

250여 명이 참석한 결혼식에서 하객들이 우리의 목에 걸어준 카다를 다시 다른 하객의 목에 걸어주는 불경?을 저질렀습니다. 이해해주시리라 믿습니다. 저는 당초 내년 설에 한국에서의 결혼식을 네팔 전통혼례로 하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내년 추석 전후로 일정을 바꾸었습니다. 네팔의 지인들에게 한국혼례의 예를 보여주려는 계획은 어긋났지만, 새로운 방식을 만들었습니다. 결혼식 후 네팔의 지인들이 새로운 혼례방식이 생겼다며 격려해주십니다. 한국에서는 네팔의 전통 혼례 모습을 제대로 보여드리고 싶습니다.

 

결혼식이 끝나고 저는 다시 아내가 된 먼주 구릉의 가족들을 찾아 인사를 했습니다. 같은 네팔 땅이지만 이틀 걸리는 먼 곳에서 찾아주신 아버지를 다시 찾았습니다. 아버지를 찾아가는 길에 저는 얼굴 한 번 뵌적 없는 먼주구릉의 다른 어머니에게 목도리를 선물로 준비해갔습니다.

 

그리고 산토스에게 색깔이 잘 어울릴지 물었습니다. 만족스런 얼굴로 같은 아버지이며 다른 어머니를 둔 두 자매 먼주와 산토스도 다정한 자매의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리고 얼마 전 로사르 때 먼주는 아직 한번도 본적이 없다는 그 어머니에게서 감사의 전화를 받았습니다. 처음이지만 길고 긴 인사가 이어졌습니다.

 

서로 다른 어머니와 서로 다른 아버지 그리고 아버지도 다르고 어머니도 다른 형제자매들이 다툼없이 화목한 모습을 보여주어 제게는 모두가 도통한 선인들처럼 보이는 날들입니다. 앞으로 그들 가족의 화목의 중심이 되기를 바라며 새해 그들의 인사 로사르 아쉬말라!를 꿈꾸어봅니다. 가족의 해체를 말하는 안타까운 한국 사회 현실을 생각하며 복잡한 가족관계 속에서도 아름다운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미담이 될 것 같아 글을 올렸습니다. 모두 행복하십시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e-수원뉴스에도 게재합니다.


#다른 아버지 같은 어머니#다른 어머니 같은 아버지#네팔에서의 결혼식#김형효#먼주구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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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사람의 사막에서" 이후 세권의 시집, 2007년<히말라야,안나푸르나를 걷다>, 네팔어린이동화<무나마단의 하늘>, <길 위의 순례자>출간, 전도서출판 문화발전소대표, 격월간시와혁명발행인, 대자보편집위원 현민족문학작가회의 회원. 홈페이지sisarang.com, nekonews.com운영자, 전우크라이나 예빠토리야한글학교교사, 현재 네팔한국문화센타 운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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